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아닌 시골에서 재즈하는 뮤지션들, 왜냐면요
[인터뷰] "돈보다 소중한 것들을 연주합니다" 살래재즈팀: 보석과 한결 ①
관객으로서 재즈가 가장 멋지다고 느껴질 때는 역시 연주자의 즉흥이 펼쳐질 때다. 연주자들의 주고받는 대화 옆에 슬쩍 의자를 놓고 앉아 있다 보면 어쩐지 나도 한 마디를 얹게 되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그때의 희열을 함께 느끼려고 반드시 재즈를 잘 알 필요는 없다. 우리의 옆엔 다정한 연주자 보석과 한결이 있으니까. 요리사가 즐거운 마음으로 만들어낸 요리가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것처럼 위안을 전하는 예술가들의 음악은 그 자체로 든든한 한 끼 음식이 된다.
여기저기 재즈가 풍년이다. 유튜브에도 스탠다드 재즈부터 K-pop을 편곡한 재즈 플레이리스트가 넘쳐나고, 노동요가 필요한 많은 노동자들은 귀가 피로해지는 음악을 잠깐 내려놓고 재즈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이곳, 지리산 산골에도 재즈가 울려퍼지고 있다. 시골의 동네카페부터 각종 활동가들의 연대 현장까지, 자신들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라도 찾아간다는 살래재즈팀 이야기다. 그들은 연대가 필요한 곳에서, 음악이 필요한 곳에서 그들만의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한다. 우리는 재즈를 통해 무엇을 주고 받는걸까. 마음에 흐르는 질문을 품고 햇살이 무더웠던 6월의 어느 날, 살래재즈팀의 콘트라베이시스트 한결과 트럼페터 보석을 만났다.
- 코로나 팬데믹 이후부터 지리산권에 살래재즈팀의 연주가 울려퍼지고 있어요. 살래재즈팀은 어떻게 소개할 수 있을까요?
한결: "지리산권에서 재즈를 전파하고 연주하는 살래재즈팀이고요. 산내에 살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서 '살래재즈팀', 혹은 '살래재즈트리오'라는 이름으로 주로 활동하고 있어요. 멤버들이 모두 산내에 살고 있다면 참 좋겠지만, 저희 둘로는 연주에 한계가 있어서 객원 멤버를 항상 모시고 와서 살래재즈트리오 혹은 살래재즈콰르텟, 이런 식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팀을 결성하게 된 건 산내에서 트럼펫을 연주하는 보석을 만나고나서였어요. 보석에 대한 얘기는 건너서 듣고 있었지만 만날 계기가 없었는데, 2년 전에 마을 분의 소개로 만나게 됐어요. 처음엔 그 마을 분과 셋이서 연주 팀을 만들어보려다 와해됐고, 이후에 재즈 팀을 해보고 싶어서 보석에게 제안을 했어요. 그런데 마침 보석이 재즈에 관심이 있었던 터라 고맙게도 팀을 결성하게 됐습니다."
- 요즘은 공연 이외에 어떤 활동을 하고 있어요?
보석: "저는 '장항마을'이라는 새로운 유니버스의 성원권을 얻게 됐어요. 집이 생기면서 '마을 사람'이라는 인식을 얻은 것 같아요. 그에 따라서 해야 하는 마을 일이 상당히 많더라고요. 저희 마을에는 귀농귀촌인이 거의 없고 특히 젊은 사람은 더욱 없어요.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 마을 일을 돕고 있고, 그 대신 마을회관이라는 공용 공간을 자주 활용하고 있어요. 집에 와이파이와 냉장고가 없기 때문에 저에게 마을회관은 너무 중요한 곳이예요.
그리고 회관을 가면 자연스럽게 할머니들과 자주 만날 수밖에 없잖아요? 마을의 할머니들이랑 되게 친해지게 되면서 이제는 제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더라도 마을회관에 자주 가고 있어요. 가서 할머니들께 휴대폰 플래시 끄는 거 도와드리거나 지로용지를 읽어드려요.
