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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된 게 없다" 아리셀 유족, 영정 들고 폭우 속 행진

[현장] 대통령실 앞에 선 유족·시민들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 강조

등록|2024.07.27 19:23 수정|2024.07.27 19:23

▲ 27일 오후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서 아리셀산재피해 가족협의회와 아리셀중대재해참사 대책위원회, 그리고 시민 300여 명이 기자회견을 열고 서울역 방면으로 행진했다. 유족들은 폭우가 내리는 중에도 떠나보낸 가족의 영정 사진을 붙든 채 걸었다. ⓒ 임석규


"대통령에게 '아이 많이 낳으라는 말만 하지 말고, 이미 낳은 자식들 잘 지켜주시라'고 전하고 싶어요."

한평생을 충남 태안에 살았던 최병학(70)씨는 태어나 처음 용산 땅을 밟았다. 대통령과 서울시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였다. 딸의 영정 사진을 들고 일대를 행진하면서는 "비에 젖는 게 마음이 아프다"며 두 손으로 여러 차례 딸의 얼굴을 닦았다. 그는 지난달 24일 화성 아리셀 화재 참사로 둘째 딸 최은미선(38)씨를 잃었다.

희생자 영정 사진 들고, 폭우 속 눈물의 행진
 

▲ 27일 오후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서 아리셀산재피해 가족협의회와 아리셀중대재해참사 대책위원회, 그리고 시민 300여 명이 기자회견을 열고 서울역 방면으로 행진했다. 유족들은 폭우가 내리는 중에도 떠나보낸 가족의 영정 사진을 붙든 채 걸었다. ⓒ 임석규


아리셀 참사가 발생한 지 34일째 되는 날인 27일 오후 4시. 아리셀산재피해 가족협의회(가족협의회)와 아리셀중대재해참사 대책위원회(대책위), 그리고 이들을 지지하는 시민들 약 300명이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 모였다.

유족들은 가슴에 아리셀 참사를 의미하는 하늘색 리본을 달고, '오늘도 안녕'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었다. 이는 며칠 전 김용균재단이 선물한 옷으로, '오늘 만났던 사람들을 내일도 무사히 만나길', '내일도 모두가 안녕한 삶이길'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유족들은 두 손으로 희생자들의 얼굴과 이름이 담긴 영정사진을 잡았다. 떠나보낸 가족의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울었다.

곧이어 열린 기자회견에서 김태윤 가족협의회 대표는 "저희는 지난 6월 24일 이후로 안녕하지 못하다. 억울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버티고 싸우고 있다"고 운을 뗐다. 이어 "책임자들을 구속수사해야 한다"며 "도급계약 운운하며 어떠한 교섭에도 임하지 않는 점, 개별 합의안을 바탕으로 유족들을 협박하는 점, 안전관리가 없었다는 점 등이 그 이유"라고 강조했다.

양한웅 대책위 공동대표는 "회사는 정말 나쁜 놈이다. 화성시, 경기도, 정부 역시 똑같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23명이 죽었지만 회사 대표, 노동부 장관, 화성시장, 경기도지사, 여야 국회의원, 대통령까지 모두 무관심하다. 권력에 미쳐있다"며 "이게 정상적인 나라인가"라고 일갈했다.
 

▲ 27일 오후 서울역 앞에서 아리셀 참사 희생자 고 김지현씨의 어머니지이자, 고 이향단씨의 이모인 지경옥씨가 시민들에게 전하는 편지글을 읽고 있다. ⓒ 임석규


기자회견을 마친 이들은 서울역을 향해 행진했다. 선두에 선 유족들 뒤로는 수많은 시민이 함께 했다. 그중 하나인 류호규(47)씨는 "행진에 참여하기 위해 경기도 용인에서 왔다"고 했다. 류씨는 "사실 저도 지난 2002년 일을 하던 중 손가락 3개가 잘리는 산재를 당했다"며 "매번 반복되는 산재 사고에 참담하다. 앞서 걸어가는 유족분들께 연대의 마음을 전한다"고 말했다.

유족들은 "아리셀 중대재해 참사 정부가 책임지라", "진상을 밝히고 재발 방지 대책 마련하라" 등의 구호에 맞춰 걸음을 옮겼다. 길을 지나던 한 시민은 자동차 창문을 내리고 이들을 향해 "파이팅", "힘 내세요"라고 응원을 전하기도 했다.

