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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광산 유네스코 등재... 한국 대통령 잘 만난 일본

[김종성의 히,스토리] 일본 언론 "'강제노동' 문구 빼는데 양국 합의", 외교부 "사실무근"이라 했지만...

등록|2024.07.29 10:39 수정|2024.07.29 10:39

▲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일본 니가타현 사도 광산 출구에 28일 '세계문화유산 결정'이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다. 일본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노역 현장인 사도 광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면서 주변 박물관에 조선인 노동 관련 전시물을 설치하고 매년 노동자 추도식을 열기로 했다. ⓒ 연합뉴스


사도광산이 결국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됐다. 광산을 관할하는 사도시와 니가타현이 2006년 11월 일본 문화청에 세계유산 등재 신청을 제안한 이래로 무려 18년 만의 일이다.

이번에 등재가 성공한 것은 한국인 강제징용과 관련된 근대유산 부분을 제외하는 방법으로 신청을 수정한 결과다. 한국인 강제징용이 있기 전에도 일본인 부랑민들의 강제노역이 있었고 이로 인한 희생을 추모하는 '부랑자의 무덤'이 사도섬에 존재하지만, 지금 이런 부분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강제징용과 관련된 장소들을 제외하는 일본 정부의 결단만으로 이번 등재가 성공한 것은 아니다. 세계유산 등재는 세계유산위원회 21개 회원국 전체의 동의로 결정되는 게 관행이다. 한국도 그 21개국에 포함된다. 한국 정부의 결단도 있었기에 그 같은 컨센선스(전원동의) 방식의 등재 결정이 가능했다.

한국인 강제노역이 있었던 근대 시설을 뺐다고는 하지만, 사도섬 곳곳을 둘러보는 방문객들로서는 전근대 시설과 근대 시설을 명확히 구분하기 힘들 수도 있다. 일부 시설을 앞세워 등재를 성사시킨 뒤, 실제로는 전체 시설을 세계유산처럼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

근대 시설을 뺀다고 문제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는 점은 일본 정부의 태도에서도 반영된다. 근대 유산을 배제해 한국인 노동 착취와 아무런 관련이 없게 됐다면, 기시다 내각이 막판까지 윤석열 정부와 머리를 맞댄 이유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사도광산 전체를 하나로 봤기에 최종까지 한국의 협조를 구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이는 이번 등재 절차가 한국인 피해자와 유족들의 상처를 외면하는 방향으로 전개됐음을 보여주는 것이자, 한국 국민 전체를 농락하는 방식으로도 진행됐음을 보여준다. 윤석열 정부가 이런 농락과 무관하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윤석열 정부에 우호적인 일본 언론들의 보도를 볼 때도 그렇다.

'강제노동' 빼기로 합의했다는 일본... 외교부는 "사실무근"
 

▲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일본 니가타현 사도 광산 내부에 28일 모형이 설치돼 있다. 사도 광산 내부는 에도시대 흔적이 남은 '소다유코'와 근현대 유산인 '도유코'로 나뉜다. 사진은 소다유코 모습. ⓒ 연합뉴스


28일 자 <산케이신문> '조선반도 출신자의 사도광산에서의 엄혹한 노동환경을 상설 전시'는 "한국은 당초 조선반도 출신자의 강제노동이 있었다며 등재에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고 한 뒤 한국의 입장이 결국엔 바뀌었다고 말한다. "일본이 전쟁 중의 노동환경을 현지의 전시시설에서 설명하겠다고 표명하자 한국은 등재에 찬동했다"고 기사는 전한다.

일본은 사도광산의 노동환경이 열악했다는 점만큼은 인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강제노동이 있었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았다. 힘든 광산 노동은 있었지만, 강제노역은 없었다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

일본 언론은 이 부분에 관해 양국의 합의가 있었다고 보도한다. 28일 자 <요미우리신문>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록, 일·한이 타협'은 이렇게 전한다.

