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나이 80, '딸만 넷' 엄마의 마음은 이렇습니다
갑자기 쳐들어온 딸, 그래도 반가운 이유... 다 잘 사는데도 늘 반찬 걱정부터 합니다
친정 엄마라는 단어는 그 말만 들어도 마음이 울컥해 온다. 아마도 나 자신의 근원이 어머니라서 그렇지 않을까 미루어 짐작을 해 본다. 아들 선호 사상이 만연했던 1970년대 시기, 나는 어쩌다 딸만 넷 낳은 엄마였다.
셋째만 낳고 그만 낳으려 했지만 시어머니 권유에, 터울이 8년 차이인 막내를 낳았다. 딸이었다(실은 그때 시댁에서 딸만 낳았다며 대놓고 차별을 해 내심 상처를 많이 받았다. 그래서 딸들을 더 잘 키우려고 노력했던 것도 있다).
지금은 모두 내 곁을 떠나 결혼하고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네 딸들. 그래도 내 마음 안에는 언제나 딸 가족들의 근황이 궁금하다. 궁금하긴 하지만 그때마다 매번 연락한다거나 사생활을 속속들이 다 알려고 하지는 않는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저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는 일이니까.
요즘은 세상 속에 사는 것이 너나 할 것 없이 힘들고 피곤하다. 그저 엄마는 딸들이 무탈하게 잘 살기를 기도할 뿐이다. 가족이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음속에 늘 보이지 않는 어떠한 끈과 연결되어 있어 세심하게 촉각을 곤두 세우며 살고 있다.
부모 자식의 관계란 참, 생각할수록 묘한 것 같다. 모든 사람 관계가 그러하듯 부모 자식이라도 서로의 사생활을 관여하지 않아야 한다. 다만 수고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하며 위로와 응원을 해주는 쪽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딸이 온다는 소리에 제일 먼저 한 생각
며칠 전엔 갑자기 서울 사는 셋째 딸이 방학한 손자를 데리고 군산 친정으로 내려왔다. 출발하면서 내려온다고 연락을 해왔다. 덥다고 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다. 사실 여름이면 사람이 많이 모일수록 더 덥긴 하겠으나, 그래도 만나서 얼굴 보며 때때로 충전을 하고 그 에너지로 남은 일상을 살아내는 것이다.
어느 날부터인지 몰라도 딸들이 하는 말에 이유를 묻지 않는다. 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겠지 하고 마음을 내려놓으면 편안해진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모두 똑똑하고 현명한 것 같다. 자꾸 구속하려 들면 서로 마음만 불편할 따름이다. 나는 딸에게 "그래, 조심히 내려오렴"이라고만 하고 전화를 끓었다.
친정이란 마음의 쉼터 같은 곳이다. 내가 그랬으니. 나도 예전에 경험했기에 그 마음을 안다. 딸들은 때로는 지치고 힘들 때 잠깐만이라도 부모 곁에 와서 엄마 밥 먹으며 쉬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근심 걱정 다 내려놓고, 남이 해 주는 밥을 먹으며 세상 속에서 아팠던 마음을 조금이라도 치유받고 싶을 것이다.
매번 만나도 반가운 것이 가족이다. 딸이 온다는 소리에, 엄마인 나는 그때부터 무얼 만들어 먹이고 무슨 반찬을 만들어 보내야 할까 그 생각부터 한다.
딸이 집에서 살림하고 가사 노동만 하는 가정주부 같으면 사서 먹든 해먹든 알아서 하라고 할 텐데, 딸은 여전히 워킹맘에 워낙 일이 많아 종종 대며 바쁘게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늘 딸이 뭘해서 밥을 먹을까, 반찬은 괜찮을까 혼자서 딸네 밥상을 염려하고 있다. 누가 알면 '걱정도 팔자'라는 말을 할듯하다.
요즘은 고구마 순 김치 담가 먹는 철이다. 김치도 때에 맞추어 담가 먹어야 맛있다. 고구마 순 김치도 먹어야 할 때가 있다. 조금 있으면 질기고 맛이 줄어든다. 시장에 나가 고구마순 한 박스, 깻잎 한 박스, 열무 한 단 얼갈이배추 한 단을 사다가 놓으니 마치 김장하듯 푸짐하다.
