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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희 여사가 '한국판 측천무후'? 놀라웠던 그의 삶

[김종성의 히,스토리] 측천무후의 삶, 김 여사에 비할 바 아니다

등록|2024.07.25 11:53 수정|2024.07.25 11:53

▲ 윤석열 대통령과 함께 하와이를 방문한 김건희 여사가 지난 8일 미국 하와이 히캄 공군기지에 도착해 공군 1호기에서 내린 뒤 하와이 주지사 부부 등 영접 인사를 만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 연합뉴스


김건희 여사를 측천무후(무측천)에 비유하는 발언들이 나오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22일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는 서울중앙지검이 피의자인 그를 청와대 인근인 경호처 부속청사에서 조사한 일을 두고 "김 여사가 한국판 측천무후냐"라며 "중전마마 조사를 넘어선 여제 조사"라고 비판했다.

비판의 초점은 다르지만, 지난 10일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김 여사와 한동훈 당시 국민의힘 대표 후보의 문자 논쟁과 관련해 "김·한 문자전쟁은 서부활극 OK목장의 결투를 연상케 합니다"라며 "당나라 측천무후, 이조 사극에 나오는 장희빈도 연상됩니다"라고 페이스북에 썼다.

김건희 여사가 측천무후에 비견될 만한 권세나 위세를 누리고 있다는 의미로 이런 발언들이 나오고 있지만, 하필이면 측천무후에 비유하는 것은 측천무후뿐 아니라 중국사와 세계사를 올바로 이해하는 데도 저해가 된다.

그는 황후가 아니라 황제였다

'측천무후'라는 표현부터가 선입견을 생산한다. 의미를 쉽게 전달하고자 이 호칭을 쓸 수도 있지만, 당나라 황후였다가 주나라 황제가 된 이 인물의 실체와 업적을 정확히 알려주는 칭호는 아니다.

실명이 무조(武曌)인 그는 690년에 시댁인 당나라 황실을 전복하고 주나라를 세운 뒤 성신황제(聖神皇帝)로 불렸다. 측천이란 칭호가 부여된 것은 15년 뒤였다. 주나라에서 반역이 일어나 그의 아들(중종)이 황제로 옹립되고 그 자신은 폐주가 된 뒤의 일이다.

당나라 역사서인 <구당서> 측천황후본기는 서기 705년 2월 25일(음력 1.27)의 일을 "무신일에 황제가 존호를 올려 측천대성황제(則天大聖皇帝)라고 일컬었다"라는 말로 기술한다. 황제가 된 무조의 아들이 폐주가 된 어머니에게 측천황제라는 칭호를 부여했던 것이다.
 

▲ 측천무후 ⓒ 위키미디어 공용


측천은 문자 그대로 하면 '하늘을 모델로 한다'는 좋은 의미이지만, 무조에게 부여된 이 칭호는 그를 하늘에서 추락시키는 정치적 뉘앙스를 띠었다. 한술 더 떠서 후대에는 측천황제가 아닌 측천무후라는 표현이 확산됐다. 황제에서 황후로 더욱 격하시킨 것이다.

황제였던 사람을 황후로 부르면 그 일생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측천무후라는 표현은 그런 면에서도 부적절하다. 중국에서 사용빈도가 높은 '무측천'이라는 표현이 그나마 낫다고 할 수 있다. 반대세력이 붙여준 측천이란 글자가 들어가기는 하지만, 황후로 격하시키는 뉘앙스가 나타나지 않아 상대적으로 무난하다.

무측천이 국가를 경영한 시간은 15개월이 아닌 15년이다. 짧다면 짧지만 길다면 긴 15년 동안 유지된 그의 왕조는 그 후의 중국 왕조들에 의해 부인됐다. 이후의 중국 왕조들은 <사기>, <한서>, <구당서> 같은 중국 정사(正史) 목록에 주나라의 역사를 넣지 않았다. 당나라 역사의 일부로 편입시켰을 뿐이다.

