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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아래 마음 둘 곳 없어 숨어든 산속 생활

임실 백이산과 성수산의 돈학정 역사 문화 이야기

등록|2024.07.31 13:54 수정|2024.07.31 13:54

▲ 임실 백이산 ⓒ 이완우


임실 백이산(754m)은 호남정맥의 한 갈래인 성수지맥의 두만산에서 나왔다. 그리 우람하지는 않지만, 계곡은 자못 깊숙하고 산봉우리의 맵시가 번듯하다. 이곳은 570년 전 하늘 아래 마음 둘 곳 없어 숨어든 한 충신의 산속 생활 터전이기도 했다.

세조에게 단종이 폐위(1455년)되자, 하늘이 무너지듯이 여긴 전라도 도사 송경원(1419~1510)은 그의 재종형(6촌 형)인 형조참판 송간(1410~1480)과 함께 영월로 달려갔고 계룡산 동학사에서 김시습(1435~1493) 등과 모여 단종의 3년 상까지 모셨다. 그 후 송간은 남해 바닷가 고을인 흥양(현 고흥) 마륜의 산속으로, 송경원은 임실 백이산의 북쪽 버드나무골에 은둔하였다.

송경원은 백이산 버드나무골 개구리 평전의 어름샘 옆에 숨어 지낼 터를 잡았다. 계곡은 숲 그늘이 말끔하여 터를 다져서 세 중방 정자를 얽었고, 띠 잘라 처마를 두르고 돌 포개어 섬돌을 쌓고 대쪽 걸어 지게문 만들었다. 해마다 백이산 자락에서 멧살구와 진달래는 저절로 무성하였고, 복령과 창출을 캐며 죽순과 고사리로 먹거리를 하여 산속에 숨은 한 몸이 지낼 만하였다.
 

▲ 임실 백이산 버드나무골 ⓒ 이완우


여름 무더위가 한창인데 입추 절기를 일주일 앞둔 계절에, 570년 전 임실 백이산에 은둔한 송경원의 유적을 찾아 버드나무골에서 성수산 왕방리 사지목까지 탐방하였다. 백이산 계곡의 제법 너른 공간은 얼마 전까지 염소를 키웠다는 목장 시설로 남아 있었고 잡초와 억새가 키를 넘었다.

단종 임금을 향한 충절을 지키며 임실 백이산과 흥양 마륜에 은거하는 송간과 송경원은 은둔 20년에 되어가는 어느 날에 편지(1474년)를 주고받는다. 이 편지에는 불의한 세상에 마음 둘 수 없는 자신들의 신념과 늙고 병들어가는 현실이 세월 무상감으로 담겨 있었다.

오랫동안 뜻을 함께하며 교류하였던 김시습에 대한 염려와 형제의 우의가 가득한 한문 서간을 한글로 풀이한 내용을 펼쳐보니 수백 년 전 선비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재종 아우 돈학 경원에게

호산(여산)에서 지내던 이후로, 뿔뿔이 남으로, 북으로 헤어져 속절없이 꿈속에서 헤매었구려. 내 까라짐이 이미 지나친데 자넨들 어찌 자연의 섭리에서 벗어날 수 있으랴.

내 병에 얽히어 근래에 도무지 이불 속 세월이라, 스스로 돌아보건대 이 몸 위태롭고 고단함이 이미 더하네. 언짢게도 죽지 못했기에 병 따위는 두려움이 되지 못하나, 아이들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망령되이 약 숟갈을 일삼으니 참으로 괴로울 수밖에.

바깥 세상 일은 까마득하여 짚이는 바 없을 뿐더러 듣고 싶지도 않으며 보고 싶지도 않은데, 김시습 친구가 실성했다 함에 이르러서는 그 상황을 종잡을 수 없이 안타깝네. 만일 「떳떳하고 바름」의 차원에서 논의된다면 모르거니와 김시습은 그 몸가짐이 우뚝이 세상 밖에서 깨끗하여 앙금이 없고 세상 사람보다야 몇 결이나 높지 않은가?

우리 같은 사람은 오히려 이 세상에 묶여서 현실 추구나 다름이 없으니 마땅히 무엇 때문에 사는 존재라고 이를 것인가? 아들이 마침 호산(여산)으로 가기에 줄잡아 글월로 부치면서 오로지 회답을 기다릴 뿐이네.