그 외에도 들깨 심기, 마을 수로 청소, 쓰레기 정리하기 같은 일들 때문에 마을 밖에 나올 시간이 많지 않아요. 그러면서 농산물 같은 걸 얻기도 하고요. 마을에 출근하지 않는 젊은 사람이 저뿐이니까 마을 분들은 도움이 필요할 때 집에 찾아오시거나 전화하시는데 다행히 그게 체질에 맞아요. 최근엔 마을 소풍도 같이 다녀왔는데 정말 신세계를 경험했네요. (웃음)"
- 한결은 어머님이 이장이 되면서 '이장 아들'이 되셨죠? (웃음) 어떤 활동을 하면서 지내고 계신가요?
한결: "시골에서 이장의 파워는 엄청나더라고요. 이장 아들이라고 하면 아니꼬왔던 시선도 확 달라지세요. 어쨌든 저는 마을 일로 바쁘진 않고요. 주로 실상사작은학교, 인월중학교, 운봉중학교, 도서관의 수업을 많이 가요. 남은 시간에는 보통 공연 준비를 하고 있고요.
학교에서는 밴드 수업과 통기타 수업을 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되게 좋아해줘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선생님이셔서 서당개처럼 습득했던 스킬들이 저도 모르게 나오더라고요. 아이들 가르치는 일이 되게 즐거워요. 그렇지만 연주할 때가 가장 행복해서 수업을 더 늘리고 싶진 않아요. 아직은 연주에 더 집중하고 싶은데 수입이 필요하다보니 수업은 유지하고 있어요."
시골에서 음악한다고?
- 두 사람 다 음악 전공자잖아요. 이런 분들이 가까운 마을에 있다는 게 항상 귀하게 느껴지는데요. 두 사람은 어떻게 음악을 전공하게 되었나요?
한결: "저는 아무래도 어머니가 음악을 전공하셨다보니 자연스럽게 접하게 됐어요. 대안학교인 실상사작은학교에 진학하게 된 것도 밴드부가 있었기 때문이고요. 덕분에 재밌게 활동을 했지만 졸업 후에 저는 지레 겁먹고 음악을 앞으로는 하지 않을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친구들이 졸업 후에 음악을 계속 하는 걸 보고 '쟤도 가면 나도 가보자' 하고 용기를 얻어서 서울재즈아카데미에서 음악을 하게 됐고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그때 같이 갔던 동기는 서울재즈아카데미랑 맞지 않아서 나갔고, 저는 너무 재밌게 다녔어요."
- 유학도 재즈 전공으로 간 거네요?
한결: "한국 실용음악이나 대학 시스템에서 공부하는 것들이 다 재즈예요. 그렇기 때문에 클래식은 클래식, 실용음악은 재즈를 공부한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미국에 갈 땐 애초에 재즈가 좋아서 갔기 때문에 4년 정도 공부를 했어요. ESL(English Second Language Course)에 토플 점수가 모자라서 6개월 조건부 입학으로 시작해서 운이 좋게 3년 반 만에 조기 졸업했어요. 졸업 후에 코로나로 셧다운이 되고나서 산내로 돌아오게 됐죠."
- 보석도 학창시절 때부터 음악을 전공했었죠?
보석: "중학교 때 관악합주부라는 관악기로만 구성된 오케스트라 동아리가 있었어요. 거기서 처음 트럼펫을 접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쭉 트럼펫을 공부하는 길로 가게 됐습니다."
- 그런데 산내에 귀촌하고 나서는 한동안 트럼펫을 놨던 시기가 있었다고 알고 있어요.
보석: "맞아요. 그때쯤엔 다른 걸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나 봐요. 트럼펫은 어렸을 때부터 계속 해왔던 건데, 이것 말고 내가 궁금한 것들, 해보고 싶은 것들을 발견하고 싶어서 산내로 귀촌을 결심한 거죠. 그런데 귀촌하고 보니까 실제로 해야 될 게 진짜 많은 거예요.
