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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어려운 당신에게, 이 영화를 추천합니다

[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엄마의 왕국>

등록|2024.07.25 17:05 수정|2024.07.25 17:05
'가족'은 인간이 단독자로 고립되길 원하지 않는다면 가장 기본적인 집단의 형태로 맞게 되는 공동체다. 물론 인류는 꾸준히 공동체의 규모와 조직을 확장해 왔지만, 그런 시스템이 재편되거나 붕괴 위기를 맞을 때마다 가족이란 원초적 공동체는 그 존재감을 잃기는커녕, 최후의 보루로 기능해 왔다. 그만큼 재난과 위기에서 빛을 발하는, 혈연에 기반한 이 가족 공동체의 존재감은 부동의 것이다.

하지만 요즘 미디어 사회면을 보면 이런 가족 공동체의 고유한 특성 역시 세태에 따라 급속하게 붕괴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공공연히 자행되는 폭력과 학대가 외부의 개입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친족이 남만 못하다는 하소연이 공감대를 광범위하게 얻고, 인륜을 벗어난 상상하기 힘든 흉악하고 기괴한 범죄가 드러날 때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서 오랜 세월 인류가 형성해온 이 혈연 공동체 역시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오래된 유산은 그만큼 쉽게 건드리기 힘들다. 사회 구성원 각각의 경험과 입장에 따라 그런 공백에서 초래된 비극에 대한 평가도 다를 수밖에 없다. 문제는 결국 보편적 인권이 가족 내에서 존중받고 고유의 보호와 돌봄 의무가 준수되느냐, 객관적 기준이 작동하느냐일 테다.

영화 <엄마의 왕국>은 여전히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충돌하며 표류하는 '가족 공동체'의 위기를 극화해 관객에게 주사위를 던지려는 시도다.

블랙홀 같은 과거 사건... 휘말려드는 세 사람
 

▲ 영화 <엄마의 왕국> 스틸 이미지 ⓒ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자기계발서 <진실의 힘>을 출간한 작가 '지욱'은 자신의 책 내용을 중심으로 강연 활동을 수행하며 살아간다. 그는 오래된 주택가에 자리한 미용실 '왕국'을 운영하는 어머니 '경희'와 함께 살아간다. 자립할 능력이 없어 보이진 않지만, 이 모자의 사이는 돈독해 보인다.

'경희'는 단아한 외모에 원만한 대인관계를 가졌지만 '지욱'을 돌보는 외에 재혼하진 않았다. 지욱에겐 아버지, 경희에겐 남편이라 할 존재는 부재하다. 듣자 하니 오래전에 실종된 채 행방이 묘연하지만 특별히 부재의 공백은 느껴지지 않는다.

역시 도시의 변두리, 어느 작은 교회에서 목사 '중명'이 한창 예배를 진행하는 중이다. 특이하게도 그는 인형을 갖고 복화술로 설교한다. 오랜 목회 경력을 증명하듯 그의 복화술 설교는 신도들에게 인기가 좋다.

그런데 갑자기 '중명'은 설교를 중단하고 바닥에 쓰러진다. 그는 오랫동안 투병 중이고, 갈수록 건강이 악화해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던 참이다. 몸을 추스른 후 중명은 오랫동안 가슴 한 구석에 품었던 의문을 풀기 위해 길을 나선다.

아들과 함께 모자만의 숨은 '왕국' 같은 보금자리에서 크게 모자랄 것 없이 살아가던, 행복한 삶이라 해도 좋을 일상을 보내던 경희에게 언젠가부터 심상치 않은 일들이 발생한다. 지욱은 늘 꼼꼼하고 여유롭던 어머니가 계속 실수를 저지르고 불안정한 면모를 보이자 당혹스럽다.

경희는 지욱에게 오랫동안 가족 간의 금기로 묻어뒀던 그가 어릴 적 가정사의 감춰진 비밀을 무심코 말하지만, 그런 상황을 곧 기억하지 못한다. 지욱이 채근해 함께 간 병원에서 경희가 치매를 앓기 시작했음이 확인된다. 평화롭던 모자의 일상은 격랑에 휩싸인다.

