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퍼포먼스와 정치가 만나는 베를린 시축제의 매혹
김현 황유원 시인을 초청한 '포에지 페스티벌 베를린'의 이모저모.
▲ 시민들이 사일런트 그린 문화예술복합공간 풀밭에 누워 시축제를 즐기고 있는 모습포에지페스티발이 한창 열리던 지난 주말 시민들이 브라질 시인 히카르두 도메네크의 시를 풀밭에서 듣고 있는 모습. 베를린의 북쪽 웨딩지역에 위치한 사일런 그린은 1909-1910년 베를린의 첫 화장터로 지어졌는데, 2013년 민간운영 복합문화단지로 거듭났다. 현재는 개별 예술 분야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하이브리드 형식으로 연결하는 작업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에 다양한 영화제, 콘서트, 전시장, 문학행사들이 시립 공동묘지, 카페, 풀밭과 자연스레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 클레어함
시라는 문학장르에 매료된 이들에게 이유를 묻는다면 아마 각기 다른 답변을 하지 않을까. 누군가는 삶과 사랑, 자연의 미를 예찬하는 시적 언어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거나, 시구(詩句)의 사적인 내밀한 감정과 교감할 수 있어서 일테다. 또한, 누군가는 시가 깊은 철학적 사색을 함께 벗삼을 수 있는 텍스트라든가, 정치적인 성격의 격문에 크게 공감해서 일 수도 있겠다.
7월 4일~ 21일, 3주간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열린 유럽 최대의 시의 향연, '포에지 페스티벌 베를린'(Poesiefestival Berlin)은 이 모든 요소들을 끌어안은 매혹적인 시들과 150명의 초청 시인들을 직접 만나 소통할 수 있는 아름다운 시의 축제였다.
▲ 포에지페스티벌 베를린 매거진의 커버를 장식한 미국의 저명한 시인 테런스 헤이스올해로 25주년을 맞는 포에지페스티벌 베를린에서 미국의 저명한 시인, 테런스 헤이스는 단연코 주인공이었다. 주최측이 특별히 일년에 한번 ‘포에지 페스티벌 베를린'을 위해 발행하는 매거진의 커버를 장식했다. 왼쪽면에는 헤이스 작가가 2019년 뉴요커에 발표했던 정치적인 시, “American Sonnet for the New Year”가 소개되었다. 그는 회화, 농구에도 능해 “모던 르네상스맨"으로도 불린다. ⓒ Poesiefestival Berlin
20일에는 'ZEBRA 포에트리 필름 페스티벌'의 20주년을 맞아 과거의 하이라이트 작품들을 무료로 재상영하기도 했다. 이 영화제의 토마스 잔데자코모 델벨, 아트 디렉터에 의하면, 시 영화(poetry film) 장르란 "시를 기반으로 시인이 연출을 하거나 시인과 협업하는 모든 단편 형태의 동영상"을 뜻한다. 하우스 퓌어 포에지가 주최하는 또다른 형태의 문화 행사다.
올해로 25주년을 맞는 베를린 포에지 페스티벌은 21일 미국의 저명한 시인, 테런스 헤이스(Terrance hayes)의 강연, 20일 세계 8명의 시인들이 자국어로 시를 낭독하는 행사로 끝을 맺었다. 특히 테런스 헤이스는 단연코 올해의 주인공이었다. 주최측이 특별히 일년에 한번 발행하는 매거진의 커버를 장식한 그는 현재 뉴욕대 교수로, 2010년 시집 <얼간이>(Lighthead)로 권위 있는 전미도서상을 수상했다. 대학에서 회화를 공부했던 그는 직접 그린 드로잉이 다수 포함된 영독 2개 국어 버전의 신작 <Introduction to an Illustrated Timeline of Poetic Influence: The Poetics of Context, Text, and Subtext>을 바탕으로 20세기초부터 현재까지 미국에서 시적 영향력을 발휘한 다양한 시인들을 선보이며 미국 시 역사에 관해 강의했다. 그는 이 강의에서 월리스 스티븐스, 마거릿 대너, 러셀 앳킨스, 소니아 샌체즈, 유세프 코무냐카, 옥테이비아 버틀러, 완다 콜먼, 파트리샤 스미스 등등을 소개했다.
