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 직접 보니 실감나네
'아드리아해의 진주'라 불린 두브로브니크
6월 26일부터 7월 4일까지 발칸반도를 여행한 후 씁니다. [기자말]
▲ 스르지 산에서 바라본 두브로브니크 모습. 이탈리아 베네치아 공국과 경쟁한 유일한 해상무역 도시국가였다 ⓒ 오문수
많은 여행사에서 흔히 쓰는 표현 하나에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이라는 말이 있다. 꼭 가봐야 할 만큼 아름답다는 말을 에둘러 표현한 말이다.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그 말에 속아(?) 5대양 6대주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가서는 "정말 잘왔다!", "정말이네!"라는 생각이 대부분이었지만 가끔 실망한 적도 있었다.
내가 여행을 떠나기 전에 반드시 하는 습관 하나가 있다. 여행 목적지를 사전에 검색하고 공부한다. 알고 가면 그만큼 보이기 때문이다. 발칸반도 여행목적지에는 두브로브니크가 들어있었고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이라는 표현이 들어있었다. 여행 첫날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 시가지에서 한 시간 정도 자유시간이 주어져 아내와 함께 길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 여고생 3명과 대화를 나눴다.
▲ 항구와 성벽 밖에 정박해 있는 배들 모습 ⓒ 오문수
▲ 두브로브니크 성밖에 정박한 배들 ⓒ 오문수
긴가민가하며 도착해서 돌아본 두브로브니크는 명불허전이었다. 영국 극작가 '버나드 쇼'는 "두브로브니크를 보지 않고 천국을 논하지 말라"라는 말을 남겼고 유럽인과 일본인이 가장 가고 싶은 여행지 1순위에 선정된 곳이다. 19세기 영국의 시인 바이런은 두브로브니크를 '아드리아해의 진주'라 불렀고 두 번 결혼한 추리작가 애거사 크리스티는 이곳을 두 번째 신혼여행지로 삼았다.
두브로브니크는 7세기에 도시가 형성되고 베네치아 공국과 경쟁한 유일한 해상무역 도시국가였다. 지리적 이점 때문에 발칸과 이탈리아를 잇는 중계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고 11~13세기에는 금·은 수출항으로 황금기를 맞이했다.
요새 도시의 첫 관문 '필레문'
두브로브니크 성벽 안 구시가지는 끝에서 끝까지 걷는데 10분도 안 걸릴 정도로 작다. 안내지도가 없어도 걷다 보면 모든 볼거리들이 다 보인다. 구시가 관광의 기점은 '필레문'이다. 필레문은 견고한 요새 도시인 두브로브니크로 들어갈 수 있는 3개의 문 가운데 하나이다.
▲ 두브로브니크 성벽길을 걷고 있는 관광객들이 보인다 ⓒ 오문수
16세기에 지은 이중문으로 다리를 들어 올려 외부의 침입을 차단할 수 있는 필레문을 통과하면 구시가의 플라차 대로로 들어서는 두 번째 문이 나온다. 필레문 반대쪽에는 구조가 비슷한 '플로체문'이 있고 북쪽 언덕에는 '부자문'이 있다. 성벽으로 통하는 문은 '총령'이 엄격하게 관리했다고 한다.
'오노프리오스' 분수
필레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성 시비오르 성당'이 있고 성당 앞에는 둥근 돔 모양의 지붕 아래 16개의 수도꼭지가 달린 '오노프리오스' 분수가 관광객을 맞이한다. 척박한 땅에 자리한 두브로브니크는 늘 식량과 물 부족으로 시달렸다.
▲ 둥근 돔 형태의 오노프리오스 분수 주위에 관광객들이 모여있다. ⓒ 오문수
오노프리오스 분수는 1438년 20㎞ 떨어진 '스르지' 산에서 물을 끌어들여 만든 수도시설이다. 수도꼭지에는 각기 다른 사람의 얼굴 모양과 여러 동물 형상이 조각되어 있다. 건축 당시에는 화려한 조각이 있었으나 지진과 오랜 세월로 훼손된 상태다.
두브로브니크 관광의 진미는 수많은 외세의 침략을 막고 자유와 독립을 수호하기 위해 지은 성벽을 둘러보는 것이다. 10세기에 축성한 성벽은 13~14세기에 보완했고 15세기 오스만투르크의 위협이 있자 방어를 위해 더욱 견고하게 증축했다.
▲ 성벽위를 걷고 있는 관광객들 모습 ⓒ 오문수
▲ 성벽위에서 바라본 두브로브니크 시가지 모습 ⓒ 오문수
구시가를 에워싸고 있는 성벽의 총길이는 약 2㎞이며 최고 높이는 25m, 내륙 쪽 높이는 6m, 두께는 1.5m~3m나 된다. 두브로브니크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성벽에 올라 구시가와 아드리아해의 풍경을 감상하면 왜 이곳을 천국이라고 했는지 실감할 수 있다.
두브로브니크가 지상천국으로 불린 이유
구항구 입구에 있는 '스베티 이반' 요새 입구에는 '세상의 돈을 모두 준다 해도 자유를 팔 수 없다'라는 문구가 있다. 두브로브니크는 유럽 어느 나라에나 있는 왕이 없었다. 주민은 귀족 시민 기술자 세 신분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귀족이 국가를 통치했다.
두브로브니크 사람들은 막강한 경제력만이 그들을 지킬 수 있다고 믿어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그들은 대·소 평의회, 의회(원로원)를 구성해 대내외적인 정치를 펼쳤다. 14세기부터는 '총령'을 선출했는데 독재를 막기 위해 재임 기간을 1개월로 제한했고 보수도 없는 명예직이었다.
▲ 아드리아해에 면한 두브로브니크 성벽 모습 ⓒ 오문수
▲ 성벽은 수많은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두브로브니크를 지켜낸 보호막이었다. ⓒ 오문수
뿐만아니라 재임 기간 중에는 궁 밖 출입도 제한해 오직 국가의 독립과 자치를 수호하는 데 힘썼다. 렉터 궁전에 있는 총령 집무실에는 '사적인 일은 잊고 오직 공사에 철저 하자'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또한 국가는 시민들을 위한 사회복지에도 힘써 14세기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복지국가를 이뤘다.
두브로브니크는 아드리아해의 중심 도시로서 16~17세기에는 베네치아와 어깨를 견주었다. 두브로브니크는 오랜 세월 동안 해적의 침략, 전쟁, 두 번에 걸친 대지진 그리고 독립전쟁 등으로 피해를 당했다.
1991년 10월 크로아티아가 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자 세르비아군이 3개월에 걸쳐 두브로브니크를 공격했고 도시 여러 곳이 파괴되었다. 이때 프랑스 학술원회장 '장 도르메송'은 이렇게 호소했다.
▲ 1991년 독립전쟁 당시 부서진 시가지 모습을 비춰주는 그림이다. ⓒ 오문수
"유럽 선진국들이 유럽 문명과 예술의 상징적 도시인 두브로브니크에 대한 포격 하나 중지시키지 못한대서야 말이 되는가!"
그 후 세계 여러 곳에서 온 사람들이 인간사슬을 만들어 도시의 많은 부분을 지켰다. 1999년부터 복원작업이 시작되어 손상된 건물들이 거의 복원되어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덧붙이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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