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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년 전 의대생들의 남다른 선택

[대전현충원에 묻힌 이야기] 나창헌과 김중화 애국지사

등록|2024.07.28 10:32 수정|2024.08.02 09:06
1898년 11월 5일부터 12월 23일까지 한성 종로 일대에서는 한국 역사상 가장 긴 철야 시위로 기록된 만민공동회가 무려 42일간 진행됐습니다. 1만여 명 시민은 외세의 국권 침탈을 규탄했고, 여러 개혁 과제를 주장했는데요. 주요한 요구사항으로 '의학교 설립'이 있었습니다.

지석영 선생이 우두법을 국내에 도입한 이후, 당시 조선은 근대화 과제 중 하나로써 근대 의학 도입이 매우 시급한 시점이었습니다. 조선 정부는 1880년대부터 의학교를 설치하고 근대식 의사를 양성하려고 했지만, 아관파천 등 정치 혼란으로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결국 만민공동회 집회 이후 조선 정부는 의학교 설립을 확정했고, 1899년 의학교 설립과 운영에 필요한 예산 6000원을 편성했습니다.

1899년 3월 24일 드디어 칙령 제7호 '의학교 관제'가 반포되며 이 땅에 처음으로 근대식 의학 교육 기관이 설립됐습니다. 지석영 선생이 처음부터 끝까지 교장을 맡았고요. 3년제 교육과정에 만 20세 이상 30세 이하 중학교 졸업자가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개교 후 8년 동안 총 36명이 졸업했습니다.

학생들이 '둥근 모자' 거부했던 이유

하지만 국권을 상실하는 과정에서 의학교는 부침을 겪는데요. 1907년 이토 히로부미는 한성에 있는 여러 병원을 통폐합하겠다는 명분으로 의학교를 폐지합니다. 의학교와 광제원, 대한적십자병원은 대한의원으로 통합됐습니다. 이는 당시 의료기관을 확장해서 의료 공급을 늘리라는 민중의 요구에 정면으로 반하는 결정이었습니다.

이토에게는 두 가지 계산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조선의 보건의료와 관련된 모든 기관을 하나로 집중시킨 뒤 한 번에 장악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또 하나는 조선에 일본인을 이주시키기 위해, 일본인을 위한 최신 의료기관을 짓고자 하는 목적이었습니다.

의학교는 통합된 대한의원 교육부로 격하됐다가 1908년 의육부로 개칭, 1909년에는 대한의원 부속의학교로 또 이름이 바뀝니다. 이후 대한의원 부속의학교는 조선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로 강등됐다가, 경성의학전문학교 설립 이후 의학강습소는 폐지됐습니다. 학생들은 경성의학전문학교로 편입됩니다.

해방 이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모체로 국립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 신설됐고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은 1946년 새롭게 창설됐지만, 의학교와 대한의원 교육부, 경성의학전문학교로부터 연원하고 있습니다.

의학교, 의학강습소, 경성의학전문학교 당시 재학생들은 민족의식이 대단히 높았습니다. 특히 부속의학교에서 부속의학강습소로 강등될 당시 학생들은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대한의원부속의학교 시절에는 고등교육 상징인 각모를 쓰고 있었는데요. 의학강습소에서는 둥근 환모를 써야 했고, 이는 의학도들의 자존심을 짓밟는 행위였습니다. 학생들은 환모를 다시 각모로 바꿔 달라며 일주일간 동맹휴학을 하기도 했고, 직접 사비를 들여 각모 400개를 제작해 조선인 학생들에게 나눠주고 강력한 항의행동을 이어갔습니다.

1918년부터는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재학 중인 일본인 학생과 조선인 학생 간 차별이 심화했습니다. 일본인에게는 해부학과 조직학 수업을 늘렸고, 조선인에게는 기초 일본어, 수학, 물리학 수업을 늘렸습니다. 또 일본인은 조선과 일본 등 모든 지역에서 진료할 자격이 있었지만, 조선인은 조선 땅에서만 진료할 자격을 줬습니다.

