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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 시대에 이 시인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2024, 지금 김남주] 우리가 이 시대에 김남주를 다시 호명하는 이유

등록|2024.08.01 14:13 수정|2024.08.01 14:13
김남주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딱 30년이 되었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라고 노래한 시인의 바람대로, 우리는 손을 잡고 함께 걸어 온 것일까.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김남주 정신이 필요하다면 어떤 이유에서일까. 지금 여기에서 김남주가 다시 살아 서 있는 모습을 그려 본다. 24인의 문학인들과 활동가들이 2024년의 한국 사회를 짚어 보며,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고자 한다. [편집자말]
80년대 초, 나는 늦은 나이에 대학에 들어가 후배들과 시를 공부하면서, 비로소 '광주 5·18'과 '김남주 시인'을 만나게 되었다. 누가 어떻게 가져왔는지 모를 김남주의 '옥중시'를 필사하고 읽으면서 우리는 '시와 혁명'을 꿈꾸었다.

"학살의 원흉이 지금 / 옥좌에 앉아 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자가 / 외적의 앞잡이이고 / 수천 동포의 학살자일 때 /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어야 할 곳 / 그곳은 어디인가 / 전선이다 감옥이다 무덤이다"라고 노래한 '학살' 연작과 '살아 남은 자들이 있어야 할 곳' 같은 시를 읽을 때면 머리가 쭈뼛거리고 온몸이 오싹했다.

당시 군사 독재 정권을 비판하는 것은 무조건 이적행위로 간주되었고, 당연히 빨갱이 취급을 받았다. 그 시절 김남주의 시집은 금서요 불온서적이었다. 그런데도 문학을 공부한 사람뿐만 아니라 80년대 이후 소위 지식인으로서 '먹물'을 먹은 사람이라면 김남주의 시적 자장(磁場) 안에서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졸업 후 교직에 들어가 "민족과 역사 앞에 떳떳한 교사로 살겠다"는 다짐을 하고 전교조 활동과 참교육 실천운동에 뛰어들었다.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된 후, 복직 투쟁과 참교육 운동의 전선에서 거리의 교사로 살아가던 어느 날, 김남주 시인의 부음을 들었다.

그날, 1994년 2월 16일 오후 5시, 전남대학교 중앙도서관 앞 5월 광장에는 고 김남주 시인의 노제를 위해 모인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수십 개의 만장이 바람에 펄럭이고 땅바닥에 주저앉은 사람들은 소리 없이 흐느꼈다. 그날, 빈 하늘에서는 김준태 시인이 쓴 만장시 '황토비(黃土碑)'가 절규하고 있었다.

"아들아, 1백년전 / 우리에게는 김남주라는 / 혁명전사-온몸이 사랑과 불꽃으로 뭉쳐진 / 그런 시인이 있었단다 … 우금치 피바다 산마루를 넘어 / 끝끝내 끝끝내는 '조국은 하나다!' / 우리 모두의 철조망을 뚫어버린 / 김남주라는 가슴 벅찬 시인이 / 아들아, 우리에겐 있었단다."

그리고 그날, 황지우 시인이 울먹이며 낭송한 조시(弔詩)가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기만 하다.

"한 시대의 창공을 후려치는 채찍질처럼 뇌성번개쳤던 그대 생애를 우리는 / 차마 따라가지 못했으며 다만 피뢰침 아래 웅크린 채 / 겁대가리 하나도 없는 그대의 '함성'을 들었다 / … 아아, 이 아무도 못말리는 꼴통이여, 통큰 강도여, 혁혁한 전사여, 혁명가여, / 그러나 끝끝내는 시인이여, 이 저주받은 대지를 노래한 시인이여"

그날, 그렇게 우리는 5월 광장에 모여 한평생을 '민중해방', '조국통일' 전선에서 펜을 무기 삼아 싸우다가 '조국의 별'이 된 혁명 시인을 가슴에, 망월동 묘지에 묻었다.

'조국의 별'이 된 혁명 시인
 

▲ 1989년 열린 '통일을 위한 민족문학의 밤' 행사장에서 노태우 정권의 노동운동 탄압 사례를 거론하며 분노를 터뜨리고 있는 김남주 시인 ⓒ 아트앤스터디


그리고 이제 30년이 지난 오늘, 철조망이 가로막힌 분단 조국의 푸른 하늘 아래서 '조국의 별'이 된 혁명 시인 김남주를 다시 불러본다. 80년대 사회변혁운동의 이념과 정신을 온몸으로 밀고 나간 전사(戰士)요, 혁명가였던 시인 김남주! 일찍이 염무웅 선생이 '70년대의 한국문학을 김지하가 버텨냈다면 80년대를 버티고 있는 것은 김남주'라고 지적했듯이, 그는 80년대 우리 민족문학의 한 정점이었다.

