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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의 태도가 참사" 참사 취재하던 기자, 남편을 잃다

[아리셀 희생자 이야기④] 고 김병철씨 아내 최현주 기자 "3주 지나도록 아무 설명 없는 회사, 인간 맞나"

등록|2024.07.20 10:50 수정|2024.07.20 10:50
6월 24일 오전 10시 30분. 작은 배터리에서 난 연기가 42초 만에 공장을 가득 메웠다. 그 짧은 시간 동안 23명의 소중한 삶이 사라졌다. <오마이뉴스>는 숫자 '23명'이 아닌 그들 한 명, 한 명의 삶을 전한다.[편집자말]

▲ 아리셀 참사로 남편 고 김병철(52)씨를 잃은 최현주(53) 충북인뉴스 기자, 그의 딸 김민정(23)씨, 김소혜(20) (오른쪽부터). ⓒ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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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주(53) <충북인뉴스> 기자가 지난 1년간 쓴 기사들이다. 지난해 7월 관리 부실로 인한 범람으로 14명이 사망한 오송 지하차도 참사를 1년 동안 보도했다. 충북 지역 공사장이나 공장에서 죽고 다친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 썼다. 유가족들과 생존자들을 찾아 참사 이후를 기록했다. 10주기를 맞은 세월호 참사와 1년을 넘긴 이태원 참사, 계속되는 죽음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중대재해처벌법을 다뤘다. 그는 15년 경력의 기자다.

최 기자의 기사는 6월 20일을 끝으로 한 달째 끊긴 상태다. 그리고 지난 7월 13일, 충북인뉴스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짤막한 기사 하나가 올라왔다.

【부고】 최현주(충북인뉴스 기자)씨 남편상. ▲김병철씨 별세.

지난달 24일 경기도 화성시 아리셀 리튬배터리 공장에서 일어난 화재 참사로 사망한 23명 중 1명이 최 기자의 남편이었다. 참사를 취재해온 기자가, 참사의 유가족이 됐다.

인터뷰 자리가 바뀌었다, "그분들 심정 알겠어요"
  

▲ 아리셀 참사로 남편 고 김병철(52)씨를 잃은 최현주(53) 충북인뉴스 기자를 지난 18일 경기도 화성시에서 만났다. 최 기자는 오송 지하차도 참사, 외국인 노동자 산재사망 등 숱한 참사를 취재해온 기자다. 최 기자 눈에 눈물이 고였다. ⓒ 김성욱


최 기자를 지난 18일 오후 경기도 화성시 모두누림센터에서 어렵게 만났다. 13~15일 남편의 때늦은 장례를 치르고 삼우제를 마친 뒤였다. 참사 이후 최 기자가 언론 앞에 나선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저도 기자지만, 지난주까지만 해도 인터뷰 같은 건 하나도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 마음 이해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저도 지금 기자님 계신 그 자리에 많이 앉아봤잖아요. 입장이 거꾸로 돼보니까, 많은 게 달라요.

오송 참사 때 버스 안에서 돌아가신 아파트 청소노동자 어머니의 아드님을 인터뷰하러 간 적이 있었어요. 그때 아드님이 저한테 되게 냉소적이셨거든요. 이런 취재해서 뭐하냐, 어차피 바뀌는 것도 없다, 뭘 자꾸 물어보냐고 화를 내셨어요. 그때 솔직히 저는 이해가 안됐습니다. 기사화되는 게 유가족들한테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이번 일을 겪으면서 그분이 떠오르더라고요. 이제야 그분 심정을 알겠어요. 저도 그동안 그런 기사를 많이 써왔지만, '진상규명'하면 뭘 하고, '책임자 처벌'하면 뭘 하죠? 죽은 남편은 그대로 죽어있어요."


참사 당일 아리셀 공장에 화재가 발생한 오전 10시 30분, 최 기자는 청주에 있는 충북인뉴스 사무실에 출근해 다른 취재를 하고 있었다. 오후 12시가 넘어서 아리셀에서 남편과 함께 일하는 친오빠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큰불이 났는데 남편이 안 보인다는 얘기였다. 최 기자는 곧장 화성으로 달려갔다. 남편에게 전화를 수십 통 걸었지만 답은 없었다.

'좀 다쳤겠지' 하는 생각으로 인근 병원을 찾으며 이동하던 중 첫 번째 사망자가 발견됐다는 속보가 흘러나왔다. 60대 한국인이라고 했다. '60대'라는 말에 안도했다. 남편은 52세였다. 화성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된 오후 2시 반쯤, 소방서에서 전화가 왔다. 장례식장으로 가라는 통보였다. 속보에 나왔던 첫 번째 희생자가 최 기자의 남편 고 김병철(52)씨였다.