지속된 차별에 의학도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들은 3.1운동에서 조직과 준비에서 핵심 역할을 했고, 실제 시위를 주도합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경성에서 학생만 총 171명 구금되는데 그중 경성의학전문학교 소속 학생이 31명으로 다른 학교와 비교해 가장 많았습니다. 검거돼 판결까지 받은 학생 역시 34명으로 가장 많았고요. 학교로부터 정학 처분을 받은 사람이 1학년 20명, 2학년 19명, 3학년 6명에 달해, 1919년 말에는 조선인 재학생이 141명인데 퇴학생은 79명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매국노 이완용 암살에 도전한 애국지사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 기념하는 29명의 애국지사 ⓒ 김선재


현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은 총 29명 애국지사 선배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2019년 10월 18일에는 그중 5명에게 의과대학 명예졸업장을 헌정했습니다. 애국운동에 헌신하는 과정에서 투옥되거나 망명하면서 학업을 마치지 못한 분들이었는데요. 오복원, 김중화 선생은 이완용 암살 의거에 투신했고, 나창헌, 한위건, 이의경 선생은 3.1운동과 임시정부 운동에 공을 세웠습니다. 김중화 지사는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 141호에 나창헌 지사는 독립유공자 1묘역 29호에 안장돼 계십니다.

김중화 지사는 1888년 2월 27일 평안남도 중화군 간동면 중리(지금의 평양)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907년 진학을 위해 한성으로 온 선생은 원래 사범학교나 상업학교에 들어가고자 했지만 입시에 실패합니다. 이후 같은 해 4월 26일 치러진 대한의원 교육부 입학시험에 합격해 9월에 입학합니다. 선생은 1908년 1학년 우등생으로 선정될 만큼 성적이 우수한 의학도였습니다.

같은 학교 동기 오복원 지사와는 서로 하숙방을 오가는 절친한 사이였는데요. 오복원 지사는 1886년 평안남도 강동군 만달면 응암리(지금의 평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연배와 출신지가 비슷했습니다. 또 두 사람은 같은 천도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통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1909년 여름방학 때 오복원 지사는 고향인 평양에서 어떤 한 사람을 소개받는데요. 그가 바로 1909년 12월 22일 이완용 암살 의거를 거행한 이재명 지사였습니다.
  

▲ 이완용 처단 의거를 앞두고 찍은 기념 사진. 좌측부터 오복원, 이재명, 김중화, 이교담. 이교담 지사 역시 이재명 의거에 가담하였고 불기소 처분을 받았음. ⓒ 오복원 지사 후손 제공


이재명 지사는 악질 친일 매국노 이완용에게 분개하며 그를 처단하기 위한 동지를 규합하고 있었습니다. 김중화, 오복원 지사는 이재명 지사와 의기투합합니다. 오복원 지사는 자금조달 임무를 맡았는데, 천도교 물리 화학 강습소에서 받는 수당을 모아 거사에 보탰습니다. 그럼에도 자금이 부족해, 밭을 담보로 40원을 빌려 이재명 지사에게 건넵니다.

김중화 지사는 이완용의 이동 경로와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맡습니다. 12월 22일 새벽 김중화 지사는 밤새 시험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새벽에 배달 온 대한매일신보에서 눈이 번쩍 뜨이는 기사를 발견합니다.
  

▲ 김중화 지사가 읽은 신문 기사 ⓒ 대한매일신보


"벨기에 황제 추도식: 벨기에국 총영사가 발기하여 오늘 상오 11시에 종현 천주교당에서 벨기에국 황제 폐하의 추도식을 설행하는데 각부 대신이 왕참한다더라."

김중화 지사는 곧장 이재명 지사의 하숙집으로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완용은 피습을 두려워해서 줄곧 모습을 숨기고 다녔는데, 이날 집 밖으로 나온다면 둘도 없는 암살 기회였습니다.

이재명 지사는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그 즉시 집을 나와 거사에 착수했습니다. 오전 11시 30분께 인력거를 타고 성당을 빠져나오는 이완용에게 달려들었고, 그대로 가슴에 칼을 꽂아 넣었습니다. 칼은 폐를 관통했지만 의거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거사 직후 일본인 의사들이 급하게 달려왔고 이완용을 살려냈기 때문입니다.

이재명, 김중화, 오복원 지사는 모두 검거됐고 혹독한 심문을 받습니다. 일본 경찰은 이재명 지사에게 공범을 캐물었지만 그는 끝까지 동지를 보호하려 했습니다.

"이완용을 죽이는 것을 찬성한 자는 우리 2000만 동포 모두며, 방조자는 전혀 없었다."
"공평치 못한 법률로 내 목숨을 빼앗을 수는 있으나 나의 충혼, 의혼은 절대 빼앗지 못할 것이다. 한번 죽음은 슬프지 않다. 생전에 이루지 못한 일이 한심스러울 뿐이다. 내 결코 죽어서 그 원한을 갚을 것이다."