그의 시가 우리 문학사의 전통 위에서 빼어난 점은 1980년대라는 한 시대를 대표하면서도 동시에 고난에 찬 우리 역사로부터 민중적․민족적 전통을 올곧게 이어받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용운, 이상화, 심훈, 이육사, 윤동주 등 식민지 시대의 진보적이고 양심적인 시인들의 유산을 소중한 것으로 간직하고 그것을 물려받고 있다는 것이다.

한 시대의 / 불행한 아들로 태어나 / 고독과 공포에 결코 굴하지 않았던 사람 / 암울한 시대 한가운데 / 말뚝처럼 횃불처럼 우뚝 서서/한 시대의 아픔을 / 온몸으로 한몸으로 껴안고 / 피투성이로 싸웠던 사람 // 중략 // 누구보다도 자기 시대를 / 가장 정열적으로 사랑하고 / 누구보다도 자기 시대를 / 가장 격정적으로 노래하고 싸우고 / 한 시대와 더불어 사라지는데 / 기꺼이 동의했던 사람. - '황토현에 부치는 노래' 중에서

이 시는 김남주 시인이 녹두장군 전봉준을 추모하며 쓴 시이다. 그런데 나는 이 시를 읽을 때면 늘 전봉준과 김남주 시인의 생애가 오버랩되곤 한다.

김남주는 1945년 10월 16일 전남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에서 해방둥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30여 년 동안 남의 집 머슴이었고, 어머니는 그 아버지가 머슴을 살던 주인집의 딸이었다. 훗날 시인이 된 김남주는 정직하게 자신의 가계를 시로 썼다.

그는 이름 석자도 쓸 줄 모르는 무식쟁이였다 / 그는 밭 한 뙈기 없는 남의 집 머슴이었다 / 그는 나이 서른에 애꾸눈 각시 하나 얻었으되 / 그것은 보리 서너 말 얹어 떠맡긴 주인집 딸이었다 - '아버지' 중에서

예나 지금이나 세상으로부터 천대받고 무시당하는 농민들의 가장 큰 꿈은 자식 중 누군가가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김남주가 "뺑돌이 의자에 앉아 펜대만 까딱까딱하고도 / 먹을 것 걱정 안 하고 사는 그런 사람이 되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김남주는 끝내 아버지가 바라던 그런 사람과는 너무도 먼 길을 선택했다. 호남의 명문이라는 광주제일고 2학년 때 오직 일류대를 가기 위한 전쟁터 같은 학교가 싫다는 이유로 덜컥 자퇴서를 내버린 것이었다. 그 후 검정고시를 거쳐 전남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한 후, 3선 개헌 반대투쟁, 교련반대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반독재 투쟁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72년 대학 4학년 때. 박정희 정권이 유신헌법을 선포하자 친구 이강과 함께 전국 최초로 반유신투쟁 지하신문 <함성>을 제작 배포하여, 세칭 '함성'지 사건으로 구속되어 8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이 사건으로 전남대에서 제적당했다.

"내가 처음 / 시라는 것을 써 본 것은 / 감옥에서였다 / 연필도 없고 / 종이도 없고 / 둘러보아 사방이 벽뿐인 / 그 벽에 하얀 벽에 / 나는 새겨 놓았다 / 이빨로 손톱을 깨물어 / 피의 문자로 새겨 놓았다" - '그 방을 나오면서' 중에서

혁명을 꿈꾸며 전사의 길을

김남주는 1974년 석방 후 해남으로 낙향하여 농사일을 거드는 한편 옥중생활에서 겪은 가혹한 고문 체험과 농민들의 생활상을 시로 쓴 '진혼가'·'잿더미' 등 8편의 시를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그러나 김남주는 시를 쓰는 일로 만족하지 않고 1977년 지역활동가들과 광주에서 '민중문화연구소'를 개설하여 '사회문화운동'의 구심 역할을 하다 수배되었다. 1978년 서울에서 도피 생활 중 당시 가장 강력한 반유신 지하조직인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에 가입한다.

이때부터 김남주는 혁명을 꿈꾸며 전사(戰士)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다 1979년 10월 80여 명의 동지들과 체포되어 60일 동안 가혹한 고문 수사를 받고, 이듬해 1980년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로 이감된 후, 1988년 12월 전주교도소에서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될 때까지 9년 3개월 동안을 감옥 안에서 '전사 시인'의 삶을 살았다.

그의 삶과 문학은 세상의 불의와 불평등을 상대로 한 치열한 싸움으로만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김남주에게 있어서 '싸움'의 대상은 정치적 독재와 반통일, 착취, 외세 따위였다.