서울역에서 시민들 만난 유족

서울역에 도착한 오후 5시부터는 추모제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유족들은 수많은 시민에게 아리셀 참사를 알렸다. 고 김병철씨의 아내 최현주씨는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선 이유는 그들에게 죗값을 묻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최씨는 "제 남편은 아리셀 연구소장으로 일하며 2027년에 진행할 연구계획까지 세워 놓았을 정도로 회사에 최선을 다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회사는 참사 직후 사과도, 눈물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리셀 측은 김앤장(대형 로펌)을 선임한 이후에야 전화를 걸어 죄송하다고 했고, 빨리 합의하면 (보상금) 5천만 원을 더 주겠다고도 했다. 심지어 제 남편의 합의 제안서를 다른 고인의 유족에게 전달하기도 했다"며 "(회사는) 자기 잇속을 계산하기 전에 동료의 죽음에 함께 울었어야 했다"고 꼬집었다.

송성영 대책위 공동대표는 "(이번 참사로) 시민과 노동자의 생명, 인권, 노동권을 무시하는 윤석열 정부의 반인권적 정책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며 "강 건너 불구경하는 듯한 윤 정부의 대처에 진상조사와 진실 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아리셀 참사는 위장도급, 불법 파견이 불러온 예견된 집단 참사"라며 "▲ 이주노동자의 안전 대책 법제화 ▲ 사고 전조증상에도 안전 관리를 방치한 책임자 처벌 ▲ 정부의 관리 감독 강화 ▲ 민관합동 조사위원회를 통한 철저한 원인 규명 등으로 중대재해 참사 반복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발생한 참사로 아들 김용균씨를 잃은 엄마 김미숙씨도 힘을 보탰다. 김씨는 "아리셀 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어려운 이유는 정부의 안이한 태도가 한 몫 했기 때문"이라며 "국회는 정치적 득실을 논하는 대신 국민의 입장을 대변하라, 정부는 책임자들을 모두 구속수사하고 중대재해처벌법의 취지를 살려 그들에게 살인죄를 적용하라"고 주문했다.

아리셀 유족의 편지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 27일 오후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서 아리셀산재피해 가족협의회와 아리셀중대재해참사 대책위원회, 그리고 시민 300여 명이 기자회견을 열고 서울역 방면으로 행진했다. 유족들은 폭우가 내리는 중에도 떠나보낸 가족의 영정 사진을 붙든 채 걸었다. ⓒ 임석규


한편 이날 희생자 고 김지현씨의 어머니이자, 고 이향단씨의 이모인 지경옥씨는 시민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써오기도 했다. 아래는 지씨가 전해온 편지글 전문.

'저는 고 김지현 엄마, 고 이향단 이모입니다. 두 사람은 애지중지 기르던 외동아들, 외동딸이었습니다. 아리셀 참사로 애들을 보낸 지 한 달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아이들이 독가스에 질식하고 천도가 넘는 불길 속에서 몸부림치는 모습이 시도 때도 없이 떠오릅니다.

누군가는 시간이 약이라고 합니다. 허나 우리 유족들은 치유가 안 되네요.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죠. 당해보니 알겠습니다. 울분으로 가득 찬 가슴은 미어집니다. 아픕니다. 미칠 것 같습니다. 아리셀 대표, 본부장, 그놈들 죽이고 싶은 생각뿐입니다. 천 번을 죽여도 시원치 않을 인간들입니다.

이번 참사는 우리들만의 일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다른 누군가가 또 사고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이번 참사를 당한 분들 대부분이 코리안드림을 꿈꾸던 아직 젊은 한민족이라 불리는 동포들입니다. 언어와 생활 습관, 똑같은 김치를 담가 먹는 동포들입니다. 모든 생명은 똑같이 소중합니다.

우리는 알고 싶습니다. 23명의 소중한 생명이 왜 처참하게 죽어야 했는지? 왜 진상을 규명하지 않고, 왜 책임자를 처벌하지 않는지? 저는 세상을 바꿀 생각도 힘도 없습니다. 또 그렇게 조용히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 세상이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하나둘 바뀌어야만 하지 않을까요?

노동자들이 안심하고 일할 수 있게 대책위를 비롯해 여기 오신 여러분들 많이 도와주고 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 우리 다 같이 끝까지 싸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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