그러니까 하고 싶은 것보다 해야 될 것들, 또 여기서 할 수 있는 것들이 되게 많았어요. 음악이 하기 싫은 건 아니었는데 트럼펫은 혼자 음악할 수 있는 악기가 아니기도 하고 여기서는 같이 할 사람도 없으니까 자연스럽게 다른 일들에 집중하게 된 것 같아요. 그러다 한결을 우연히 만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다시 음악을 하게 된 거죠."
- 오랫동안 전공을 하면 그 전문성을 살려서 일을 하거나 더 깊이 파고들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 같아요. 그러기 위해서는 도시에서의 삶이 더 유리할 텐데 시골을 선택한 이유가 있었나요?
한결: "처음에는 코로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집에 돌아와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그때는 마음이 되게 급했어요. 타지에서 공부하는 동안 돈을 어마어마하게 썼을 텐데 집에서 뒹굴거릴 수는 없잖아요. 그렇다고 여기에 연주자들이 많은 것도 아니라서 연주도 어려웠고요. 급한 마음에 돈이라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카페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어요. 음악은 코로나라는 핑계로 계속 미루고요. 왜, 음악하는 사람들이 산 속에 들어가서 몇 년씩 수련하잖아요. 저도 여기에서 수련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한 2년을 보낸거죠.
그러다가 서울로 우연히 공연하러 가서 오랜만에 정말 잘하는 사람들과 연주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좋긴 했지만 별로 재미는 없는 거예요. 일단 서울이라는 곳이 갑갑하게 느껴졌고, 너무 치열하게 살고 있는 것도 보였고요. 무엇보다 다른 뮤지션들의 공연을 보면서 무대와 관객을 위한 공연보다는 돈을 위해서 공연을 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 느낌이 제가 도시에서 음악을 하고싶지 않게 만드는 결정적 이유였어요.
그리고 제가 공부했던 필라델피아에서는 로컬 뮤지션들이 상당히 많았어요. 정말 동네의 작은 카페에서도 수준급의 연주자들이 음악을 즐기면서 여유 있게 연주하는 걸 보면서, 또 그런 뮤지션들에게 음악과 삶을 배웠다 보니 내가 그렇게 서울에서 살 돈이면 차라리 외국 가서 살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또 한편으로는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전 세계가 인터넷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것 같은데, 그러면서 내가 사는 장소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어요. 나만 잘하면 내가 어디에 숨어 있든 음악적인 활동을 계속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고민과 지역에서도 음악하는 환경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두 가지 마음으로 여기에 남게 됐어요."
- 그게 살래재즈팀 결성까지 연결된 건가요?
한결: "그렇죠. 한 가지 이유를 더하자면 트럼펫처럼 콘트라베이스도 혼자 연주하기 힘든 악기예요. 그래서 저희가 팀 결성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둘 중에 한 명이라도 기타나 피아노 쪽이었으면 혼자 작업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럼에도 기타나 피아노는 팀에 필요하지만요."
- 보석의 경우엔 어떤가요? 도시가 아닌 시골에서 음악하고 싶은 이유가 있었나요?
보석: "정말 많이 듣는 질문이에요. 왜 젊은 나이에 여기에서 이러고 있냐고 주변에서 정말 많이들 물어보시거든요. 근데 저는 제 음악의 전문성을 발휘해서 더 갈고 닦거나 이걸로 더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 그다지 없는 것 같아요. 예전부터 '그냥 이만하면 됐다'는 마음이 있는 것 같아요.
그게 제 실력에 만족해서는 아니예요. 공연이 끝나면 늘 만족스럽지 못하고 괴로운데, 그럼에도 그 전문성을 갈고 닦는 현장이라는 곳이 제 삶의 질을 높여주는 현장은 아닌 것 같아요. 음악 씬도 그렇고 그 음악 씬이 포진되어 있는 도시도 그렇고요. 바쁘게 정신없이 사느라 마음의 여유가 없는데, 음악도 공장에 나가는 마음으로 해야 했어요. 그래서 귀촌 이후에 음악을 다시 시작할 때도 마음의 여유가 사라지는 걸 경계하려는 마음을 그대로 갖고 있어요. 한편으로는 그냥 여기서도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한결: "이 질문에서 한 가지 더 얘기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이 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저의 존재에 대해 알고 계시거든요. 그런데 최근 한 10년 간 여기를 떠나있다가 다시 만났을 때, 생태적인 삶에 대해 공부도 많이 하고 그 삶에 만족하는 분들조차 제가 이곳에 있다는 걸 의아하게 생각하시더라고요. 왜 도시에 있지 않느냐는 거죠. 그런 질문이 굉장히 아이러니하게 느껴져요.