시인이여 / 누구보다 먼저 그대 자신이 / 싸움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 시인이여 /  누구보다 먼저 그대 자신이 / 압제자의 가슴에 꽂히는 / 창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 '시인이여' 중에서

김남주에게 감옥은 창작의 산실이자 투쟁의 현장이었다. 감옥은 김남주 시의 출발점이었으며 옥중시가 그의 대표시가 되었다. 그는 칫솔을 못처럼 갈아서 우유곽 안의 은박지에 시를 새겼으며, 교도관의 은밀한 도움을 받아 밑씻개용으로 나오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똥색 종이에 볼펜으로 쓰기도 하고, 인쇄되지 않은 책의 페이지를 뜯어서 그 위에 시를 썼다.

김남주는 생전에 모두 510여 편의 시를 남겼는데 그중 360여 편이 옥중에서 쓰인 것이다. 그가 감옥에서 쓴 시들은 당시 대학생들의 의식화 교재가 되었고, 노래패는 그의 시를 노래로 만들어냈다. 암울했던 시대, 그의 시만큼 강한 무기는 없었다. 그의 시는 가장 선동적인 격문이었고 가장 투쟁적인 노래였다.

시가 물리적 힘으로 전환되는 신화를 탄생시켰다. 감옥에 있는 동안 그는 어느새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안치환이 부른 '노래(죽창가)',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자유' 등은 이때 쓴 시들이다.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 꽃이 되자 하네 꽃이 /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 / 녹두꽃이 되자 하네 // 중략 //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 다시 한 번 이 고을은 / 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 - '노래' 중에서

어두운 밤하늘 빛나는 별처럼
 

▲ 1989년 1월. '남민전 사건'으로 9년 3개월의 옥고 끝에 석방된 김남주 시인이 작가회의 신년 하례식 모임에 참석했다. 왼쪽부터 정희성, 이시영 시인, 현기영, 강승원 소설가, 김남주, 고은 시인, 백낙청 평론가, 문익환 시인. ⓒ 아트앤스터디


김남주는 감옥에서 나온 후 옥중에서 얻은 지병(췌장암)으로 투병하다 1994년 2월 13일, 향년 4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민중이 해방되기를 바라는 혁명의 노래를 남긴 채 그는 하나의 역사가 되었다. 김남주의 생애는 "부당한 세계를 향해 날아가는 화살촉 같은 자유인"이었으며, "피로 씌어진 언어의 화살"인 그의 시에는 '피묻은 진실'이 담겨 있었다.

그가 감옥 안에 있건 밖에 있건 그는 우리 시대의 중심에서 타는 가장 뜨거운 불이었다. 그의 시가 힘을 갖는 것은 바로 꾸밈없는 그의 순결성과 정직성 때문이었다. 우리가 김남주를 통해 배울 것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김남주가 제기하고 투쟁했던 문제들은 오늘 이 시간에도 여전히 우리 앞에 거대한 담론으로 살아 있다. 재빠른 변종과 개종으로 얼굴을 바꾸고 있지만, 그가 싸움의 대상으로 삼았던 적들은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 더욱 교묘하고 교활하게 '신자유주의'의 얼굴로 분장하고 우리의 숨통을 조여 오고 있는 형국이다. 남북분단이 존재하는 한, 자본주의의 모순이 그대로 살아 있는 한, 김남주의 시는 여전히 우리 앞에 칼날로 살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 시대에 김남주를 다시 호명하는 것은 단지 그를 '기념비화'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시와 혁명의 통일을 온몸으로 실천했던 한 인간의 순결한 고투를 통해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이 필요한 까닭이다.

"인간적인 의무가 있는 곳에 / 용기 있는 사람이 필요로 하는 곳 / 착취와 억압이 있는 곳"이라면 언제 어디서나 김남주의 '자유와 해방'의 노래가 어두운 밤하늘의 빛나는 별처럼 우리의 길을 비추어 줄 것이다.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 /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 (중략) 사람들은 맨날 / 겉으로는 자유여, 형제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 /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 제 자신을 속이고서. - '자유' 중에서
덧붙이는 글 공동주최 : 김남주기념사업회·한국작가회의·익천문화재단 길동무
후원 : 더숲문화재단

김경윤 / 1957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으며, 1989년 무크지 <민족현실과 문학운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아름다운 사람의 마을에서 살고 싶다>, <신발의 행자>, <바람의 사원>, <슬픔의 바닥>, <무덤가에 술패랭이만 붉었네> 등과 시해설서 <선생님과 함께 읽는 김남주> 등이 있으며, 현재 김남주기념사업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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