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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 보호 쉼터에 맡겨진 아이들, 반복되는 처참한 풍경

[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파편들의 집>

등록|2024.07.22 17:47 수정|2024.07.22 17:47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역작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제목을 살짝 확장하자면, 모든 사회적 약자는 전쟁의 가장 우선 피해대상이 된다. 아이들은 특히 그렇다. 국가 생존을 위해 사회의 모든 자원이 군비로 우선 투입되는 나라에서 이들을 위한 교육과 복지 재원이 온전히 집행될 리 없다.

그렇다면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해 사회의 관심이 긴요한 아이들의 처지는 안 봐도 뻔하다. 많은 이들은 감당이 안 될 것 같아 일부러 이런 단면을 보지 않으려 할 테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굳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비참한 단면을 끄집어내 보여주려 한다. 조금이라도 개선하기 위해선 그런 과정이 필수라 여기기 때문이다. <파편들의 집>은 그런 시도의 한 유형이 될 테다.

쉼터는 아이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말없이 응시한다
 

"파편들의 집"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 필름다빈


영화 속 배경은 동부 우크라이나다. 그것도 돈바스 전쟁이 한참 벌어지는 최전선에서 고작 20km 떨어진 곳에 자리한 아동 보호 쉼터다. 영화는 내내 이 공간을 조명한다. 다른 장소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찰나에 불과하다. 그런 설정만 놓고 봐도 이 영화를 선택하기 망설일 이들이 여럿 나올 법하다.

무수한 아이들이 이곳에서 최장 9개월 기간 동안 머문다. 이 아이들은 부모의 약물이나 알코올 중독 등 다양한 이유로 인해 결손가정에서 보호를 받기 힘든 존재다. 쉼터를 운영하는 이들은 아이들을 보살피면서 이들이 좀 더 지속적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공간으로 이전하는 게 임무다. 그들 중 대다수는 본인이 꿈꾸는 미래, 부모가 아이들을 보살피고 사랑으로 감싸는 '정상가정'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이들은 대개 좀 더 영구적인 국가 운영 보육원(고아원)으로 보내지거나 입양 혹은 위탁가정으로 가게 된다. 일가친척이 맡게 되면 운이 좋은 경우에 속한다. 원 부모에게 돌아갈 수 있는 아이는 찾기 힘들다.

몇 명의 아이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에바, 샤샤, 콜랴, 제냐, 알리나가 특히 눈에 밟힌다. '주인공'에 가까운 이들이 처한 상황은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주요 배경들은 별반 큰 차이가 없다. 어머니와 아버지 둘 다 온전한 경우는 찾기 힘들다. 한부모 가정이 대부분이고 대개 어머니만 존재가 확인된다(즉 아버지들은 사회적 책임을 유기하는 경우가 태반이라는 것). 어머니들은 알코올 중독과 자립 의지 결여를 겪고 있다. 아이들이 대수롭지 않게 주변 아이들에게 전하는 살풍경한 이야기 속에는 어른들의 상습적인 폭행과 학대 수준의 방치가 차고 넘친다. 저럴 거면 대체 왜 아이를 낳았나 싶을 지경의 일화가 가득하다.

집집마다 사정은 다르겠지만 관객 입장으로 보면 마치 붕어빵 찍어내듯 대동소이한 이유로 지역 사회복지사가 조치한 아이들은 부모의 친권 심사 기간을 쉼터에서 지낸다. 어떤 아이는 부모에게 돌아가길 애타게 꿈꾸지만 정작 그들의 부모는 책임감도 의지도 없다. 다른 아이는 변화할 생각이 없는 부모를 떠나 좀 더 안정된 새 환경을 꿈꾼다. 어린 동생들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아이, 조금 더 나이든 아이들을 따라 범죄에 물드는 아이도 있다. 이런 아이들의 상황이 차례로 (다소 나열식으로) 전개된다. 반복되는 패턴이지만 워낙에 압도적 비극성 때문에 정서적 호소력은 만만찮게 유지되는 호흡이다.

주요하게 소개되는 '주연급' 아이 중 누군가는 조금 더 안정된 보호받을 기회를 얻는다. 하지만 대다수는 그렇지 못한 결말을 맞게 된다. <파편들의 집>에는 동화 속 왕자와 공주의 해피엔딩 결말이 들어설 구석이 털끝만큼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나마 할머니가 데리러 오거나, 사람 좋아 보이는 위탁가정을 찾는 정도가 잘된 경우다. 영화 속 쉼터는 전쟁으로 열악해진 정부와 사회의 지원환경을 고려할 때, 가장 양호한 수준이라는 것을 쉽게 포착할 수 있다. 사회복지사들은 정성을 다해 마치 야생의 정글에 방치된 형국인 아이들이 엇나갈 때마다 바로잡으려 애쓴다. 경찰이 수시로 도망간 아이들을 붙잡아 데려오고, 아이들은 틈만 나면 일탈 기회만 노린다. 원래라면 부모의 훈육과 보호가 따르겠지만, 이 아이들에겐 그게 사치인 실정이다.