최근에 만났던 분과도 지금과 비슷한 이야길 나눴는데, 그 분은 어디에 살아도 괜찮다고 말하는 제 말이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 같다고 이야기해주셨어요. 그 말이 저에게 크게 다가오더라고요. 무슨 말이냐면, 제가 서울에서 음악 공부를 해보지 않았거나 유학을 가지 않았다면 이 지역에 살고 있어도 자격지심을 느꼈을 것 같아요. '난 우물 안 개구리야' 생각했을 것 같은데, 오히려 바깥을 경험하고 오니 내가 어디에 있다는 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 지금도 일정이 있으면 서울로 가서 활동할 수 있고요. 장소에 대한 제약이 없어진 것 같아요."
보석: "'성공해서 서울로 간다'는 말은 보편적이지만, 생각해보면 성공한 사람들 결국 시골에 가서 살지 않나요? (웃음) 시골에서 마당있는 좋은 집에서 살잖아요. 그리고 저도 도시에 있을 땐 음악 말고 별로 궁금한 게 없었고, 필요한 것도 없었던 것 같아요. 제 스스로도 '음악하는 나' 말고는 쓸모가 없어 보였어요.
음악 이외의 나에 대한 쓸모나 필요가 없다고 느껴져서 '나중에 음악을 못하게 되면 큰일 난다'는 생각이 늘 있었어요. 그런데 시골에 오면서 여기서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졌어요. 필요한 것, 궁금한 것도 너무 많아서 음악말고도 쓰임을 받을 수 있는 게 가장 큰 차이 같아요."
(* 다음 인터뷰로 이어집니다. 클릭!)
진행 / 넉넉
글 / 승현
2024년 6월 21일, 남원시 산내면 지리산문화공간 토닥에서.
글쓴이 : 승현
지리산 귀촌인 인터뷰집 <어디에나 우리가> 저자. 세상의 본질에 대한 호기심을 동력으로 살아간다.
여기저기 재즈가 풍년이다. 유튜브에도 스탠다드 재즈부터 K-pop을 편곡한 재즈 플레이리스트가 넘쳐나고, 노동요가 필요한 많은 노동자들은 귀가 피로해지는 음악을 잠깐 내려놓고 재즈를 찾기 시작했다.
▲ 남원시 산내면의 카페 '플래닛커피' 에서 매월 마지막주 토요일 공연한다. 오른쪽부터 한결, 보석, 객원연주자 박원형. ⓒ 임현택
- 코로나 팬데믹 이후부터 지리산권에 살래재즈팀의 연주가 울려퍼지고 있어요. 살래재즈팀은 어떻게 소개할 수 있을까요?
한결: "지리산권에서 재즈를 전파하고 연주하는 살래재즈팀이고요. 산내에 살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서 '살래재즈팀', 혹은 '살래재즈트리오'라는 이름으로 주로 활동하고 있어요. 멤버들이 모두 산내에 살고 있다면 참 좋겠지만, 저희 둘로는 연주에 한계가 있어서 객원 멤버를 항상 모시고 와서 살래재즈트리오 혹은 살래재즈콰르텟, 이런 식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팀을 결성하게 된 건 산내에서 트럼펫을 연주하는 보석을 만나고나서였어요. 보석에 대한 얘기는 건너서 듣고 있었지만 만날 계기가 없었는데, 2년 전에 마을 분의 소개로 만나게 됐어요. 처음엔 그 마을 분과 셋이서 연주 팀을 만들어보려다 와해됐고, 이후에 재즈 팀을 해보고 싶어서 보석에게 제안을 했어요. 그런데 마침 보석이 재즈에 관심이 있었던 터라 고맙게도 팀을 결성하게 됐습니다."