경희는 자주 기억을 잃고 혼자 생활하기 힘들어진다. 지욱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어머니를 돌보며 챙긴다. 긍정적으로 사고하면 이 정도는 가족이 일정 연배가 되면 종종 겪게 되는 '보통의 시련'에 불과한 편이다.

하지만 가족 간에 준수해오던, '엄마의 규칙'을 경희는 치매 때문에 혼란스러운지 종종 깨고 과거사를 일깨우기 시작한다. 지욱 역시 그동안 잊고 있던, 잊으려 했던 모호한 과거에 대해 신경이 쓰인다. 그런 가운데 중명이 경희를 찾아온다.

이들은 과거에 '가족'으로 묶여 있던 사이고, 그들 사이엔 풀지 못한 비밀이 존재한다. 중명은 삶이 얼마 남지 않자 죽기 전에 그 비밀을 파헤쳐 진실을 알고 싶다. 경희는 오락가락 기억을 잃었다 또렷하게 떠올렸다 하기를 반복한다. 중명은 경희를 몰아붙이며 그날의 진실을 알려달라 강권한다. 지욱은 원치 않게 진실게임에 휘말리고 만다. 과연 그들의 과거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묻힌 걸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진실', 기어코 벽을 뚫고 나오다
 

▲ 영화 <엄마의 왕국> 스틸 이미지 ⓒ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엄마의 왕국>은 '가족 공동체'가 현대 사회에서 처한 위태로운 상황을 극단적인 극화 사례로 끌어내고자 하는 도전이다. 경희와 지욱, 모자로 구성된 최소 규모의 '가족'은 서로 돌보고 의지하며 그들만의 '왕국'을 건설하고 유지해 왔다. 이들에겐 다른 구성원은 필요치 않아 보인다. 그들은 많은 것을 공유한다. 물론 외부에는 드러낼 수 없는 '비밀'까지 포함해서다. 그런 공감대 덕분에 이들 모자의 유대관계는 평범한 가족의 그것보다 더 끈끈하게 엉겨 있다. 한쪽이 끊어내려 해도 그럴 수 없는 가시덤불 같은 엉킴의 관계다.

경희는 오랫동안 어떤 '거짓말'을 확고부동한 의지 아래 지욱에게 주입해 왔다. 유년기의 아들이 그 거짓말이 사실인 것처럼 믿게 될 만큼 경희는 확신범의 그것으로 이 쉽지 않은 과정을 수행해 왔다. 그 결실은 이들 모자만의 아늑하고 안전한 '왕국' 건설로 보상받았다. 홀로 자식을 남부럽지 않게 양육했고, 반지하 방에서 어엿한 자가 마련에 성공한 것이다.

경제적으로 어디 손을 벌릴 일 없고, 아들은 제법 자랑할 만큼 잘 자랐다. 이제 여유 있게 은퇴와 노후 생활을 즐길 일만 남았지만, 오랜 시간 퇴적된 피로와 남에게 알릴 수 없는 고민 덕분에 청천벽력처럼 치매가 시작된다. 그리고 그동안 잘 통제해 왔던 '진실'이 벽을 뚫고 틈새를 비집어 돌아오고 만다.

지욱은 유년기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행방이 묘연한 아버지가 좀 흠결은 있어도 아들인 자신을 아꼈고, 홀로된 어머니는 자신을 헌신적으로 돌봐왔다는 전제를 갖고 구김 없이 성장했다. 그러나 치매에 걸린 어머니가 보이는 돌발행동, 오랜 세월 교류를 끊고 살던 작은아버지의 음침한 접근 탓에 지금껏 간직하던 기억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는 전혀 원하지 않았지만, 자신과 어머니의 마치 짙은 안개 같은 과거사로 회귀하고 말 운명이다.