최 기자는 "애들 아빠가 죽고 가슴이 뻥 뚫린 느낌"이라며 울먹였다. 기자로서 수많은 참사 현장을 겪었지만 "지금의 상황이 절망적이고 무력하다"고 했다. 옆에서 엄마의 말을 듣던 두 딸의 눈가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첫째 딸 김민정(23)씨는 "지금도 아빠가 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고 목소리가 들릴 것 같다"고 했다. 둘째 딸 김소혜(20)씨는 "어릴 때 학원도 안 가고 아빠한테 수학과 영어를 배웠다"고 했다. 고1인 열일곱 막내아들은 학교에 가있었다. 김씨는 세 아이의 아빠였다.

"참사 대하는 아리셀의 태도도 참사"
  

▲ 최현주 충북인뉴스 기자가 아리셀 측으로부터 온 문자를 보여주고 있다. 고인이 된 남편은 길림성 출신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잘못 작성된 내용이었다. 그는 "사람을 두번, 세번 죽이는 기분"이라고 했다. ⓒ 김성욱


김씨는 아리셀에서 연구소장으로 3년여간 일했다고 한다. 김씨는 배터리·프로그램 분야 전문가였고, 아리셀은 김씨를 영입하기 위해 박순관 대표의 아들인 박중언 본부장이 직접 청주까지 찾아오는 등 공을 들였다고 한다.

"그래서 더 배신감이 커요. 그렇게 회사에 필요한 사람이라 할 땐 언제고, 죽으니까 아무 연락도 없습니다. 남편은 박중언 본부장과 개인적인 관계도 있었어요. 나이가 훨씬 아래인 박 본부장을 '존경한다'고까지 했죠. 제가 '무슨 50대가 30대 보고 존경한다고 하냐'고 핀잔을 줬었는데… 박 본부장은 참사가 나고 한참 지나서야, 김앤장 변호사를 선임한 뒤에야 연락을 해왔어요. 인간의 도리가 아니에요."

집이 있는 청주에서 화성까지는 2시간 거리라, 남편이 월셋방을 얻어 아리셀에 출근하면서 둘은 주말부부가 됐다. 최 기자는 예전에도 다른 배터리 공장에서 불이 난 적이 있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남편의 일터가 이렇게 위험한 곳인 줄은 몰랐다고 했다. 휴일에 청주로 돌아온 남편은 공장에 중국인들이 많고, 상당수가 수시로 바뀐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3주가 지나도록 아리셀로부터 그 어떤 설명도 못 들었어요. 카메라를 데리고 와서 쇼만 했지, 제대로 된, 인간다운 사과도 안 했어요. 인간이라면 적어도 남편이 왜 죽었는지는 알게 해줘야 할 것 아닙니까? 남편이 일하던 곳은 아리셀 공장 내 1동 사무실이었어요. 화재가 발생한 3동이 아니었어요. 하도 답답해서 제가 직접 동료 직원에게 연락해 물어봤어요. 한 분 말로는, 밖에서 펑펑 소리가 나는 걸 들은 남편이 3동에 들어갔다가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한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남편은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어요. 공장에 오래 일한 중국인 여성분들 5명과 같이 늘 담배 모임을 한다고, 간식과 도시락도 나눠 먹는다고도 했고. 저는 남편의 마지막 순간이 힘들었었을지 꼭 알고 싶었는데, 직원분이 그러진 않았을 거라고…"

최 기자는 세 아이와 함께 남편의 시신을 확인했다. 최 기자는 "그나마 남편의 상태는 양호한 편이었다는데도 너무 처참했다"고 했다. 딸 김민정씨는 "비닐 가방 같은 게 씌워져 있어 형체만 볼 뿐 아빠 얼굴을 자세히 못 봤다"고 했다. 최 기자는 그렇게 남편을 마지막으로 본 후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남편의 편지 통이 떠올랐어요. 남편이 3년 전에 혈액암에 걸렸었거든요. 1년 반 만에 완치되긴 했는데, 그때를 계기로 남편이 틈틈이 편지를 써서 손바닥 만한 박스 통에 넣더라고요. 자기가 죽으면 이걸 열어보라고 하면서 항상 꽁꽁 봉해놨었어요. 열어보니 편지가 100통은 넘게 들어있더라고요. 사고 나기 전날 쓴 것도 있었고. 아이들과 저에게 사랑한다고, 아빠는 너희들 덕분에 행복했고, 잘 살길 바란다고 써있었어요. 그걸 읽고 '아, 남편은 지금 내가 이렇게 슬퍼하고만 있길 바라지 않겠구나, 내가 정신차려야겠구나' 싶었어요. 아이들에게도 그 편지 통이 큰 위안이 된 것 같아요."