- 요즘은 공연 이외에 어떤 활동을 하고 있어요?
보석: "저는 '장항마을'이라는 새로운 유니버스의 성원권을 얻게 됐어요. 집이 생기면서 '마을 사람'이라는 인식을 얻은 것 같아요. 그에 따라서 해야 하는 마을 일이 상당히 많더라고요. 저희 마을에는 귀농귀촌인이 거의 없고 특히 젊은 사람은 더욱 없어요.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 마을 일을 돕고 있고, 그 대신 마을회관이라는 공용 공간을 자주 활용하고 있어요. 집에 와이파이와 냉장고가 없기 때문에 저에게 마을회관은 너무 중요한 곳이예요.
그리고 회관을 가면 자연스럽게 할머니들과 자주 만날 수밖에 없잖아요? 마을의 할머니들이랑 되게 친해지게 되면서 이제는 제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더라도 마을회관에 자주 가고 있어요. 가서 할머니들께 휴대폰 플래시 끄는 거 도와드리거나 지로용지를 읽어드려요.
그 외에도 들깨 심기, 마을 수로 청소, 쓰레기 정리하기 같은 일들 때문에 마을 밖에 나올 시간이 많지 않아요. 그러면서 농산물 같은 걸 얻기도 하고요. 마을에 출근하지 않는 젊은 사람이 저뿐이니까 마을 분들은 도움이 필요할 때 집에 찾아오시거나 전화하시는데 다행히 그게 체질에 맞아요. 최근엔 마을 소풍도 같이 다녀왔는데 정말 신세계를 경험했네요. (웃음)"
- 한결은 어머님이 이장이 되면서 '이장 아들'이 되셨죠? (웃음) 어떤 활동을 하면서 지내고 계신가요?
한결: "시골에서 이장의 파워는 엄청나더라고요. 이장 아들이라고 하면 아니꼬왔던 시선도 확 달라지세요. 어쨌든 저는 마을 일로 바쁘진 않고요. 주로 실상사작은학교, 인월중학교, 운봉중학교, 도서관의 수업을 많이 가요. 남은 시간에는 보통 공연 준비를 하고 있고요.
학교에서는 밴드 수업과 통기타 수업을 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되게 좋아해줘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선생님이셔서 서당개처럼 습득했던 스킬들이 저도 모르게 나오더라고요. 아이들 가르치는 일이 되게 즐거워요. 그렇지만 연주할 때가 가장 행복해서 수업을 더 늘리고 싶진 않아요. 아직은 연주에 더 집중하고 싶은데 수입이 필요하다보니 수업은 유지하고 있어요."
시골에서 음악한다고?
- 두 사람 다 음악 전공자잖아요. 이런 분들이 가까운 마을에 있다는 게 항상 귀하게 느껴지는데요. 두 사람은 어떻게 음악을 전공하게 되었나요?
한결: "저는 아무래도 어머니가 음악을 전공하셨다보니 자연스럽게 접하게 됐어요. 대안학교인 실상사작은학교에 진학하게 된 것도 밴드부가 있었기 때문이고요. 덕분에 재밌게 활동을 했지만 졸업 후에 저는 지레 겁먹고 음악을 앞으로는 하지 않을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친구들이 졸업 후에 음악을 계속 하는 걸 보고 '쟤도 가면 나도 가보자' 하고 용기를 얻어서 서울재즈아카데미에서 음악을 하게 됐고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그때 같이 갔던 동기는 서울재즈아카데미랑 맞지 않아서 나갔고, 저는 너무 재밌게 다녔어요."
- 유학도 재즈 전공으로 간 거네요?