20일에는 2019년 뉴요커에 발표했던 정치적인 시, "American Sonnet for the New Year)"의 마지막 구절, "Things will get less ugly inevitably hopefully"을 인용한 프로그램 타이틀로 자신의 문학 세계를 소개하는 대담의 시간도 가졌다. 그는 대부분 부사를 사용한 이 시를 낭독하며, "정식 문학 교육에서는 부사가 동사를 약하게 한다는 이유로 부사 사용을 권하지 않지만, 저는 이런 규범에 도전하고 싶어서 부사로도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전했다.
2018년 발표한 그의 시집 <American Sonnets for My Past and Future Assassin>는 70여 개의 소네트를 모은 것으로, 2016년 트럼프 집권 후 첫 200일간 빠르게 변하는 당시 미국 사회의 정치적 풍토를 예리하게 그렸는데, 무엇보다도 인종주의적 폭력이 늘어나는 현상을 개탄했다. 2016년 대선 이후 정치적인 시를 쓰기로 작정한 그는 시에서 트럼프를 "미스터 트럼펫 (Mister Trumpet)"으로 부르는 등 조롱도 서슴치 않았다. 테런스 헤이스의 특별 강연은 독일 라디오방송국 (deutschlandfunk)에서도 곧 송출될 예정이다.
▲ 세계의 소리- 시의 밤에서 낭독을 하는 황유원 시인주요 폐막 프로그램중의 하나인 ‘세계의 소리-시의 밤'에는 황유원 시인이 참여했다. 또한, 아네커 브라싱하 (네덜란드), 카요 칭고니 (잠비아), CA콘래드 (미국), 파테메 에흐테사리 (이란), 실비 캉데 (프랑스), 마리안나 키야노우스카 (우크라이나), 미루나 블라다 (루마니아) 작가도 함께 자국어로 낭독했다. ⓒ Andrea Vollmer
한편, 작년 6월 같은 시 축제에 초청되었던 김혜순 시인도 '혀 없는 모국어'라는 제목으로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인 'Berliner Rede zur Poesie' 행사에서 연설문을 낭독했고 독일어로 더빙된 버전은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주요 폐막 프로그램중의 하나인 '세계의 소리-시의 밤'(Weltklang-Nacht der Poesie)에는 황유원 시인도 참여했다. 황 작가는 '밤의 행글라이더' '지네의 밤' '밤의 아라베스크' 세 편을 차분하지만 열정적으로 낭독했다. 황유원 시인은 포에지 페스티벌 참여 소감을 묻는 필자에게 "해외 청중은 한국 청중과 달리 한국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해외 행사에서 시 낭독을 하는 것과 한국에서 시 낭독을 하는 것은 여러모로 완전히 다른 일이다. 한국에서는 의미가 중요하지만, 해외에서는 소리 자체가 더 중요해지기도 한다. 즉, 저는 외국인들이 현장에서 난해한 시 번역 텍스트를 바로 읽고 이해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의미 이해보다도 그저 한국어를 듣고 느껴 보고픈 사람들을 청중으로 상정하고 시를 읽었다"면서 "해외에서 시를 읽으면 저 자신이 시인이라기보다는 '한국어 발성기관'이 되었다는 기분이 드는데, 어떤 나이 지긋한 한 우크라이나 여성이 저에게 '태어나서 한국어를 처음 들었는데 정말 놀랍고 인상적이었다'라며 말해주었을 때, 그래도 제가 '한국어 발성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하긴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인은 결국 어떤 종류의 극단적인 '언어 발성기관'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다시 해보게 되었다"고 전했다.
황유원 시인은 서강대 종교학과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 인도철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2013년 문학동네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현재 시인이자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세상의 모든 최대화>,<초자연적 3D 프린팅>등이 있다.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김현문학패 등을 수상했다.