그가 전하는 말 "독자 여러분, 정말 모르겠습니다"
  

▲ 아리셀 참사로 남편 고 김병철(52)씨를 잃은 최현주(53) 충북인뉴스 기자. 최 기자는 오송 지하차도 참사, 외국인 노동자 산재사망 등 참사를 취재해온 기자다. ⓒ 김성욱


최 기자는 남편이 사망한 지 20일이 지난 13일 장례를 치렀다. 90세를 앞두고 아들을 먼저 보낸 시어머니의 뜻이 컸지만, 그는 "다른 유가족들이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먼저 장례를 치르는 게 맞는지 스스로 갈등이 너무 컸다"고 흐느꼈다. 아직 10여 명의 아리셀 참사 희생자 가족들이 장례를 치르지 못한 상태다.

최 기자의 '갈등'은 그가 오랫동안 참사를 취재해온 기자였기 때문에 더 컸는지 모른다. 한국의 기업들은 노동자가 죽으면 유가족들을 어떻게든 설득해 서둘러 장례를 치르도록 유도해왔다. 비난 여론을 식히고 하루 빨리 사건을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지도록 하기 위해서다. 최 기자는 이같은 기업들의 생리를 수없이 봐왔다. 그는 "참사로 가족을 잃은 피해자인데, 정작 장례를 치르는 것마저 고민하게 내모는 것이 회사"라고 울었다.

"아리셀의 태도는 지금까지 내가 취재해온 회사들의 태도와 완전히 똑같습니다. 한마디로 '유가족들이 지쳐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거예요. 유가족들은 하루하루가 너무 괴로워요. 여기 화성시에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이라고요. 그걸 알고 아리셀은 김앤장까지 내세워 뻔한 수법을 쓰고 있는 거죠. 정말 비정해요. 얼마 전엔 '조속한 합의가 안되면 불이익이 갈 수 있다'는 협박식 문자까지 보냈더라고요. '복붙(복사해 붙이기)'을 한 건지, 남편이 길림성 출신이라는 잘못된 문자까지 왔어요. 심지어 자식이 없는 다른 피해자분에게 보낸 문자에선 자녀 장학금을 주겠다고 했대요. 사람을 두 번, 세 번 죽이는 느낌이에요. 참사를 대하는 아리셀의 태도도 참사입니다.

모 유력 신문에서 어제(17일) 아리셀 참사 유가족들이 하나로 조직되는 데 '외부 세력'이 개입됐다는 칼럼까지 나왔어요. 아닙니다. 아리셀의 이런 잔인한 대응 때문에 가족들이 모이는 겁니다. 남편 죽고 경황이 없어 제 대신 움직여준 김태윤 충북인뉴스 대표는 소식을 듣고 조문하러 왔다가 가족협의회 대표 일을 맡게 된 것일 뿐이에요. 그 사정을 다 알면서 아리셀은 '김병철 아내가 유가족을 주도한다'는 말까지 퍼뜨리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정말 인간이 맞는지 묻고 싶습니다."


최 기자에게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저도 참사에 대한 기사를 많이 써온 기자입니다. 참사를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 안전규칙을 지켜야 한다, 법을 바꿔야 한다, 기사를 많이 써왔어요. 그런데 정말 그러면 사람이 죽지 않을까요? 이젠 모르겠어요, 정말 모르겠어요.

왜냐면 저는 지금 '인간'이 아닌 모습들을 매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좌절했기 때문입니다. 돈도 필요 없습니다. 만약 아리셀이 가족들을 단 한 번이라도 인간으로 대했다면, '정말 미안하다'고, '우리만 살아남아서 슬프다'고, '동료들이 보고 싶다'고 얘기했더라면, 지금 가족들의 분노가 이렇게 크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 달이 다 돼가는 지금도 아직 화성시청에 유가족들이 모여있는 거죠. 찬 냉동고에 가족들을 두고, 어쩌지도 못하고요. 뭐하러 이렇게 힘들게 싸우는 걸까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왜냐면 이건 승자가 없는 싸움이거든요. 애초에 이기는 게 없는 싸움이거든요. 그런다고 죽은 가족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니까요.

가족들이 이렇게 싸우고 있는 건, 그것밖에 할 수 없어서입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짓밟히는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만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사로는 그렇게 많이 썼는데, 독자 여러분, 저는 이제 정말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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