"한국은 당초 사도섬의 광산은 '전쟁 중에 조선반도 출신자가 강제노동을 당한 피해 현장이다'라며 반발하고 대응을 요구했다. 일본은 수면 밑에서 교섭해 강제노동이란 문구를 쓰지 않는 대신, 현지 시설에서 상설 전시를 하고 전쟁 중에 조선반도 출신자가 약 1500명 있었던 것과 노동환경의 가혹함을 소개하는 방안 등을 타진해 한국 정부가 최종 수용했다."

27일 자 <교도통신> 보도도 비슷하다. "일본은 전쟁 중의 가혹한 노동환경을 현지의 전시 시설에서 설명하겠다고 표명했다"라며 "조선반도 출신자의 강제노동이 있었다며 등재에 신중한 자세를 보였던 한국도 동의했다"고 전했다.

'강제노동'을 '가혹한 노동'으로 바꾸자는 기시다 내각의 제의를 윤석열 정부가 동의했다는 것이 일본 언론들의 보도다. 강제노동과 가혹한 노동은 얼핏 들으면 비슷할 수 있지만, 차원이 전혀 다르다.

광산의 노동환경이 원래 열악하기 때문에 '가혹한 광산노동'은 인권침해를 곧바로 연상시키기 힘들다. 그런 점에서, '가혹한 노동'은 피해자 및 유족과 한국 국민들을 속이기 위한 기만적 표현이나 다름 없다.

한국 외교부는 한국이 합의를 해줬다는 보도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28일자 보도들에 따르면 "전혀 사실무근"이라는 게 외교부 당국자의 입장 표명이다.

'강제노동' 언급은 빠져있는 전시
 

▲ 일본 니가타현 사도시 사도 광산 인근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이 28일 조선인 노동자 관련 전시물이 있는 새로운 전시 공간을 공개했다. 작은 전시실에 노동자 모집·알선에 조선총독부가 관여했음을 설명하는 패널 등이 설치됐다. 사진은 방문객이 조선인 노동 관련 전시를 보는 모습. ⓒ 연합뉴스


그런데 외교부 당국자의 말대로 일본 언론보도가 사실무근이고 한일의 실제 합의가 달랐다면, 등재 다음 날부터 일어난 상황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28일부터 사도시 아이카와향토박물관에서는 한국인 노동에 관한 전시가 시작됐다. 외교부 당국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전시는 한국 정부의 의사를 무시한 것이나 다름없다.

28일 자 <산케이신문> '조선반도 출신자의 사도광산에서의 엄혹한 노동환경을 상설 전시'는 "니가타현 사도시가 운영하는 아이카와향토박물관은 28일부터 조선반도 출신의 광산 노동자가 전쟁 중의 사도광산에서 위험한 작업에 종사한 비율이 높았던 것 등을 소개하는 패널이나 자료의 상설 전시를 시작했다"고 한 뒤 이렇게 전한다.

"전시에서는 쇼와 15~20년에 걸쳐 사도광산에서 일한 조선반도 출신자의 총수는 약 1500명이었던 것이나, 조선반도 출신자가 위험한 작업에 종사하는 비율이 높았던 것을 보여주는 데이터 등을 소개한다. 예를 들면, 낙반의 위험이 가까이 있는 착암 작업에는 쇼와 18년 5월 현재 150명이 종사했으며 그중 조선반도 출신자는 약 8할인 123명을 차지했다고 한다."

1940~1945년 기간에 한국인이 약 1500명 있었으며, 1943년에는 바위 뚫는 위험 작업에 종사하는 150명 중 80%가 한국인이었음을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여기 와서 고생했다는 정도의 설명만 제공하는 셈이다. 노예노동과 다를 바 없는 강제노동을 유사 사례가 많은 '혹독한 노동이민' 정도로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정부가 강제징용의 표기를 요구했고 다른 내용의 합의를 해준 적이 없다면, 위의 전시 내용은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까지 기만했음을 보여주는 증표다. 일본이 한국을 농락한 것이라면, 한국 외교부가 일본에 항의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 된다.

일본은 반인권적인 노예노동에 대해 일말의 사과나 반성도 없이 사도광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시켰다. 이 과정에서 윤석열 정부의 협조가 결정적이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일본이 2006년부터 추진된 일이 이제 성사됐다. 한국 대통령을 잘 만났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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