아이들이 직면한 크고 작은 두 개의 악순환 패턴
 

"파편들의 집"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 필름다빈


영화는 그저 측은지심이 있다면 누구나 가슴 아프게 지켜볼 수밖에 없는 전쟁 중인 나라의 보육원 쉼터의 풍경을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사회복지사의 시선과 음성해설을 통해 아이들이 처한 비극의 원인과 전망을 관객에게 몰입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제공하려는 노력이 영화 내내 집요하게 연속된다.

일단 아이들이 처한 시공간적 제약은 확고한 장벽으로 우뚝 솟아 있다. 영화 속 쉼터는 그나마 형편이 나은 곳이다. 직원들은 <올리버 트위스트>에 나올 법한 보호시설과 차원이 다르다. 비록 열악한 환경과 턱없이 부족한 예산으로 어렵게 운영되는 티가 팍 드러나지만, 그래도 정서적 안정과 가능한 선에서 물질적 여건을 충족하려 애쓰는 흔적이 역력하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공간과 보통 가정이라면 당연할 테지만 이들에겐 동경의 대상인 '일상성', 즉 생일이나 명절에 받는 작은 선물이나 이벤트 같은 것들을 여력이 되는 한 챙기려 애쓴다. 우리에겐 별 것 아닌 게 그들에게 얼마나 간절한 소망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은 그저 스치듯 잠시 머물 수 있는 최소한의 피난처에 불과하다. 직원도 아이들도 모두 이 움직일 수 없는 전제를 잘 안다. 여기에선 장래를 기약할 수 없다. 그저 긴급조치로 찰나의 보호를 수행하기에 때로는 모질게 정을 끊거나 아이들에게 그 사실을 주지시켜야 한다. 그들에게 능동적인 선택지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치 유기동물 보호소의 풍경을 떠올리게 만들곤 한다. 사실 본연적으로 봐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잔인한 표현이지만 딱 그랬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절박한 필요를 위해 필사적으로 '절친'을 구하고, '팸'을 형성한다. 한국의 가출청소년들이 하는 그것과 판박이다. 그들의 관점에선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지만, 그 결과를 아는 관객이라면 위태로움과 안타까움이 동시에 일어날 것이다.

그들에겐 마치 구원의 동아줄 같은 맹목적 기다림의 대상이 하나 있다. 복도에 설치된 공용 휴대전화 앞에서 아이들은 끊임없이 엄마가 자신들을 데리러 오길 기다린다. 그러나 메아리는 돌아오지 않는다. 여전히 엄마들은 술에 취해 있거나 감감무소식이다. 그렇게 아이들은 체념한 채 성인이 될 때까지 머물 보육원으로 옮기거나, 고작 하루나 이틀의 만남만으로 온전히 신뢰할 수 없는 위탁가정으로 향하게 된다. 9개월은 쏜살같이 흘러간다.

대체 부모란 작자들은 뭘 하나 개탄할 관객이 수두룩할 테다. 아이들의 부모는 제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한다. 아무리 전쟁통이라는 걸 고려한다 해도 무책임이 도를 넘었다. 이런 구조적 악순환의 대물림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사회복지사의 목소리는 씁쓸하게 그 원인을 시처럼 풀어낸다.

패턴은 대략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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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위기가정의 취약아동이 쉼터에 입소한다.
② 상황이 개선될 여지가 없다. 그 결과로 부모가 친권을 상실한다.
③ 소녀는 자라서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된다.
④ 힘든 삶에 지쳐 술에 빠진다.
⑤ 어릴 적 봤던 (본인 엄마의) 삶을 반복한다.
⑥ 자신이 낳은 아이를 보기 위해 과거에 머물던 쉼터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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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외부 조건과 사회적 환경에 따른 악순환 전형이 아닌가.

단순한 동정과 이웃집 불구경을 넘어 세상을 바꾸려면
 

"파편들의 집"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 필름다빈


영화에서 가장 끔찍한 장면은 아이들이 자신의 처지를 외면하거나 부정하지만, 실은 너무나 뻔히 잘 안다는 점이다. 자신들의 미래마저도.