 

▲ 임실 성수산 명덕봉과 유적비 ⓒ 이완우


흥양 마륜에 은거하던 송간은 아들이 고향인 호산(여산)에 다녀올 일이 있자, 임실 백이산에 은거하는 아우 송경원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송경원은 백이산 버드나무골 정자 돈학정에서 그리운 재종형에게 답장을 썼다.

재종형 서재에게

뜻밖에도 재당질(7촌 조카)이 찾아와서 과분한 글월 받드니 위로받는 기쁨을 어찌 다 이르겠습니까? 제가 몸이 고르지 못하고 행동이 뒤틀려 제풀에 놀라 괴로움으로 이어가려니, 언짢게도 「죽지 못하는 비유」가 비록 이 아우처럼 고집스러운 사람에게도 그 마음이 마찬가지이겠습니다.

그러나 장주((莊周))의 얼굴이 한 죽살이를 넘어서는 달관이 아니고서야 이토록 쓰라린 말이 있어, 나를 알아주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것을 듣게 하여 어찌 그 뜻을 슬프게 하지 않겠습니까?

김시습 이 친구가 실성함을 「깨끗하여 앙금이 없다」고 이르는 바는 다 이것이 지당한 이론이겠습니다. 이 친구의 타고난 바탕이 우뚝하여 오늘날 몸가짐이 정말 그토록 사람보다 지나침이 이렇습니다. 기자(箕子)의 거룩함으로서도 오히려 실성함이 있었기에 「미치광이」 이 낱말은 천고의 좋은 명제(命題)이겠습니다. 다시 어찌 떳떳하고 바른 도리 여부로 의논하겠습니까?

이 아우는 음식이 여전하기에 이제까지도 힘들게 살아 사람의 도리를 회복함이 없이 다만 한 산수에서 몸을 둘 뿐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로 멀리 뜻을 보내면서 한테 지내는 심정이 다그쳐 우러러 느낍니다. 이 뒤에 말씀이나 소식이 오직 여산 겨레붙이 왕래 편지 있다손 치더라도 아픈 세월에 다시 한 글월을 얻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종이 앞에서 이렇듯이 있노라니 섭섭한 정이 그득합니다. 

 

▲ 임실 성수산 돈학정 ⓒ 이완우


수십 년 동안 은거하며 마음을 기대었던 재종형 송간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송경원은 임실 백이산에서 30년을 더 홀로 은거한다. 지난한 세월이었다. 송경원은 백이산에서 은거한 50년 넘는 세월, 성수산에 때때로 왕래한 것으로 보인다.

송경원은 어린 시절에 성수산 아래 왕방리의 사지목에 살았었다. 성수산 사지목 가까운 은적동에 한때 송간의 동생인 송시 송희 현감 형제가 송경원의 주선으로 거처하면서, 고갯길을 넘어 상이암을 오갔었다.

몇 줄의 건조한 역사 기록 뒤편에는 의미 있는 역사적 사실이 그늘로 상당히 잠겨 있다. 임실 성수산에서 8km 거리인 장수 산서면 오산리에 단종비 정순왕후(1440~1521)의 부친인 송현수(?~1457)의 부조묘가 있다. 이 지역에는 정순왕후가 성수산 상이암을 다녀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이어져 온다.

송경원은 임실 백이산에서 50년 넘게 은둔 생활을 하였고, 임실 성수산 왕방리 명덕봉 아래에 있는 그의 묘소는 500년 풍상의 세월을 견뎌왔다. 명덕봉 아래 사지목에는 송경원 재실과 유적비가 있으며, 백이산에서 송경원이 지었던 정자 돈학정은 송경원 재실 앞 개울가로 옮겨와(1939년) 세워졌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살았던 역사적인 삶의 현장과 산골짜기 풍경에서 수백 년 전 역사가 현실처럼 생명력 푸르게 살아있음을 숙연하게 확인하였다.
 

▲ 임실 백이산 성수산 개요도 ⓒ 이완우

덧붙이는 글 여산송씨원윤공파 지장록礪山宋氏元尹公 誌狀錄(1992)과 송병수(1919~2002, 전 순천농업전문대 국어과 교수)의 번역본을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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