하지만 일제는 이재명 의사를 도운 13명을 함께 기소했고, 김중화 오복원 지사는 법정에서 변호를 거절하면서까지 당당하게 맞섰습니다. 일제 검사는 두 지사에게 징역 7년을 구형했고, 김중화 지사는 징역 7년, 오복원 지사는 징역 10년을 선고받습니다.

옥살이 이후 독립운동에 뛰어든 김중화 지사
 

▲ 이재명 의거에 동참한 이들의 명단 ⓒ 김선재


김중화 지사는 4년 2개월 동안 옥살이 후 가석방으로 풀려나는데요. 그 후 만주와 연해주로 무대를 옮겨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듭니다. 석방 후 그가 가장 먼저 찾은 이는 이재명 의사의 유가족이었습니다. 길림에 살던 이재명 지사의 아내 오인성 여사를 찾아가 눈물로 위로했습니다.

이후 지사는 1918년 통하현(通河縣, 지금의 헤이룽장성 하얼빈시)에 자리 잡고 송강의원을 개설합니다. 이곳은 사람을 치료하는 곳이기도 했지만 독립운동 기지 역할을 맡기도 했는데요. 독립운동에 투신하려는 여러 조선 청년이 이곳에 모여서 임무를 부여받아 떠나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는 통하현 농무계를 조직했는데요. 중국에서 이중으로 착취당하던 조선인 농민을 보호했고 의식을 고취시켰습니다. 양진학교도 설립하는데요. 김중화 지사가 교장을 맡아 유치반, 소학과, 고등과 학생 120명을 가르쳤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김중화 지사는 활발한 사회 참여를 이어갔습니다. 독립운동 역사를 정리한 애국동지원호회에서 주요 간부로 활동했고, 대종교 대표로서 이승만 정부에 맞선 야당의 연합을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1963년 삼일절에 대통령 표장을 받았고, 1972년 12월 12일 만 83세 나이로 타계했습니다. 사후 1990년 광복절 건국훈장 애족장 서훈에 이어 2009년 9월 17일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셨습니다.

"우리들의 독립은 총과 검과 혈이 아니면 성공할 수 없다"
 

▲ 나창헌 지사 ⓒ 공훈전사사료관


나창헌 지사는 1896년 평안북도 희천군 동면 갈현동에서 5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집안은 부유한 편이었는데요. 일신학교, 영변보통학교, 평양고등학교, 한성고등학교를 거쳤습니다. 1913년에는 교원을 속성으로 양성하기 위한 기관이었던 경성교원양성소를 수료하고, 모교인 일신학교로 내려가 1년 정도 교편을 잡았습니다. 이후 일본에서 2년간 유학 생활을 하는데요. 지사는 정신의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1917년에는 귀국해서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습니다.

1918년 12월 20일부터 1919년 2월 초까지 지사는 일본에 머물며 정신연구회에서 활동했는데요. 마침 이 무렵 일본에 유학중이던 조선인 유학생들은 독립의지를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유학생들은 1918년 12월 29일과 30일 독립문제를 두고 격렬한 토론을 펼친 뒤 실천에까지 나서기로 결의하는데요. 이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운동으로 이어집니다.

나창헌 지사는 유학생 모임에 참석해 2.8독립선언운동을 함께 추진했는데요. 2월 초 귀국 후에도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들에게 일본 유학생들의 움직임을 전하며, 3.1운동 학생 대표로 성장해 나갔습니다. 의기투합한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들은 치밀하게 3.1운동을 준비했습니다. 학생들을 동원할 방법을 토론했고, 독립선언서 배포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기성 종교계 세력과 연계해서 대규모 시위를 준비했습니다. 1919년 3월 1일 "대한독립만세" 외침이 터져 나왔고, 나창헌 지사는 2차 시위를 준비하던 중 3월 2일 일제 경찰에 체포됩니다.

지사는 체포돼 있던 중 병보석을 신청해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는데요. 7월경 세브란스 병원 창문을 넘어 탈출에 성공합니다. 이후 독립운동 지하조직인 '대동단'과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입합니다.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서 그는 특파원 자격으로 독립운동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특수 임무를 수행했고요. 1919년 8월 29일 만세 시위 때는 인쇄물 배포 책임을 맡아 각 독립운동단체와 학교에 비밀리에 문서를 전달했습니다.

