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대통령 '16글자 지시사항', 정부가 마비됐다
[이희동의 5분] 대통령의 16글자 장마 지시사항이 드러낸 현실
기초단체 의원은 언론에 잘 노출되지 않지만, 기초지자체가 생각보다 많은 예산으로 다양한 일을 하는 만큼 나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본 시리즈에서는 서울시 강동구를 중심으로 구의원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보여주고자 합니다. 자치구의 정책들이 중앙정부와 광역시 정책들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국정철학과 기조가 어떻게 지역에서 발현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에 대해 구의원이 어떻게 견제하고 지지할 수 있는지 알리고자 합니다.[기자말]
▲ 전북 민생토론회, 발언하는 윤석열 대통령윤석열 대통령이 18일 전북 정읍시 JB그룹 아우름캠퍼스에서 열린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 스물일곱 번째, 신 서해안 시대를 여는 경제 전진기지, 전북'에서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계속되는 호우로 전국에 침수 피해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강동구 역시 예외가 아닌데요, 며칠 동안 내린 폭우로 도로 곳곳이 잠겼고, 반지하 주택에는 물이 들어찼으며, 비닐하우스 몇 동은 힘없이 내려앉았습니다.
비가 워낙에 갑자기 많이 와서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구의원으로서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지난해에 침수 피해를 입었던 곳이 또 잠기는 것을 보면 천재보다는 인재일 가능성이 높고, 참담한 주민들의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궁금해졌습니다. 대통령의 지시사항이 이 정도라면 과연 강동구는 수해와 관련된 자치단체장의 지시사항이 제대로 작성되고 시달되고 있을까?
강동구청장의 지시사항
▲ 지난 17일 폭우로 물이 찬 강동구 ⓒ 김민채
우선 올해 풍수해 관련 강동구청장의 지시사항을 살펴보았습니다. 각 부서에 시달된 공문에는 지난 2일 확대간부회의에서 구청장이 지시한 내용들이 추진부서와 협조부서와 함께 적혀 있었습니다. 풍수해와 관련된 지시사항은 비록 짧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의 그것만큼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행정의 말단에서 현장을 직접 접하는 구청장답게 구체적이고 실용적이었습니다.
ㅇ 본격적인 장마철이 시작되므로 비상연락망을 구축하고 업무매뉴얼(행동요령)을 숙지할 수 있도록 챙겨주시기 바람.
ㅇ 특히, 각 동장들은 침수취약 지역을 직접 파악하고 꼼꼼하게 살펴주시기 당부드림.
많은 공무원들에게 들어보니 구청장의 지시사항은 절대로 그냥 작성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회의를 하기 전, 담당 부서들이 우선 관련 자료를 구청장에게 제공하고, 그것을 보고 숙지한 구청장이 회의를 주관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덧붙인다고 했습니다. 지시사항이 즉흥적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혹여 시간이 부족하거나 해서 지시사항이 짧아지면 부득불 담당 부서가 안건과 관련하여 지시사항을 좀 더 자세하게 만든다고도 했습니다. 어쨌든 회의 안건으로 올라올 정도의 사안이라면 구청장은 이미 평소에도 그와 관련된 보고를 받았을 것이며, 이에 대한 지시도 틈틈이 내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구청장의 지시사항은 현재 구청의 현주소였습니다. 정치가 말과 글로 이루어지고, 공무원이 문서로 이야기하는 현실 속에서 구청장의 지시사항이 의미하는 것은 구정의 총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아찔한 대한민국의 현실
▲ 지난 8일 문화체육관광부에 하달된 '16글자 대통령 지시사항 통보'. ⓒ 문화체육관광부
구청장 지시사항에 대한 공무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더 아득해졌습니다. 한낱 구청장의 지시사항도 이렇게 많은 공무원들의 준비와 검토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지는데, 도대체 현 정부, 윤석열 대통령의 16글자 지시사항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그것을 받아든 공무원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요?
추측하건대, 대통령실은 장마와 관련된 회의를 하면서 꽤 많은 자료를 준비했을 것입니다. 지난해 오송 참사 등을 겪으면서 세간의 비판도 많이 받았고, 현재 정국의 가장 큰 이슈인 채 해병의 순직 역시 수해복구와 수색작업을 하다가 벌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된 행정조직이라면 올해 대책은 더 자세하고 치밀했어야 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대통령의 지시사항은 허투루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관련된 자료가 먼저 배포되고, 혹여 대통령의 관련 발언이 짧으면 담당 부서가 기존에 대통령이 했던 말들을 참조하여 부서가 보고하고 계획했던 정책들을 싣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단 16글자의 지시사항이었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래서 들으나 마나 한 내용이 대통령 지시사항에 담겨 있었습니다. 전 정부의 자세하고 구체적인 대통령 지시사항과의 비교는 차치하고서라도, 그런 말을 대통령 지시시항이라고 회람하라는 것 자체가 참담합니다.
▲ 문재인 대통령의 지시사항 ⓒ 충북인뉴스
이는 단순히 대통령이 국정을 돌보지 않는 문제가 아닙니다. 대통령의 국정에 대한 무관심도 질타받아야 마땅하나 더 아찔한 사실은, 공직 사회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대통령의 처참한 수준이 각색없이 날것 그대로 유통되는 상황.
16글자 지시사항은 공직사회의 복지부동의 방증이며, 국가 기강이 무너지고 있다는 심각한 신호입니다. 그 어느 사회보다 강력하고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 대한민국 관료들이 눈치만 보며 일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 때는 멀쩡하던 대한민국 정부가 현재는 돌아가지 않고 있습니다.
매년 반복되는 수해에 대해서도 제대로 대처하기는커녕, 지시사항도 겨우 한 줄 남기는 현 정부. 과연 대한민국은 괜찮은 걸까요? 이런 상황에서 전쟁이라도 나면 우리 공동체는 안전할 수 있을까요?
대통령의 지시사항은 통치철학의 현현이요, 권위의 원천입니다. 그런데 현재 대한민국 대통령의 지시사항은 오히려 세간에서 희롱의 대상이며, 대통령 부재의 근거일 뿐입니다. 부디 현 정부가 정신차리고 기본으로 돌아가길 바랍니다. 강동구도 하는 걸 대한민국이 못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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