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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군의 무덤이 되고 만 골짜기

공주 우금티 전투에서 좌절된 자주와 민주의 꿈

등록|2024.07.21 17:47 수정|2024.07.22 13:45
2024년이 동학혁명 130주년이다. 처음엔 '반역'에서 동학란으로, 또 그사이 동학농민전쟁이었다가 백 주년에서야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름 하나 바꾸는데 백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동학혁명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혁명에 참여했던 오지영 선생이 지은 <동학사> 한 권을 들고 전적지를 찾아다니며, 그 답의 실마리나마 찾아보려 한다. 우리를 되돌아보는 기행이 되었으면 한다.[기자말]
전봉준은 죽어서라도 이기는 싸움을 하고 싶었다. 살아서 지는 싸움은 더 치욕스러울 것 같았다.

비록 패하더라도 아무도 잘못된 나라와 나쁜 권력을 바로잡으려 싸우지 않는다면, 시대와 후세에 허깨비만 남겨주는 너무 비겁한 역사가 될까 봐 염려했다. 또한 남의 나라에 들어와 주인행세 하면서 갖은 음모와 야욕을 드러내는 일본에 '우리 땅에서 나가라'며 목숨 걸고 싸우지 않는다면, 후손이 영원히 저들의 노예로 전락할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힘껏 싸워 반드시 이기고 싶었다. 한 세대가 짊어져야 할 역사가 부여한 책무로 여겼기 때문이다.
 

우금티사진 중앙이 이인에서 공주로 넘어가는 우금티이다. 주변 산세가 제법 험하다. ⓒ 공주시청


따라서 여하한 방법으로든 적을 섬멸해 공주를 탈환하고 싶었다. 그런 열망과 달리 후퇴하여 후일을 기약해야 할 갈림길에 내놓이고 말았다. 우금티 동학혁명군은 마지막 싸움에 맞닥뜨렸음을 직감한다. 화력 차이는 그만큼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청주로 진군하려는 김개남 부대도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싸움을 앞두고 있었다. 이 모든 게 공주 동학혁명군의 실탄과 포탄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직면한 상황이다.

공주를 포위하여

논산에서 보름 남짓을 보낸 동학군은 11월 8일(음) 다시 공주를 향해 진격한다. 우금티를 중심에 두고 부대를 나눠 공주를 포위한다. 동쪽 월성산에서 남쪽 주미산과 서쪽 두리봉을 잇는 약 16km를 빙 둘러 에워싼다.

이번 싸움의 주된 목표는 우금티다.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혼신으로 싸울 작정이다. 자기 백성을 죽여달라며 다른 나라 군대를 끌어들이는 것도 모자라 지휘권마저 넘겨버리는 나라, 백척간두다. 이제 오로지 동학혁명군의 손에 나라와 백성의 명운이 걸려있다.
 

주미동우금티 남쪽에서 바라본 고개와 주변 산세. 왼쪽이 두리봉, 오른쪽이 주미산이다. ⓒ 이영천


부대를 넷으로 나눈다. 우금티를 공격하는 부대, 효포에서 능티와 금학동을 공격하는 부대, 주미산 아래 오실을 공격하는 부대, 두리봉 옆 한산을 통해 곰나루 쪽을 공격하는 부대로 구성하였다. 주력은 우금티에 모으고, 수십 명씩 소부대로 편성하여 적정을 살피며 천천히 진격한다는 작전이다. 이인을 지나 우금티 아래 주미·태봉리 부근과 한산의 곰나루 부근과 능티 요소요소에 흩어져 진을 친다.

조·일 연합군은 동학군의 대대적인 공격에 철통같은 방어선으로 맞선다는 전술을 계획하였다. 동학군 각 부대의 약점까지 소상하게 파악한 정보를 바탕으로, 각 부대에 맞는 방어작전을 세워두었다. 이로써 동학군 전력이 바닥날 때까지 전투를 끌고 간다는 작전이다.