대동단에서도 지사는 비밀 임무를 맡아 수행하는데요. 의친왕 망명 작전에 투입됩니다. 국내에서 의친왕을 몰래 빼내 임시정부로 탈출하는 작전이었는데요. 나창헌 지사가 함께 동행해 의친왕과 단동역까지 오는 데 성공했으나, 탈출을 눈치챈 일제의 방해로 작전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이후 나창헌 지사는 체포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합니다.

1920년 1월 나창헌 지사는 중국 상해에 도착합니다. 기대를 안고 임시정부를 찾았지만 지사는 곧 깊은 실망에 빠지는데요. 임시정부는 사분오열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지사는 임시정부에 당장 합류하기 보다는 독자 노선을 걷기로 정하고 '철혈단'을 조직합니다. 비폭력성에 깊은 한계를 체감한 지사는 의열 투쟁으로 나라를 되찾겠다며 다짐하는데요. 나창헌 지사는 이후 암살과 파괴를 통한 무력 투쟁을 전개합니다.

"우리들의 독립은 총과 검과 혈이 아니면 성공할 수 없다. 고로 우리들은 금후 한 사람이 될 때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철과 혈로써 저 간악하고도 악독한 왜구를 배제할 것이다."

임시정부가 분열된 가장 큰 원인은 바로 대통령 이승만에게 있었는데요. 외교론에 편향되어 임시정부 운영에 소홀한 책임이 컸습니다. 동포에게 성금을 거둬들인 다음 그 통제권을 두고도 마찰이 컸습니다.

나창헌 지사는 1925년 임시의정원에 참여했고, 동료 의원들과 함께 대통령 탄핵안을 제출했습니다. 또 지사는 곽헌, 채원개, 김현구, 최석순 등 5명으로 구성된 탄핵심판위원이었으며 이승만탄핵심판위원장으로 선임됩니다. 임시의정원은 심판위원회 결정에 따라 3월 23일 이승만 탄핵을 선포합니다.
  

▲ 나창헌이 주도한 상해 일본총영사관 폭파 의거 신문보도 ⓒ 동아일보


1925년 6월에는 김구 선생 후임으로 임시정부 경무국장을 맡습니다. 1926년 1월에는 임시정부를 지키고 밀정처단, 일제 관공서와 기관을 파괴하기 위한 병인의용대를 조직하는데요. 조선총독부 밀정 박제건 처단을 시작으로, 밀정과 일제 관리들을 처단해 나갑니다. 1926년 4월 8일 나창헌은 직접 폭탄 제조에 가담하고 작전을 지휘하여, 상해 일본총영사관 건물에 폭탄 2개를 투척합니다.

지사는 상해에서 의사로서도 명성을 떨쳤는데요. 1922년부터 세웅의원을 운영하며 중국인에게는 제값을 받고, 조선인은 무료로 치료하며 독립운동가와 동포의 건강을 챙겼습니다. 그렇게 온몸을 던져 독립에 투신한 그였지만, 투쟁 과정에서 위암이 발병했고 1936년 6월 40세 나이로 중국 사천성 만현에서 서거했습니다.

120년 전 이 땅의 의학도들은 사람의 병을 치료했을 뿐 아니라, 사람을 고통에 빠트리는 요인을 찾아내 해결하려 했습니다. 안정된 미래와 안락한 삶을 뒤로하고 스스로 독립운동 가시밭길을 선택해, 민족의 아픔을 치유하는데 생을 바친 의사들이 있었습니다.
  

▲ 애국지사 김중화의 묘 (독립유공자 4묘역 141호) ⓒ 임재근

   

▲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의원 내무부차장 나창헌의 묘 (독립유공자 1묘역 29호) ⓒ 임재근


[참고자료]
장석흥. (2002). 나창헌의 생애와 독립운동. 한국학논총, 24, 117-142.
이규원. (2024). 독립운동가 김중화의 생애와 활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86, 45-77.
이규원. (2020). 이재명 의거 가담 의학도의 생애와 활동 ― 오복원과 김중화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관립 의학교 학생들의 항일독립운동』. 2019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인문의학교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애국지사 선배들의 삶과 공적』. 2019
공훈전사사료관 (https://e-gonghun.mpv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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