한국에서 후삼국과 탐라가 활동했던 서기 10세기에 중국에서는 5대 10국 시대가 전개됐다. 이 시기에 등장한 후한(後漢)은 947년에 세워져 3년 뒤에 멸망했다. 이런 나라도 정식 왕조로 인정하면서 15년간 동아시아를 주도한 주나라를 정식 왕조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의 나라가 그의 아들에 의해 계승되고 그 아들이 당나라의 정통성을 계승했다는 이유로 주나라 역사는 당나라 역사의 일부로 편입됐다. 엄연히 존재했던 국가를 이런 식의 역사해석으로 지워버렸다. 무측천이 여성이 아니었다면 이런 일이 쉽게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무측천의 생애는 부정적으로 평가될 만한 요소들을 적지 않게 담고 있다. 그는 처음에는 당태종의 후궁으로 입궁해 태종 사후에 사찰로 출가했다. 이후엔 그 아들인 고종의 후궁으로 재입궁했다. 그런 뒤 고종의 왕후를 내쫓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아버지의 첩이 됐다가 그 아들의 첩이 되고 부인이 됐던 것이다. 그 시대는 물론이고 지금 시대의 윤리관념으로도 쉽게 수용되기 힘든 인물이다.

거기다가 그는 남의 나라가 아닌 자기 시댁의 명맥을 끊고 무씨 왕조를 개창했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 그의 의리 관념이 희박했다는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좋은 사람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그는 고구려 멸망에도 관련됐다. 백제 멸망 5년 전인 655년에 황후가 된 그는 고구려 멸망(668) 이전에 당나라 실권자가 됐다. 또 대조영이 발해 건국을 위해 투쟁할 때는 당나라 황후에서 주나라 황제로 바뀌었다. 대조영이 그와의 대결을 통해 발해 건국을 이뤄냈으므로, 한국사 관점에서는 측천무후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기가 쉽지 않다.

무측천의 개혁

그러나 세계사의 시각에서 보면, 또 이제까지 무시돼온 세계 민중의 시각에서 보면 그가 역사발전에 기여한 측면이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무씨 왕조에서는 기득권층인 귀족세력이 시달림을 많이 당했다. 그는 기존의 당나라 황족과 연계된 귀족들을 숙청하는 한편 과거제도를 개편해 신진세력을 대거 등용했다. 인적 청산을 과감히 수행했던 것이다.

군주가 귀족들과 한편이 되지 않고 그들을 견제하는 것은 민중의 입장에서는 다행이었다. 황제가 귀족과 대결하고 이 대결에서 우위를 차지하면 민중의 삶이 대체로 나아졌다. 일반 민중은 귀족의 노예나 노비가 되어 귀족의 땅을 소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므로, 군주가 귀족의 전횡을 견제해 주는 것은 민중에게 도움이 됐다.

무측천의 15년 치세에서는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같은 진보적 양상이 나타났다. 물론 그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 귀족을 억누른 것이기는 하지만 그만한 용기를 내어 귀족과 맞서고 민중에게 이익을 준 군주는 역사에 흔치 않다. 그런 의미에서 무측천은 세계사에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무측천은 신나라의 왕망이나 송나라의 왕안석처럼 역사 발전에 기여하고도 기득권층에 의해 폄하된 사례다. 그렇지만, 세계사의 진보를 위해 미래세대가 참고할 만한 인물이다. 한국인의 시각에서는,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발해 건국을 훼방한 인물'이라는 관점과 '세상의 불평등을 줄이는 데 기여한 인물'이라는 관점이 함께 투영돼야 할 인물이다.

무측천을 측천무후로 부르며 그를 김건희 여사에 비유하는 말들이 나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과도한 권세를 누린 '중전마마'의 사례는 한국 현대사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고, 가까운 필리핀 등에서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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