취침시간, 이층침대로 빼곡한 침실에서 아이들은 수정구슬 놀이를 벌인다. 점을 봐준다며 아이가 아이에게 잔혹한 미래를 예언한다. 바로 앞서 풀이한 악순환 과정이다. 너는 술에 절어 살 테고 아이를 낳아 버릴 거라며, 그렇게 비참하게 살다 끝날 인생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냉소적인 아이들의 시선이 내비치는 장면이 또 있다. 정답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것 같지만 하필 그들이 보는 내용은 과연 저 아이들이 보는 세상의 색깔이 무엇일지 상상하기 싫게 만든다. 그들은 모두 함께 파멸을 맞는 '전갈과 개구리' 우화의 교훈이 '사람을 믿지 말라!'라며 공유한다. 대체 이 아이들은 무엇을 경험하며 살아온 걸까? 물론 보지 않아도 비디오다.

그렇게 성장할 아이들은 자연히 타인을 향해 마음의 문을 닫고, 또래 집단 사이에서 올라서기 위해 '센 척' 하며 일탈로 자연스럽게 향한다. 하지만 좀도둑질이나 흡연, 되바라진 말대꾸로 밉상이던 아이가 처한 조건, 어린 동생들을 지켜야 하는 절박함을 인지하게 된다면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지거나 함부로 싹수가 노랗다며 매도할 수 있을까? 이미 전쟁 이전부터 미래를 꿈꾸기 힘든 정치 혼란과 경제난, 사회 시스템의 붕괴를 앓던 나라에서 아이들은 그저 몸만 어른이 되어갈 따름이다. '한 명의 아이를 제대로 양육하기 위해 온 마을이 나서야' 하지만 영화 속 우크라이나 동부의 풍경은 그것과는 까마득히 동떨어져 있다. 결국 어른들의 책임이다. 물론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헌신적인 어른들이 존재하지만, 그것만으로 위안을 삼기엔 너무나 부족한 게 많다.

그렇게 계절이 흐른다. 영화는 관객이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9개월을 간접 체험하게 만든다. 한 명의 아이가 떠나면 또 한 명이 들어온다. 겨울이 되면, 전쟁이 악화될 수록 쉼터는 더 붐빈다. 그런 아이들을 위로하듯 '자장가'가 흘러나온다. 어디서 들어본 곡조다. 순간 쭈뼛 소름이 돋았다. 바로 구소련 시절 전설적인 애니메이터 유리 노르슈테인의 대표작이던 <이야기 속의 이야기 Ска́зка ска́зок, Skazka skazok, Tale of Tales (1979)>에서 기억에 남은 슬라브 자장가였기 때문이다.

<작은 잿빛 늑대가 온다>는 이 자장가는 구소련권에서 보편적인 구전동요다. 그런데 곡조가 애조 띤 것과는 별개로 가사 내용은 퍽 살벌하다. 어릴 적 할머니가 들려주던 '말 안 들으면 호랑이가 물어간다!' 내용의 슬라브 버전 격이기 때문이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환상적인 분위기로 포장하지만 2차 대전을 포함해 당시 소련 민중이 겪었던 험난한 현대사를 은유하며 위로하던 정서를 지녔던 것처럼, 잿빛 늑대가 아이를 물어간다는 살풍경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파편들의 집> 아이들이 처한 상황 역시 세기가 변했는데도 나아지기는커녕, 더 위험해진 셈이다. 그런 빈곤과 학대의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선 전쟁이 끝나고, 꿈을 꿀 수 있는 사회가 재건되어야만 한다. 영화 속 아이들의 슬픈 눈빛을 기억한다면 그저 멀리 떨어진 외국의 불쌍한 아이들이라 어쩔 수 없다는 공허한 소리를 쉽게 내뱉긴 앞으로 어려울 테다. 이 영화는 그저 전쟁에 휩싸인 먼 나라에서 그곳 아이들이 겪는 수난으로 소비될 게 아니라 잔인한 사회학적 교재로 깊숙이 각인될 가치가 있다.

<작품정보>

파편들의 집 A House Made of Splinters
2022 | 덴마크 | 다큐멘터리
2024.07.24. 개봉 | 87분 | 12세 관람가
감독 시몬 레렝 빌몽
출연 에바, 사샤, 알리나, 콜랴
수입/배급 필름다빈

2022 38회 선댄스영화제 월드시네마 다큐멘터리 감독상(미국)
2022 45회 예테보리국제영화제 북유럽다큐멘터리 드래곤상(스웨덴)
2023 95회 아카데미 시상식, 장편다큐멘터리상 후보(미국)

2023 24회 전주국제영화제, 월드시네마
2023 11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국제장편경쟁
2023 20회 서울국제사랑영화제, 아가페초이스
2024 12회 무주산골영화제
2024 18회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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