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까지 '그 사람다움'을 존중 받으며 살기
'집에서 죽겠다'는 일본 사회학자 우에노 치즈코와 주간보호센터 '이시이의 집' 대표를 보며
나의 죽음 입문서라고 한다면, 아마도일본 사회학자 우에노 치즈코의 <누구나 혼자인 시대의 죽음>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7년 전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심신의 여유가 생겼을 때 부모님 집에 내려와서 한 달 조금 넘는 시간을 보냈다. 기억 속 부모가 아닌, 나날이 새롭게 늙어가고 있는 부모의 모습을 눈앞에서 바라보며, 가슴 속 무언가 조금씩 무너져내렸다. 그 무너짐 속에서 손에 잡았던 책이 이 책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늙음, 치매, 죽음 등에 대해 여러 책들을 찾아 읽게 되었다. 결코 환하거나 밝지 않은 주제들을 부여안고 깊은 늪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무력감이 밀려올 때도 많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난 5월에 방영되었던 EBS 다큐프라임 <내 마지막 집은 어디인가>의 2부 '집에서 죽겠습니다'는 우에노 치즈코 특집이라고 해도 될 만큼 그녀의 활동을 밀착 취재하였다. 그리고 집에서 죽기를 선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왕진을 하며 마을의 노인들을 돌보는 의사 이야기, 해결할 수 없는 늙음의 문제를 삶으로 껴안는 주간보호센터 이야기 등 일본의 사례들이 소개된다.
작품의 제목 '집에서 죽겠습니다'에서는 꽤 무거운 결기같은 게 느껴진다. 인터뷰어는 치즈코에게 집에서 죽을 수 있는지를 묻는다. 이에 그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답한다. 이것이 중요한 질문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현실적으로 쉽지 않음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노인이 혼자 있으면 불쌍하다, 부모를 혼자 두는 건 불효이다. 독거노인은 병원이나 시설에 가야 한다 등의 상식은 20년 전의 상식이라고, 현재는 다른 선택지가 있다고 치즈코는 말한다. 그리고, 사는 방식과 죽는 방식을 노인 스스로 결정하는, '자립 노인'이 되기를 권한다.
병원에 있다가도 죽음이 가까워지면 집으로 모시던 우리 사회의 풍습은 이제 완전히 그 반대가 되었다. 우리 국민 10명 중 6명은 집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 죽기를 원하지만, 실제 사망자 10명 중 8명은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사망한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병원 사망률이 가장 높은 나라이다(출처 : '우리는 어떤 죽음을 맞게 될까', 김윤 서울대 의대 교수, 경향신문, 2023.10.4.).
집에서 돌봄 받으며 죽는 것, 어마어마하거나 염치없는 꿈은 아닐 텐데, 누가 뭐라 할세라 대다수가 서둘러 그 바람을 접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 저자 양창모는 가장 큰 이유로 의사가 환자를 찾아가는 시스템이 없는 현실을 꼽는다. 그리고 2019년부터 시작된 왕진시범사업을 이야기 하며, 낮은 왕진 수가를 현실화 하고 민간의료가 아니라 공공의료가 이 일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앞서 언급한 다큐에는 위암으로 한 달 시한부 판정을 받은 86세의 할머니와 그녀를 돌보는 83세의 할아버지가 등장한다. 시설은 싫다고, 남편 옆에서 죽고 싶다고 하는 할머니 옆에서 할아버지는 밥을 차리고 청소를 하고 시장을 본다. 백발단발의 할머니 얼굴은 어느 노인, 아니 어느 청년의 얼굴보다 웃음이 넘친다.
나갔다 들어오면서 침대에 할머니가 보이지 않자 할아버지는 "어, 당신 나갔어?"라며 둘러본다. 부엌에 있는 할머니를 확인하고는, "죽은 줄 알았네~"라며 웃는다. 구부정한 노인네 둘이 싱크대에 서 있는 뒷모습. 흥얼거리는 노래 소리. 서로 아픈 곳을 얘기하며 나누는 느린 대화와 몸짓, 불편하지만 평화롭게 그들은 그들의 늙어가는 일상을 지켜내고 있었다.