▲ 김현 시인의 낭독회 모습김현 작가는 ‘WRITING CHANGE-In The Gifted Dark’이라는 이 프로그램에서 슬로베니아의 니나 드라기체비치, 라트비아의 키릴스 에치스 (Kirils ?cis), 아이슬란드 시인이자 뮤지션, 조각가 아우스타 판네이 시귀르다르도티르( Asta Fanney Sigurðardottir)와 함께 낭독했다. 김현 시인은 2009년 <작가세계>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글로리홀><입술을 열면><호시절> <다 먹을 때쯤 영원의 머리가 든 매운탕이 나온다><낮의 해변에서 혼자>등이 있다. 제22회 김준성문학상과 제 36회신동엽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 클레어함
한국의 대표적인 퀴어시인, 김현 작가도 올해 포에지페스티벌에 공식 초청을 받아 시 낭독회를 가졌다. 그는 'WRITING CHANGE-In The Gifted Dark'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브라질 퀴어시인 히카르두 도메네크의 사회로 시 장르와 사회의 변화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또한, 김현 작가의 신작 에세이 <재와 감자>는 포에지 페스티벌 베를린의 매거진에 게재되기도 했다. 그는 이 특별 기고문에서 "오늘날의 퀴어는 이제 더는 글로리홀(구멍 난 세계)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오랜만에 <글로리홀>을 펼쳐 보았습니다. '이 세계는 죽음에 가까이 있다. 내게 사랑은 가까운 것이다.'라는 작가의 말이 적혀 있더군요. 새삼 그때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제 시가 줄곧 사랑과 죽음에 붙들려 있었다는 것을 깨쳤습니다. 사랑과 죽음은 '퀴어의 삶'에 대한 명징한 요약이기도 하지요. 『글로리홀』이 출간될 당시는 지금처럼 퀴어문학이 한국문학의 한 흐름으로 자리 잡기도 전이었고, 그때나 지금이나 시라는 장르 자체가 마이너한 것이었기 때문에 대중의 관심을 크게 끌지 못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그해 4월에 일어난 세월호참사로 인해 사회 안팎은 물론 문단에도 축축하고 무거운 비탄의 안개가 드리워져있었다는 것도 한 이유로 작용하지 않았나 싶기도합니다. 한편, 어쩌면 성소수자를 향한 혐오와 폭력이 점점 거세어지는 현실 세계와는 다르게 문학의 혁명적인 세계에선 이미 퀴어가 더는 낯설고 불편한 존재가 아니었을 수도 있겠습니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김현 시인의 지적대로, 퀴어시는 더 이상 세계 문학무대에서 낯선 존재가 아니다. 필자는, 오히려 퀴어 시인들이 국제무대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본 페스티벌의 마티아스 크니프 (Matthias Kniep) 디렉터는 세계 문학무대에서 퀴어시의 전반적인 존재감을 묻는 필자에게 "퀴어 커뮤니티에서 창작하는 시들중 특히 훌륭한 작품들이 많다고 느낀다. 시인이 한국 출신인지 영국인인지 미국인인지는 중요하지 않지만, 반드시 작품성이 있어야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퀴어 시인들을 초대해왔고 특별히 새로운 트렌드도 아니다"고 평했다. 아울러,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는 8월 8-10일 3일간 'Coming Out, Inviting In' 퀴어 시축제가 열릴 예정이다. 이 행사는 LCB 단체가 주관한다. 이외에도 독일의 주요 도시에서는 퀴어 문학 페스티벌들이 여기저기 자리하고 있다.
실험적인 시창작을 해온 슬로베니아의 퀴어시인, 니나 드라기체비치(Nina Dragičević)는 페스티벌 매거진에서 퀴어문학 관련 교육환경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며, "제가 비교적 작은 마을에서 자랐던 어린 시절에는 여성이 문학창작으로 인생을 바칠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여기는 것이 많지 않았으나 (수도) 류블랴나로 이사하면서 가능성의 지평이 바뀌었다. 그곳에서 저는 레즈비언 도서관과 퀴어 아카이브를 통해 퀴어 작품들을 발견했고 작가들을 만났다. 비전통적인 표현을 열린 마음으로 대하는 완전히 대안적인 컬쳐신이 있었고, 나는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 북마켓 모습주말에는 약 40여개의 출판사들이 시민들에게 책을 소개하고 소통하는 시집마켓 (Lyrikmarkt)도 열려 다채로움을 더했다. ⓒ 클레어함
베를린 포에지 페스티벌에서는 지난 17일 퀴어 시인들을 초청해 젠더및 정체성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WRITING IDENTITIES-When gender blurs in a poem, my world sets a tooth in the gear"라는 타이틀의 이 프로그램에는 독일의 리자 예슈케, 미국의 CA콘래드, 나이지리아의 로건 페뷰어리, 스코틀랜드의 해리 조세핀 자일스 작가들이 토론에 참여했다.
