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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립준비청년 손자영이 <열여덟 어른> 캠페이너가 되기까지

등록|2024.08.01 17:01 수정|2024.08.01 17:41
이 기사는 아름다운재단의 자립준비청년 캠페인 <열여덟 어른>의 손자영 캠페이너가 지난 7월 31일 열린 '북토크' 행사에서 발제한 내용을 바탕으로 그의 삶과 활동을 3인칭 시점에서 작성한 것이다.[편집자말]
자립준비청년: 아동양육시설, 그룹홈, 가정위탁시설 등에서 생활하다가 만 18세(원할 경우 만 24세까지 연장 가능)가 돼 시설에서 나와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청년을 말한다. 이전에 '고아(孤兒)', 이후 '보호종료아동'이라는 용어로 쓰였다. 현재엔 능동적인 주체의 의미를 담아 '자립준비청년'이라는 용어가 쓰인다.

지난 2001년부터 자립준비청년의 학업과 생활을 지원해온 아름다운재단은 '열여덟 어른' 캠페인을 꾸준히 전개하며 실질적인 자립 정보 공유와 인식개선 등의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아름다운재단이 진행하는 다각도의 자립준비청년 지원사업 및 캠페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름다운재단 홈페이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어린 자영이 느꼈던 아픔들
 

▲ 어린 시절의 자영과 보육원 아이들 ⓒ 아름다운재단 제공


자영의 첫 기억은 4살 무렵의 기억이다. 그런데 그 기억이 꽤나 아픈 기억이다. 4살의 자영은 "내가 엄마라고 여기는 사람이 왜 다른 친구의 엄마가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큰 충격을 받아 많이 울기도 했다.

어릴 적에 놀이공원에 놀러가는 것도 즐겁지 않았다. 보육원 아이들과 함께 놀이공원에 가야 했는데 그때마다 사람들이 쳐다봤다. 옆에선 엄마와 아빠 손을 잡고 신난 아이가 지나 다녔지만, 자영과 친구들은 두 줄로 서서 다녀야 했다. 어린 자영은 남들과 다른 모습의 자신을 깨달았다.

자영은 동화책이나 만화책을 보면서 위로를 얻었다. 콩쥐, 신데렐라, 캔디 같은 캐릭터들이 자영의 처지와 비슷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들에게 건네는 자영의 위로는 사실 자영 자신이 받고 싶었던 위로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기 전까지 자영은 보육원에서 관심을 받기 위해 '꼴통'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자영은 커 가면서 점점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되었다. 이 역시 관심과 사랑을 받기 위한 일종의 전략이었다. 열심히 공부한 덕에 보육원 밖의 학원을 다닐 기회도 얻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영이 두려워하던 일이 생기고 말았다. 학원 친구들이 자영이 보육원에 산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너 언덕 위의 하얀 집(보육원)에서 산다며?"

자영은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6학년이었던 당시의 자영은 함께 학원에 다니던 보육원 친구와 같은 도시락을 먹는다는 걸 친구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도시락을 챙겨 주신 보육원 선생님의 마음을 저버리고 싶지도 않았다. 학원에서도, 보육원에서도 도시락을 먹을 수 없던 자영은 화장실에서 도시락을 먹어야 했다. 보육원에서 지낸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학원이 끝나면 보육원까지 전력 질주해서 뛰어가는 일도 자주 있었다

"가장 빨리 보육원을 나가겠다"

중학생이 된 자영은 보육원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다녔다. 비슷한 환경에서 지내는 친구들과 학교 생활을 하니 이전처럼 놀리던 친구들로부터 시달릴 일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청소년이 된 자영에게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왜 나는 보육원에서 살아야 하는 걸까? 왜 하필 나일까?"

보육원에서는 마치 군대처럼 정해진 시간표대로 지내야 했다. 오전 6시에 기상하고 기도를 한다.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하고 학교에 간다. 보육원으로 돌아오면 정해진 시간만큼 자유 시간을 보내고 정해진 시간에 불을 끄고 자야 한다. 이 생활이 매일 반복된다. 물론 보육원 아이들이 안정되게 생활하도록 할 방침이었음을 자영은 알았다. 하지만 그걸 알았다고 해서 그가 느꼈던 답답함이 해소되진 않았다.