중명은 인생의 끝판에 서 있다. 그동안은 미래를 위해 애써 과거를 묻고 살아왔지만, 이제 생의 종막이란 선고를 받아들이자 그동안 참아왔던 금기에서도 강제로 해방되고 만 셈이다. 그는 목회자이지만, 정작 자신의 내세에 대해선 지독히 비관적이다. 과거의 어떤 '비밀'이 그를 구원이 불가능한 상태로 몰아붙이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 미치도록 궁금했지만, 굳이 밝히고 싶지 않았던 어떤 '진실'에 대면하고자 한다. 이는 자신의 한풀이는 될지 몰라도, 경희가 평생 쌓아 올린 '왕국'을 허물어뜨릴 파괴력을 가진 일이다. 이들은 그렇게 승부가 나 봤자 남을 건 상처뿐인 그들만의 사투를 시작하고 만다.

영화는 거대하고 음울한 '진실 게임'을 스무고개 풀이하듯 펼쳐나간다. 세 주인공은 마치 삼발이의 각 다리처럼 위태로운 균형을 서로 침범하고 반격하며 이어나간다. 물론 누군가의 소망이 해소되려면 필연적으로 그 균형은 붕괴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즉 일방이 포기하거나 패배한다 해도 온전한 승리자는 나올 수 없는 게임인 것이다. 셋 다 그걸 알지만, 돌이킬 수 없다.

관객은 그들 각자가 벌이는 궁리와 주장을 화면에서 목격하게 될 테지만, 정작 그들이 던지는 주장과 질문이 온당한지, 그리고 개별의 '진실'을 담은 게 맞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의식적으로 누군가는 거짓을 말할 수 있고, 혹은 자신은 사실이라 믿는 게 주입되고 조작된 음모일 수 있기 때문이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처럼 관객은 그저 자신이 믿고픈 사실을 진실이라 간주할 수밖에 없다.

가족 공동체 위기 재료 삼아 '멸망' 서사 직조하다
 

▲ 영화 <엄마의 왕국> 스틸 이미지 ⓒ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영화는 '가족'이란 원초적 공동체의 사상누각 같은 위기를 통해 인류 보편의 윤리적 고뇌를 풀고자 한다. 누군가는 가족 내의 가부장적 구습을 악용해 폭군으로 군림하고, 희생당하는 가족 내 약자들은 저항과 반격을 도모한다. 사회가 관심을 보이며 제대로 개입한다면, 그런 '내전'은 조기에 진화되고 불합리한 가족은 해체되거나 적어도 개선될 여지가 있다.

반면 <엄마의 왕국> 속 피해자들은 그런 당연히 받아야 할 보호 대신에 파국적인 자력구제를 도모했었다. 그 결과로 마치 고대로부터 왕국이 무너지고 혼란이 발발할 때 착취당하던 민중이 외진 땅으로 도피해 그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하던 것처럼 작은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기반과 토대는 그들이 취할 수밖에 없었던 파괴적 수단과 실행 탓에 언제 허물어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것이었다.

영화를 보자마자 스티븐 킹의 원작소설을 극화한 테일러 핵포드 감독의 1995년 영화 <돌로레스 클레이본>이 떠올랐다. (케시 베이츠가 열연한) 주인공은 딸을 구하기 위해 과거에 어떤 사건을 일으켰고, 오랜 시간이 지나 자신이 위험을 무릅쓴 덕분에 성공한 딸과 재회하게 된다. 30년 전 영화가 기구한 사연을 간직한 모녀 관계와 여기에서 확장된 여성연대를 중심축으로 삼았다면, <엄마의 왕국>은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가부장제의 그늘 하에 위치한다.

아들을 구하기 위해 어머니는 남편을 버렸고, 그 과정에서 시동생과의 동맹 혹은 이용관계가 존재했다. 그리고 결과 역시 아버지가 부재한 자리에 어머니가 제정한 규칙이 자리를 잡은 수직적인 구조의 계승이었다. 친밀하긴 하지만, 평등해 보이진 않는 '왕국'의 질서가 그 척도가 된다.