이에 참호를 이탈하지 말고 응사만 하라는 행동 지침을 내린다. 역시 자기들 무기 사거리 안으로 동학군을 끌어들여 전투를 벌인다는 원칙이다. 이로써 공격해 오는 동학군의 모든 화력을 고갈시키겠다는 전략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이 전쟁은 끝난다고 판단한 것이다.

우금티 마루에 나부낀 피에 젖은 깃발

9일, 동학군의 총공격 신호가 오른다. 우금티를 주력으로 능티와 오실, 한산에서도 일제히 공격에 나선다. 쌍방 간 대포와 기관총, 소총이 일제히 불을 뿜는다. 피아간 피할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싸움이다.

각 전선에서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이 한나절 이어진다. 연합군은 한곳에서 사격만 가해올 뿐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이를 수상히 여긴 전봉준은 일본군 지휘관 미나미의 전술을 간파해 낸다.
 

공주쪽우금티 터널 위에서 바라본 공주쪽 풍경. 끝내 이곳을 점령하지 못했다. ⓒ 이영천


작전을 바꿔 점령지를 우금티 너머 성황당이로 설정한다. 화승총 부대를 앞세우고 서양 총 부대가 적당한 간격에서 엄호하며 우금티를 공격한다. 오실 쪽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큰골을 향해 금학동과 성황당이 방향으로 공격해 들어간다. 충청감영이 있는 봉황산을 향해 두리봉과 일락산 쪽에서도 밀고 나간다.

앞이 넓게 열려있는 성황당이로 진격하기엔 동학군 화력이 너무도 약하다. 성황당이와 우금티에 연합군 포탄이 우박처럼 떨어진다. 이런 지루한 공방이 하루 반나절 이어진다. 10일 해 질 무렵 동학군 화력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어쩔 수 없이 후퇴할 수밖에 없다. 우금티 남쪽 태봉으로 물러난다.

태봉동쪽우금티 터널 위에서 바라본 주미동 방향. 이 골짜기가 동학혁명군의 무덤이 되고 말았다. ⓒ 이영천


11일, 마침내 김개남 부대가 청주로 진격한다는 파발을 보내온다. 우금티에서도 이날을 기해 재차 총공격에 나선다. 여러 끼니 음식을 준비해, 날이 밝기 전 각 전략지점을 점령해 적과 대치하다가 저녁 어둠이 내리면 총공격을 감행하기로 하였다.

모든 총의 탄환을 최소한으로 쓰면서 전술상 요충지인 일락산과 성황당이를 점령하여 농성하다가, 어둠을 틈타 능티와 한산 쪽에서 공격해오는 아군과 일시에 공주로 진격한다는 계획이다.

연합군도 버릇처럼 익숙하게 진을 친다. 매일의 일상처럼 이곳저곳 동학군 진지에 대포와 기관총을 펑펑 쏴댄다. 그렇게 한나절을 보내는 사이, 동학군 배치 상황이 드러난다. 그리곤 동학군 화력이 가장 약한 능티와 효포에 무지막지한 포격이 가해진다.

포탄이 산등성이를 넘어 효포 아랫말까지 떨어진다. 그 바람에 효포가 순식간에 무너지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 능티도 적의 수중에 떨어져 버린다. 시간이 지날수록 여기저기서 피해만 커가고 있었다.
 

우금티 산정솟대가 외로이 서 있는 우금티 산정. 우리 자주적 근대화와 민주주의가 이 고개 산정에서 막혀 버렸다. ⓒ 이영천


부득이 작전계획을 바꿔야 했다. 어둠을 이용하려던 공격 계획이 수포가 되었다. 전면전으로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다. 총공격 신호에 일락산과 성황당이로 공격을 집중한다. 연합군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기관총으로 응사해 올 뿐이다. 일락산에선 강력한 적들의 중화기에 맨몸으로 달려드는 형세다. 수많은 희생으로 일락산을 점령하면 적들은 봉황산으로 후퇴하여 기관총과 소총을 난사했고, 성황당이를 점령하면 물안주골로 그거리만큼 물러나 역시 무지막지한 포격을 가해왔다.
 
