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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맞아도 마냥 즐거웠던, 그 시절 낭만에 대하여

비와 함께 했던 나의 무용담... 요즘 아이들에게도 그런 추억 하나쯤 있었으면

등록|2024.07.24 09:23 수정|2024.07.24 09:23
도서관 치유 글쓰기 프로그램에서 만나 시민기자가 된 그룹입니다. 20대(Z), 30대(M), 40대(X)까지 총 6명의 여성들로 이뤄진 그룹 'XMZ 여자들'은 세대간의 어긋남과 연결 그리고 공감을 목표로 사소하지만 멈칫하게 만드는 순간을 글로 씁니다.[편집자말]
기와가 깨질 듯이 타다닥타다닥 요란하게 비가 내린다. 우수관으로 빗물들이 몰아치며 정신사나운 소리를 내는데도 마루에 누워 처마끝 빗물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스르 눈이 감긴다.

어린 시절 한옥집에 살았던 나는 마루에 가만히 누워 기와지붕 사이의 네모난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를 보는 나른한 하루를 좋아했다. 비가 하루종일 내리는 날에는 우산을 모두 모아 마당 한가운데 펼쳐놓고 우산들 사이사이에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소꿉놀이를 했다. 사방에 빗소리로 둘러싸인 우산 속은 정말 아늑했던 기억이 난다.
 

▲ 고등학교 설악산 건행 사진 ⓒ 김기은


고등학생 때 한국청소년연맹 활동을 했었는데 매년 여름이면 2박 3일 캠프를 간다. 빗소리를 들으며 텐트 안에서 옹기종기 앉아 수다삼매경으로 시간가는 줄 모르게 놀고 있는데 갑자기 거세지는 장대비에 텐트 주위로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텐트를 살려보겠다고 비가 몰아치는 야밤에 텐트 주변에 땅을 파며 물고를 만들기 시작했다. 얼마나 열심히 땅을 팠던지 입고 있던 우비 겨드랑이가 찢어지고 빗물로 이미 몸은 다 젖었는데도 마냥 신났던 기억이 정겹다. 너무 깊게 땅을 판 덕분에 우리 텐트는 물에 잠기지 않았던 뿌듯함이 아직도 생생하다.

대학생이 되고 풍물동아리에 들어가 여름 전수에 참여한 적이 있다. 깊은 산골 폐가를 빌려 생활을 했는데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 구멍이 난 것처럼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비가 두어시간 내렸다. 빗탈길 도로에 강물처럼 엄청난 빗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고 너무 외진 곳이라 차는 다니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무슨 생각이었을까? 동기와 함께 밖으로 뛰쳐나가 비가 쏟아지는 도로 한복판에 미친 듯이 춤추고 슬라이딩을 하고 빗 속을 소리 지르며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비가 그칠 때쯤 내 안에 묵어있던 불만, 미움, 시기, 걱정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비 속에 씻겨져 정말 오랜만에 상쾌하고 개운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제주도 배낭여행제주도 배낭여행 ⓒ 김기은


대학교 1학년 때 제주도 배낭여행을 선배들, 동기들과 갔었다. 서울에서 통일호를 타고 목표에 새벽에 도착해 몇 시간의 노숙을 한 후 첫 배를 타 제주도에 도착하자 했을 때 탐험가가 된 듯했다. 그때 제주도에서는 한번 비가 내리면 내 무릎까지 차올라 물길을 헤치며 이동해야 했다. 또 비가 계속 와서 텐트를 치지 못해 오랫동안 방치된 폐건물에 들어가 주변 청소를 하고 숙박을 해결하려고 했다.

침낭을 펴고 자려고 할 때 우르릉 쾅쾅 하는 소리가 들리고 건물이 흔들거려 밖으로 뛰쳐나왔더니 건물 한쪽 벽이 완전히 무너져 내려 벽돌들이 사방이 흩어졌다. 벽돌이 무너져 내려 깨끗하게 드러나 시멘트벽을 보면서 다시 건물에 들어가 자야할지 그냥 안전하게 노숙을 해야할지 한참 동안 갈등을 했던 적이 있었다. 쉽게 경험할 수 없는 나만의 무용담이었다(운이 좋았다, 절대 따라하면 안 된다).

어린 시절 비는 일상생활에 일탈과 모험의 세계로 초대하는 기분좋은 추억이고 낭만이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직장을 다니면서 부터는 전혀 달라졌다. 황사비 맞으면 머리 빠진다고 검은비를 피해 다녀야 했고, 비가 올 때의 상쾌함은 사라지고 기분나쁜 후덥지근함이 나의 짜증을 빠르게 업그레이드해주곤 한다.

최근에는 마른 하늘에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는 스콜 현상까지 발생해서 비는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 되어버렸다. 그래서인지 냥 비를 맞아도 좋았던 어린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다.

나는 몸으로 체험하고 느끼며 자연을 누리고 살았었는데 이런 경험을 지금의 아이들은 부모가 시간을 내어 돈을 지불해야만 경험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어 버린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옛날 사진을 둘러보면서 그때 비를 맞아도 마냥 즐거웠던 시간들을 회상해본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이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는 환경에서 살 수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다.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나만의 멋진 모험을 하나씩 경험하면서 차곡차곡 저축을 해두었다가 어른이 되어 하나씩 꺼내어 볼 수 있는 낭만을 가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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