한결: "한국 실용음악이나 대학 시스템에서 공부하는 것들이 다 재즈예요. 그렇기 때문에 클래식은 클래식, 실용음악은 재즈를 공부한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미국에 갈 땐 애초에 재즈가 좋아서 갔기 때문에 4년 정도 공부를 했어요. ESL(English Second Language Course)에 토플 점수가 모자라서 6개월 조건부 입학으로 시작해서 운이 좋게 3년 반 만에 조기 졸업했어요. 졸업 후에 코로나로 셧다운이 되고나서 산내로 돌아오게 됐죠."
- 보석도 학창시절 때부터 음악을 전공했었죠?
보석: "중학교 때 관악합주부라는 관악기로만 구성된 오케스트라 동아리가 있었어요. 거기서 처음 트럼펫을 접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쭉 트럼펫을 공부하는 길로 가게 됐습니다."
- 그런데 산내에 귀촌하고 나서는 한동안 트럼펫을 놨던 시기가 있었다고 알고 있어요.
보석: "맞아요. 그때쯤엔 다른 걸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나 봐요. 트럼펫은 어렸을 때부터 계속 해왔던 건데, 이것 말고 내가 궁금한 것들, 해보고 싶은 것들을 발견하고 싶어서 산내로 귀촌을 결심한 거죠. 그런데 귀촌하고 보니까 실제로 해야 될 게 진짜 많은 거예요.
그러니까 하고 싶은 것보다 해야 될 것들, 또 여기서 할 수 있는 것들이 되게 많았어요. 음악이 하기 싫은 건 아니었는데 트럼펫은 혼자 음악할 수 있는 악기가 아니기도 하고 여기서는 같이 할 사람도 없으니까 자연스럽게 다른 일들에 집중하게 된 것 같아요. 그러다 한결을 우연히 만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다시 음악을 하게 된 거죠."
- 오랫동안 전공을 하면 그 전문성을 살려서 일을 하거나 더 깊이 파고들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 같아요. 그러기 위해서는 도시에서의 삶이 더 유리할 텐데 시골을 선택한 이유가 있었나요?
한결: "처음에는 코로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집에 돌아와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그때는 마음이 되게 급했어요. 타지에서 공부하는 동안 돈을 어마어마하게 썼을 텐데 집에서 뒹굴거릴 수는 없잖아요. 그렇다고 여기에 연주자들이 많은 것도 아니라서 연주도 어려웠고요. 급한 마음에 돈이라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카페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어요. 음악은 코로나라는 핑계로 계속 미루고요. 왜, 음악하는 사람들이 산 속에 들어가서 몇 년씩 수련하잖아요. 저도 여기에서 수련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한 2년을 보낸거죠.
그러다가 서울로 우연히 공연하러 가서 오랜만에 정말 잘하는 사람들과 연주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좋긴 했지만 별로 재미는 없는 거예요. 일단 서울이라는 곳이 갑갑하게 느껴졌고, 너무 치열하게 살고 있는 것도 보였고요. 무엇보다 다른 뮤지션들의 공연을 보면서 무대와 관객을 위한 공연보다는 돈을 위해서 공연을 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 느낌이 제가 도시에서 음악을 하고싶지 않게 만드는 결정적 이유였어요.
그리고 제가 공부했던 필라델피아에서는 로컬 뮤지션들이 상당히 많았어요. 정말 동네의 작은 카페에서도 수준급의 연주자들이 음악을 즐기면서 여유 있게 연주하는 걸 보면서, 또 그런 뮤지션들에게 음악과 삶을 배웠다 보니 내가 그렇게 서울에서 살 돈이면 차라리 외국 가서 살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또 한편으로는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전 세계가 인터넷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것 같은데, 그러면서 내가 사는 장소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어요. 나만 잘하면 내가 어디에 숨어 있든 음악적인 활동을 계속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고민과 지역에서도 음악하는 환경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두 가지 마음으로 여기에 남게 됐어요."
▲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는 한결. 남원시 산내면의 카페 '플래닛커피' 에서 매월 마지막주 토요일 공연한다. ⓒ 임현택
- 그게 살래재즈팀 결성까지 연결된 건가요?