물론 이들이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데에는 왕진의사라는 존재가 있었다. 할머니가 통증이 다 없어졌다고 말하자 의사는 약을 줄여서 처방해준다. "집이 좋으시죠? 고양이도 있고 아버님이 맛있는 밥도 해주시고"라는 의사의 질문에 할머니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는 우리 집에 있는 게 좋아"라고 말씀하신다. 주름 자글자글한 얼굴에 웃음 한가득 머금고.
어느 할머니의 집에 왕진을 가서는 할머니가 침대에서 일어설 수 있도록 의료진들이 돕고, 일어서는 데 성공하자 웃으며 박수를 친다. 할머니는 입원하고 싶지 않아서 열심히 노력했다며 울먹인다. 웃음과 응원과 감동이 있는 작은 방에서 의사도 환자도 무기력해 보이지 않았다.
이들이 살고 있는 지역은 인구 약 25,000명의 도시이다. 이 도시에는 마을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왕진의사가 있고, '혼자가 되어도 괜찮아 다 같이 생각하자!'라는 구호로 주민 회의가 열린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도울 수 있는 '참견의 씨앗'을 가꾸어갈 방안들을 모색한다.
집에 사는 노인들이 낮 시간을 보내는 시설인 주간보호센터 '이시이의 집' 대표 이야기도 다룬다. 그는 이전에 다른 시설에서 일했었다. 그곳에서 중증 치매인들이 약으로 인간다움을 잃어버리는 모습, 목욕할 때 노인들이 옷을 벗고 수건을 걸친 채 복도에서 휠체어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며 고민이 시작됐다. 인생의 마지막을 이렇게 보내도 되는 걸까라는.
그 고민의 결과 그는 이시이의 집을 만들었다. 이곳 건물은 52칸의 툇마루로 이루어진 열려있는 구조이다. 그곳의 탁자에는 노인, 젊은이, 아이들이 뒤섞여 있다. 이 다양함과 어수선함이야말로 우리 삶의 핵심과 닿아있는 그 무엇이 아닐까 싶다.
나는 우리에게 주어진 '돌봄'의 과제가 깨어진 마을을 다시 조금씩 이어가는, 섬세하지만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발전과 성장에 내몰리느라 잃어버린 삶의 핵심을 찾아가는 여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늙음'이라는 것이 불편한 상실의 과정일 수 있지만, 생로병사는 부정할 수 없는 삶의 과정이다. 삶의 마지막까지 '그 사람다움'을 존중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선진사회'의 모습이 아닐까?
▲ 나의 죽음 공부 치즈코의 <누구나 혼자의 시대의 죽음>을 시작으로 나의 죽음 공부가 시작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죽음 공부란 삶을 배우는 것임을 느끼고 있다. ⓒ 이진순
그리고 이어서 늙음, 치매, 죽음 등에 대해 여러 책들을 찾아 읽게 되었다. 결코 환하거나 밝지 않은 주제들을 부여안고 깊은 늪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무력감이 밀려올 때도 많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난 5월에 방영되었던 EBS 다큐프라임 <내 마지막 집은 어디인가>의 2부 '집에서 죽겠습니다'는 우에노 치즈코 특집이라고 해도 될 만큼 그녀의 활동을 밀착 취재하였다. 그리고 집에서 죽기를 선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왕진을 하며 마을의 노인들을 돌보는 의사 이야기, 해결할 수 없는 늙음의 문제를 삶으로 껴안는 주간보호센터 이야기 등 일본의 사례들이 소개된다.
노인이 혼자 있으면 불쌍하다, 부모를 혼자 두는 건 불효이다. 독거노인은 병원이나 시설에 가야 한다 등의 상식은 20년 전의 상식이라고, 현재는 다른 선택지가 있다고 치즈코는 말한다. 그리고, 사는 방식과 죽는 방식을 노인 스스로 결정하는, '자립 노인'이 되기를 권한다.
병원에 있다가도 죽음이 가까워지면 집으로 모시던 우리 사회의 풍습은 이제 완전히 그 반대가 되었다. 우리 국민 10명 중 6명은 집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 죽기를 원하지만, 실제 사망자 10명 중 8명은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사망한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병원 사망률이 가장 높은 나라이다(출처 : '우리는 어떤 죽음을 맞게 될까', 김윤 서울대 의대 교수, 경향신문, 2023.10.4.).