특히 트랜스젠더 정체성에 대한 시를 쓰면서 시각적으로 대담한 아방가르드적인 창작세계를 펼쳐온 조세핀 자일스(Harry Josephine Giles) 작가는 본인의 낭독회 타이틀 시 ('트랜스젠더가 새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를 낭독하기에 앞선 모두발언에서, "주최측의 초대에 감사함을 느낀다"면서도 "이 특별한 행사에 참여하면서 전쟁과 억압의 상황, 또는 독일 정부와 문화기관에서 팔레스타인의 목소리와 연대를 검열하는 것에 대응한 국제 문화 노동자들의 국제 캠페인 '스트라이크 독일'에 동조하기위해 불참한 이들을 떠올린다"고 지적했다.
또한 그는 "(독일을 보이콧하는 이) '스트라이크 독일'의 요구는 예술의 자유를 보호하고, 예루살렘선언을 채택하여 반유대주의에 맞서 싸우며, 국가와 문화기관 내에서의 구조적인 인종주의, 특히 이슬람혐오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저는 이러한 요구를 지지한다"고 언급했다. 아울러 수차례 '저의 모든 시는 팔레스타인해방을 원한다'고 말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자일스 작가는 2022년 시소설 (verse novel) < Deep Wheel Orcadia >로 아서 C 클라크상 (sci-fi 소설부문)을 받은 것을 비롯, 다수의 상을 수상한 바 있는 베테랑 작가다.
(비디오 전체 링크: https://www.happyscribe.com/transcriptions/5dbf919326a8444e82d8fabd09f232c5/view?organization_id=7898142)
▲ 베를린 포에지 페스티벌에서는 지난 17일 퀴어 시인들을 초청해 젠더및 정체성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왼쪽부터) 독일의 리자 예슈케 (Lisa Jeschke), 미국의 CA콘래드(CAConrad), 나이지리아의 로건 페뷰어리(Logan February), 스코틀랜드의 해리 조세핀 자일스 작가, luca Mael Milsch(사회)가 토론에 참여했다. ⓒ 클레어함
한편 김현과 황유원 두 시인은 "두 사람을 위한 나뭇잎"이라는 제목의 행사에 19일 함께 동석해 자신의 시 세계와 아울러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의 시인의 역할, 한국 시문학의 특징 등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행사 제목은 <장송 행진곡>에 수록된 김현 시인의 시 <한 사람을 위한 나뭇잎>에서 따온 것으로, 두 작가의 시 번역과 행사 진행은 문화학자이자 베를린 공대 건축학과 박사후 과정 연구원인 강성운씨및 박 술, 힐데스하임 대학교 철학과 조교수, 시인, 번역가가 맡았다. 이 행사를 소개했던 카타리나 슐텐스(Katharina Schultens) 페스티벌 집행위원장은 "우리는 이들의 작품들을 익히 알고 있었다"면서 "대담하면서도 동시에 독특한 이들의 시들을 사랑한다"고 평했다.
김현 시인은 참가 소감을 묻는 필자에게 "25회째 이어진 유서 있는 시 축제에 참여하게 되어 기뻤다. 베를린 최초의 화장장이었다는 곳에서, 죽음이 삶으로부터 동떨어지지 않은, 어떤 기억의 장소에서 세월호참사와 이태원참사에 관한 목소리가 담긴 시를 한국어로 읽을 수 있어서 뜻깊었다. 또한, 퀴어의 도시, 어디서든 무지개 깃발을 볼 수 있는 해방의 도시에서, (한국에서) "사실혼 동성배우자, 건강보험 피부양자 등록 가능"이라는 역사적인 판결이 났음을 전해 들은 직후에 '퀴어의 삶'을 담은 시를 읽게 된 것 역시 오래 기억될 것 같다"면서, "전 세계적으로 한국 시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의 생동하는 시인들이 더 자주 해외 독자들과 만나는 기회가 많이 마련되면 좋겠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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