한결: "그렇죠. 한 가지 이유를 더하자면 트럼펫처럼 콘트라베이스도 혼자 연주하기 힘든 악기예요. 그래서 저희가 팀 결성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둘 중에 한 명이라도 기타나 피아노 쪽이었으면 혼자 작업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럼에도 기타나 피아노는 팀에 필요하지만요."
- 보석의 경우엔 어떤가요? 도시가 아닌 시골에서 음악하고 싶은 이유가 있었나요?
보석: "정말 많이 듣는 질문이에요. 왜 젊은 나이에 여기에서 이러고 있냐고 주변에서 정말 많이들 물어보시거든요. 근데 저는 제 음악의 전문성을 발휘해서 더 갈고 닦거나 이걸로 더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 그다지 없는 것 같아요. 예전부터 '그냥 이만하면 됐다'는 마음이 있는 것 같아요.
그게 제 실력에 만족해서는 아니예요. 공연이 끝나면 늘 만족스럽지 못하고 괴로운데, 그럼에도 그 전문성을 갈고 닦는 현장이라는 곳이 제 삶의 질을 높여주는 현장은 아닌 것 같아요. 음악 씬도 그렇고 그 음악 씬이 포진되어 있는 도시도 그렇고요. 바쁘게 정신없이 사느라 마음의 여유가 없는데, 음악도 공장에 나가는 마음으로 해야 했어요. 그래서 귀촌 이후에 음악을 다시 시작할 때도 마음의 여유가 사라지는 걸 경계하려는 마음을 그대로 갖고 있어요. 한편으로는 그냥 여기서도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한결: "이 질문에서 한 가지 더 얘기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이 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저의 존재에 대해 알고 계시거든요. 그런데 최근 한 10년 간 여기를 떠나있다가 다시 만났을 때, 생태적인 삶에 대해 공부도 많이 하고 그 삶에 만족하는 분들조차 제가 이곳에 있다는 걸 의아하게 생각하시더라고요. 왜 도시에 있지 않느냐는 거죠. 그런 질문이 굉장히 아이러니하게 느껴져요.
최근에 만났던 분과도 지금과 비슷한 이야길 나눴는데, 그 분은 어디에 살아도 괜찮다고 말하는 제 말이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 같다고 이야기해주셨어요. 그 말이 저에게 크게 다가오더라고요. 무슨 말이냐면, 제가 서울에서 음악 공부를 해보지 않았거나 유학을 가지 않았다면 이 지역에 살고 있어도 자격지심을 느꼈을 것 같아요. '난 우물 안 개구리야' 생각했을 것 같은데, 오히려 바깥을 경험하고 오니 내가 어디에 있다는 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 지금도 일정이 있으면 서울로 가서 활동할 수 있고요. 장소에 대한 제약이 없어진 것 같아요."
보석: "'성공해서 서울로 간다'는 말은 보편적이지만, 생각해보면 성공한 사람들 결국 시골에 가서 살지 않나요? (웃음) 시골에서 마당있는 좋은 집에서 살잖아요. 그리고 저도 도시에 있을 땐 음악 말고 별로 궁금한 게 없었고, 필요한 것도 없었던 것 같아요. 제 스스로도 '음악하는 나' 말고는 쓸모가 없어 보였어요.
음악 이외의 나에 대한 쓸모나 필요가 없다고 느껴져서 '나중에 음악을 못하게 되면 큰일 난다'는 생각이 늘 있었어요. 그런데 시골에 오면서 여기서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졌어요. 필요한 것, 궁금한 것도 너무 많아서 음악말고도 쓰임을 받을 수 있는 게 가장 큰 차이 같아요."
(* 다음 인터뷰로 이어집니다. 클릭!)
진행 / 넉넉
글 / 승현
2024년 6월 21일, 남원시 산내면 지리산문화공간 토닥에서.
글쓴이 : 승현
지리산 귀촌인 인터뷰집 <어디에나 우리가> 저자. 세상의 본질에 대한 호기심을 동력으로 살아간다.
덧붙이는 글
이 인터뷰 프로젝트는 '임팩트 그라운드'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재단법인 브라이언임팩트가 후원하고 사회적협동조합 지리산이음이 기획, 운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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