집에서 돌봄 받으며 죽는 것, 어마어마하거나 염치없는 꿈은 아닐 텐데, 누가 뭐라 할세라 대다수가 서둘러 그 바람을 접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 저자 양창모는 가장 큰 이유로 의사가 환자를 찾아가는 시스템이 없는 현실을 꼽는다. 그리고 2019년부터 시작된 왕진시범사업을 이야기 하며, 낮은 왕진 수가를 현실화 하고 민간의료가 아니라 공공의료가 이 일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앞서 언급한 다큐에는 위암으로 한 달 시한부 판정을 받은 86세의 할머니와 그녀를 돌보는 83세의 할아버지가 등장한다. 시설은 싫다고, 남편 옆에서 죽고 싶다고 하는 할머니 옆에서 할아버지는 밥을 차리고 청소를 하고 시장을 본다. 백발단발의 할머니 얼굴은 어느 노인, 아니 어느 청년의 얼굴보다 웃음이 넘친다.
▲ 한 달 시한부 판정을 받은 할머니 어른의 얼굴에 이토록 웃음이 가득한 것을 내가 본 적이 있었던가 싶다. ⓒ ebs
나갔다 들어오면서 침대에 할머니가 보이지 않자 할아버지는 "어, 당신 나갔어?"라며 둘러본다. 부엌에 있는 할머니를 확인하고는, "죽은 줄 알았네~"라며 웃는다. 구부정한 노인네 둘이 싱크대에 서 있는 뒷모습. 흥얼거리는 노래 소리. 서로 아픈 곳을 얘기하며 나누는 느린 대화와 몸짓, 불편하지만 평화롭게 그들은 그들의 늙어가는 일상을 지켜내고 있었다.
물론 이들이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데에는 왕진의사라는 존재가 있었다. 할머니가 통증이 다 없어졌다고 말하자 의사는 약을 줄여서 처방해준다. "집이 좋으시죠? 고양이도 있고 아버님이 맛있는 밥도 해주시고"라는 의사의 질문에 할머니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는 우리 집에 있는 게 좋아"라고 말씀하신다. 주름 자글자글한 얼굴에 웃음 한가득 머금고.
어느 할머니의 집에 왕진을 가서는 할머니가 침대에서 일어설 수 있도록 의료진들이 돕고, 일어서는 데 성공하자 웃으며 박수를 친다. 할머니는 입원하고 싶지 않아서 열심히 노력했다며 울먹인다. 웃음과 응원과 감동이 있는 작은 방에서 의사도 환자도 무기력해 보이지 않았다.
이들이 살고 있는 지역은 인구 약 25,000명의 도시이다. 이 도시에는 마을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왕진의사가 있고, '혼자가 되어도 괜찮아 다 같이 생각하자!'라는 구호로 주민 회의가 열린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도울 수 있는 '참견의 씨앗'을 가꾸어갈 방안들을 모색한다.
집에 사는 노인들이 낮 시간을 보내는 시설인 주간보호센터 '이시이의 집' 대표 이야기도 다룬다. 그는 이전에 다른 시설에서 일했었다. 그곳에서 중증 치매인들이 약으로 인간다움을 잃어버리는 모습, 목욕할 때 노인들이 옷을 벗고 수건을 걸친 채 복도에서 휠체어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며 고민이 시작됐다. 인생의 마지막을 이렇게 보내도 되는 걸까라는.
그 고민의 결과 그는 이시이의 집을 만들었다. 이곳 건물은 52칸의 툇마루로 이루어진 열려있는 구조이다. 그곳의 탁자에는 노인, 젊은이, 아이들이 뒤섞여 있다. 이 다양함과 어수선함이야말로 우리 삶의 핵심과 닿아있는 그 무엇이 아닐까 싶다.
나는 우리에게 주어진 '돌봄'의 과제가 깨어진 마을을 다시 조금씩 이어가는, 섬세하지만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발전과 성장에 내몰리느라 잃어버린 삶의 핵심을 찾아가는 여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늙음'이라는 것이 불편한 상실의 과정일 수 있지만, 생로병사는 부정할 수 없는 삶의 과정이다. 삶의 마지막까지 '그 사람다움'을 존중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선진사회'의 모습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브런치에도 올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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