감영 뒤 봉황산으로 진격하던 한 부대도 여러 날을 두고 서로 싸워 양군은 서로 싸워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마침내 승리를 얻지 못하여 금강 하류인 곰나루를 건너고자 하였으나 또한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동학사. 오지영. 문선각. 1973. p254)

동학군의 눈부신 공격에도 불구하고 연합군 방어선엔 큰 변화가 없다. 터무니없는 화력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그만큼 공주 점령은 점점 더 멀어져 갔다.

동학군의 탄환이 바닥을 보이자, 전열을 가다듬은 연합군이 반격을 가해오기 시작한다. 절망이다. 전투를 끌고 가기엔 모든 게 열악하다. 그러함에도 동학군은 용감하게 진격에 진격을 거듭한다. 밀고 밀리는 공방이 계속 이어진다. 이내 동학군의 진격도 끝으로 치닫고 있었다.

우금티 등 4∼5곳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50여 차례나 이뤄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동학군 시체만 산처럼 쌓여갔다. 한 사람의 목숨을 겨우 총알 서너 개와 맞바꾸는 형국이다. 참으로 잔인한 전쟁이다. 아니 일방적인 학살행위다. 남공주를 둘러싼 40∼50리에 이르는 산악이 죄 핏물 흐르는 강으로 변했다. 전투는 13일까지 이어진다.
 

주미동과 우금티피비린내 나는 우금티 전쟁의 결과, 피로 물들었음이 분명해 보이는 들판과 하천. ⓒ 이영천


조선 관군의 전투기록인 '순무사 정보첩'에서 동학군이 얼마나 용맹하게 싸웠는지 엿볼 수 있다. 이 안에 원평 집강소를 기증한 '동록개'도 있었을까?
 
아, 저들 비류 수만의 무리는 40∼50리에 걸쳐 둘러싸고 길이 있으면 서로 빼앗고 고봉이 있으면 다투어 차지하여 동쪽에서 소리가 나는가 하면 서쪽으로 달리고 섬광이 왼쪽에 있는가 생각하면 즉각 오른쪽으로 향했습니다. (그들은)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며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먼저 오릅니다. 그들에게 어떠한 의리가 있으며 그들에게 어떤 담략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모습을 말하려고 하면 지금도 뼈가 떨리고 마음은 차가워집니다. (이단의 민중반란. 조경달. 박맹수 옮김. 역사비평사. 2008. p316 재인용)

일본은 그들 군대가 학살한 동학군 수를 축소 왜곡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3만∼5만이라고 하나 이를 망라하면 30만∼40만이라는 게 정설이다. 앞 수치는 우금티에서 숫자로 추정한다.
 
총 4천 명이 동원된 일본군이 …(중략)… 조선 전 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의 사망자 수는 3만 명을 훨씬 넘은 것이 확실하고 부상 후 사망한 수를 더하면 5만 명에 육박할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한국병합을 말하다. 이노우에 가츠오 外. 최덕수 옮김. 열린책들. 2011. p77)
 

동학혁명군위령탑우금티 공주쪽 산마루에 세워진 동학혁명군 위령탑. ⓒ 이영천

 
서산에 걸린 검붉은 해가 금강에 긴 꼬리를 드리운다. 노을 진 강물에 처연함이 묻어난다. 13일, 동학군은 총 퇴각 신호를 보낸다.
 
다시 남쪽 길로 향하여 오던 차 이인역에서 관군과 만나 싸워 패하여 남으로 논산 본진으로 돌아왔다. (오지영 앞의 책. p254)

길고 긴 며칠의 싸움을 끝으로 이인으로 총 퇴각하여 전열을 정비, 논산으로 물러난다. 백성의 힘으로 세우려던 자주와 민주의 열망이 끝내 우금티에서 막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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