고등학생이 된 자영은 목표를 하나 세웠다. 그가 지내던 보육원을 가능한 한 빨리 나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됐을 때 대학에 진학할지, 직장에 들어갈지 고민하던 자영은 취업하면 보육원을 빨리 나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선배들로부터 전해 들었다. 결국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기로 결정한 자영은 고3 여름방학에 보육원을 나갈 수 있었다.

너무나 힘들었던 직장 생활

보육원을 일찍 나와 직장을 구하면 행복한 삶을 살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보육원에서 지낼 때에는 정해진 틀 안에서 생활했지만, 성인이 된 자영은 모든 것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져야 했다. 공과금을 어떻게 내야 하는지, 월급의 어느 정도를 적금에 부어야 하는지, 퇴직금 제도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알아내야 했다.

공장에서의 일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오전과 오후, 야간의 3교대 근무를 하니 몸이 많이 망가졌다. 자립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스스로를 많이 괴롭혔다. 일하는 시간을 빼고는 하루 종일 잠만 자기도 했다. 삶이 점점 무기력해졌다.

직장 사람들이 무심코 던지는 말에 상처받기도 했다. "부모님은 뭐 하시니?"라고 누군가 물어보면 부모님이 없다고 대답해야 했다. 그러면 "부모님이 없다고?"라는 질문이 되돌아왔다. "명절에 고향에 가냐"는 질문에도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난처했다.

'열여덟 어른' 캠페인의 캠페이너가 되다
 

▲ 자영은 2020년부터 자립준비청년 활동가로서 <손자영 프로젝트>를 이어오고 있다. ⓒ 아름다운재단 제공


직장을 그만둔 이후 자영은 자립준비청년들이 이끄는 캠페인 '열여덟 어른'에 대해 알게 됐다. 이 캠페인에는 또 다른 자립준비청년인 신선씨가 참여하고 있었다. 자영은 그와 함께 잠시 일하며 큰 인상을 받았다. 본인이 살아온 삶을 감추지 않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모습 때문이었다. 그는 자영에게 '열여덟 어른' 캠페인에 본격적으로 참여해볼 것을 제안했다. 동정해야 할 이미지가 아니라 당당하고 멋진 이미지로 일할 수 있다면 해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자영에게는 '열여덟 어른' 캠페인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다. "보육원에 살았다는 이유로 왜 차별과 편견을 경험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답하고 싶었다. 자영은 자립준비청년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사회에 뿌리내리는 것에 영화, 드라마와 같은 미디어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했다.

이미지를 왜곡하는 미디어

손자영 캠페이너는 고아, 보육원, 자립준비청년 등에 대한 부정적이고 우울한 이미지가 미디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한다.

자영에게는 TV를 볼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는 순간이 많았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신과 비슷한 환경을 가진 '고아' 캐릭터들이 잘못을 많이 저질렀기 때문이다. 이들은 도둑질하거나 불량한 청소년, 혹은 못된 사채업자나 회사대표로 묘사된다. TV를 보던 자영이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보육원에서 자란 사람들에 대한 편견은 대중 매체를 통해 재생산되고 있었다.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불합리한 상황을 겪거나 폭력적인 말을 듣는 이들도 있었다. 자영의 한 친구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사장님이 본인의 등기부 등본을 보고 "오늘부터 일을 같이 못할 것 같아"라는 통보를 들었다. 또 다른 친구는 직장에서 갈등이 벌어졌을 때 "고아 XX처럼 그런다니까"라는 말을 들었다.

자영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사람들은 왜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할까?"

자영의 답은 이랬다.

"사람들이 실제로 보육원에서 자란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이야."

온라인 인식조사 기업 닛픽(Nitpick)은 2019년에 온라인 사용자를 대상으로 '고아'라는 단어에 관해 이미지 조사를 실시했다. 조사에 따르면, 사용자들은 대중 매체에서 묘사하는 고아 캐릭터 때문에 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졌다고 답했다. 자영은 대중매체가 왜곡하는 이미지를 바꾸고 싶었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고아가 나쁜 사람이 되어가는 현실에 저항하고 싶었다.