영화는 세 사람의 기구한 인연을 파괴적 방식으로 끊어내는 과정을 다룬다. 그 과정에서 충격적인 사실들이 여럿 드러나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 개별적 장면들이 온전하게 '진실'인지 혹은 인물 각자의 '거짓말'로 사실을 대체하려는 의도인지 진실 확인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저 관객은 주어진 정보로 사건을 재구성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미스터리 구조에 실내극 수준의 최소화된 인물 관계는 주요 배역을 맡은 배우들의 연기력을 최대한 끌어내야만 하는데, 세 주연배우의 연기력과 구현된 이미지는 서사가 때로 느슨해지거나 진부하게 느껴질 때마다 그 빈틈을 충실히 메우는데 모자라지 않는 활약을 펼친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교차, 그에 따른 관계의 역전과 비교가 선형적 연대기로만 흘렀다면 반드시 닥쳤을 식상함을 보완하는 데 한몫을 해낸다.

봉준호 감독의 <마더>가 자아내는 정서와도 일맥상통하는 지점이 포착된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어머니'란 그런 존재다. 경희는 제왕절개로 자신의 배에 칼자국 내기를 감수하며 지욱을 낳았다. '내 배로 낳은 자식'이란 표현이 단순한 수식어가 아닌 셈이다. 그렇기에 아들은 특별한 존재이고, 자신이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보호해야만 하는 소중한 대상이 된다.

그런 경희의 심리 추적을 통해 모자간의 사랑을 초월한 어떤 원초적인 애정을 상상한다 해도 그런 상상력이 그냥 억지는 아닐 테다. 자식의 허물은 어머니가 책임져야 할 몫이고, '내로남불'은 가족이라면 당연하게 표출할 수밖에 없는 원초적 감성이라는 점을 영화 속 경희는 확고하게 구현하려 한다.

비록 감독이 품었던 영화의 완성형 비전이 얼마나 구현됐는지 알 순 없지만, 영화는 시대를 초월한 가족 관계의 부정적 면모와 불안한 이면을 재료 삼아 음침한 고딕적 정서를 구축하는 데 일정하게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근대 공포문학의 효시 중 하나인 에드가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가 자아내던 그런 정서 말이다.

그리고 2024년 현재 한국 사회에 속한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외면할 수 없는 전통적인 가족의 위기, 즉 격동의 구한말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국가가 담보하지 못한 개별 구성원의 생존과 보호를 최소한도로 사수해 왔던 원초적 공동체가 붕괴하는 도상이라는 특이점 덕분에 더 극한의 체험으로 자리할 테다.

<엄마의 왕국>은 요즘 같은 시절에 관객이 기대하는 카타르시스나 후련한 해소의 결말과는 거리가 먼 작품이다. 첫 장편영화를 이렇게 끝까지 밀어붙이는 뚝심은 무척이나 희귀해진 상황이라 놀랍기도 하다. 대충 이렇게 몰고 가다가 요렇게 비틀고, 관객의 애간장을 태우다 짜릿하게 풀어주는 적당한 관습적 결말을 애초 고려한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오히려 반가울 수밖에 없다. 미스터리 스릴러의 기조는 시종일관 유지되고, 간간이 그 긴장도가 극한에 달할 때는 일정한 판타지 연출을 가미해 공포 장르와도 접속한다.

영화가 막을 내려도 관객은 온전히 이 영화의 결말을 정의하기 쉽지 않다. 그런 감정의 응어리는 극장 문을 나서면서 토해내는 한숨으로도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테다. 그렇게 한두 번은 더 떠올리게 될 근원적 감정의 순수결정체 같은 영화다.

[작품정보]

엄마의 왕국 Mother's Kingdom
2024 | 한국 | 범죄/드라마
2024.07.24. 개봉 | 97분 | 15세 관람가
감독 이상학
출연 한기장(도지욱 역), 남기애(주경희 역), 유성주(도중명 역).
        송예은(30대 주경희 역), 이시우(어린 도지욱 역)
제작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제공 영화진흥위원회
배급 스튜디오 에이드

 

▲ 영화 <엄마의 왕국> 포스터 ⓒ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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