이미지 왜곡의 증거들

아름다운재단 '열여덟 어른' 캠페인의 당사자 캠페이너로 활동하는 손자영 캠페이너는 자영은 대중 매체에 등장하는 고아 캐릭터들을 일일이 찾았다. 노력 끝에 40여 개의 사례를 발견했다. 사례들을 분석해 보니 미디어에는 고아 캐릭터를 그려내는 일종의 공식이 있었다. 그 공식은 다음과 같다.

사이코패스, 범죄, 배신, 음모 등과 연관된 '악인' 혹은 '범죄자'
야망을 품은 '야심가'
누명을 써 앙갚음하려는 '복수파'
주변에 헌신만 하며 '비현실적으로 긍정적인 인물'
불쌍함을 유발하는 '동정의 대상'


이 공식에서 벗어나는 평범한 이미지의 캐릭터를 찾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미디어는 고아라는 소재를 자극적인 방식으로 가공해 유통하고 있었다.

고아에 대해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는 대사는 제작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자영의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의 대사들이다.

"어쩌다 남자 잘 만나서 팔자 핀 고아 주제에" - <백년의 유산>, MBC

"내 새끼들과 똑같이 키우는 것은 못해. 내 새끼들과 똑같이 입고 먹고, 나 그 꼴은 못 봐" - <태풍의 신부>, KBS2

"너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천애고아 아니냐. 어차피 부인 있는 나랑 놀아났으니 불륜하는 너도 쓰레기다" - <해피시스터즈>, SBS

"왜 선생님도 제 말은 안 믿어요? 제가 엄마 없는 고아라서?" - <이태원 클라쓰>, JTBC

"넌 나쁘고 모자란 애야. 그래서 버려진 거야" - <부암동 복수자들>, tvN

"무슨 일이 생겨도 도움 줄 부모조차 없는 아이들" - <가면의 여왕>, 채널A


대중 매체가 생산하는 이러한 언어는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안기고 있었다. 자영은 미디어가 그릇되게 만들어 온 고아의 이미지가 어떤 것인지 알리고 고치기 위해 2020년부터 지난 4년 간 꾸준히 노력해왔다.

4년 간의 활동을 한 권의 책에 담다
 

▲ 책 <나 손자영 열여덟 어른>. 자영이 이끌어 온 미디어 인식개선 캠페인의 여정과 결과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 아름다운재단


손자영 캠페이너는 아름다운재단 <열여덟 어른> 캠페인의 당사자 캠페이너로 미디어 인식개선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 4년 간의 과정을 한 권의 책에 담았다. <나 손자영 열여덟 어른>이라는 제목의 책이다. 이 책으로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하기도 했다.

<나 손자영 열여덟 어른>은 자립준비청년 미디어 인식개선에 대한 당사자와 대중의 메시지를 담아, 미디어 생산자에게 보내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다. 지난 4년 간의 여정을 넘어, 당사자와 대중이 함께 만든 변화의 과정이 수록되어 있다. 곧 국내 150여 곳의 드라마/영화제작사에 책을 배포할 예정이다.
 

발제하는 손자영 활동가31일 열린 <열여덟 어른> 북토크 행사에서 손자영 활동가가 발제하고 있다. ⓒ 윤범기


어릴 적에 드라마를 보던 자영은 고아 캐릭터들을 볼 때마다 어깨를 움츠려야 했다. 그들은 복수를 위해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 쉽게 남을 짓밟았다. 온갖 폭언에 시달리는 불쌍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TV 속의 '가짜 고아'가 저지른 잘못은 진짜 고아인 내가 한 것처럼 느껴졌고, '가짜 고아'가 들은 욕은 진짜 고아인 내가 들은 욕처럼 느껴졌다.

"너희는 그렇지 않아. 미디어에서 그려지는 모습과 너희는 전혀 달라."

자영은 이 말을 진심으로 듣길 바랐다. 누군가가 자영에게 이 말을 해 주길 바랐다. 그 말이 듣고 싶었던 만큼 스스로에게 수없이 이 말을 되뇌었다.

이제 자영은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고아와 자립준비청년에 대한 편견에 맞서는 캠페이너가가 됐다. 자영이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을 다른 누군가에게해주는 사람이 된 것이다. 자영이 쓴 책의 마지막에는 이런 소망이 담겨 있다.

"다름이 차별로 그려지지 않기를. 당사자들이 용기를 내지 않아도 괜찮은 사회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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