혼자서는 힘들겠지만 남편이 옆에서 많이 도와주니 한결 수월하다. 고구마 순은 껍질 벗기는 일이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런 이유에서 바쁜 사람들은 집에서 고구마 순 김치 담가 먹을 엄두를 못 낸다.
다른 방법으로는, 반찬을 파는 집에서 사다가 먹으면 되겠지만 나는 지금까지 반찬을 사다 먹는 게 익숙하지 않다. 나중에 내가 움직이지 못할 때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내 손으로 만들어 먹을 수 있어 얼마나 감사한지.
몇십 년을 김치 담그고 가족들 밥 해 먹고 살아왔으니 김치 담그는 일도 순식간에 해 낼 수 있다. 무슨 일이든지 오래 하다 보면 손에 익어 일의 속도가 빠르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이제는 몸에 신호가 온다. 나이는 못 속이는가 보다. 피로도 빨리 오고 자꾸 편하고 싶으니, 어쩔 수 없는 나이 든 사람인 건가.
며칠 후엔 서울 병원을 예약해 놓았다. 몇달 전 내가 일상생활을 하다가 무릎인대가 찢어지는 일이 생겨서 치료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둘째 딸네도 가져다주려고 넉넉히 담갔다.
막내딸은 결혼하고 여태껏 내 반찬을 한 번도 가져다 먹지 않았다. 막내 사위가 요리도 잘하고 음식을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어서기도 하지만, 완전히 서울 사람인지라 젓갈이 들어간 전라도 김치는 입맛에 잘 맞지 않는다고 하니 도리가 없다.
고구마 순 김치, 깻잎김치, 열무김치까지... 김치를 종류별로 담가 놓으니 마치 내가 부자가 된 듯 마음이 흐뭇하다. 그새 도착한 딸이 맛있다고 좋아해 주니 더 기분이 좋다.
고추조림도 하고 잔 멸치 볶음도 하고 반찬들을 만들어 짐 싸서 들려 보내고 나니 얼마나 마음이 홀가분한지. 해야 할 숙제를 마친 느낌이다. 친정엄마란 언제나 딸들 밥상 걱정을 하고 그렇게 세월을 엮으며 사는 것일까.
내 삶 전부였던 딸들... 생의 시간이 줄어드는 요즘
지금 네 딸은 각각의 인생을 잘 살고 있다. 지금은 모두 결혼해서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살고 있어 그저 감사할 뿐이다. 큰 딸은 1990년도 미국 유학을 간 후 거기서 자리잡았고, 둘째 딸도 대학 졸업 뒤 회사를 차려 대표를 하고 있으며, 셋째 딸은 과외와 프리랜서 업무를 병행하고 있다. 늦게 낳은 막대딸도 대학 졸업 뒤 지금은 한 회사에서 실장으로 근무 중이다.
며칠 후면 뉴욕에 사는 큰 딸도 한국 우리집에 온다는 연락을 받았다. 딸만 넷 친정 엄마인 나는 생각이 깊어진다. 내가 딸들에게는 어떤 엄마로 기억될지 잘 모르겠다. 어느 부모나 마찬가지겠지만, 나 역시 딸들을 위해 지방에서 수없이 많은 날 반찬을 만들고 해 나르며 자녀 교육을 시켰다.
딸들이 어떤 마음일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게 딸들은 나의 삶 전부였고 그 자체로 보람이었다. 네 딸이 모두 결혼하고 난 지금, 나는 친정 엄마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응원하는 마음 뿐, 엄마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생각도 든다
다만 1944년생인 데다 이제는 80이란 나이가 넘어 건강이 예전 같지 않아 걱정이다. 반찬 정도야 아직 해 줄 수 있어 다행이지만, 나이가 더 들어가는 내 몸이 앞으로 어떤 상황이 될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가 없다. 내 생의 시간이 줄어드는 나이, 내가 살아 움직일 수 있는 한 딸들에게 따뜻한 친정엄마로 기억되도록 살고 싶다.
내 등에 '네 딸들'이란 사랑의 짐이 없었다면 나는 세상을 지금 같이 바르게 살지는 못 했을 것이다. 내게 그렇듯, 딸들에게 나 또한 좋은 엄마로 기억되길 희망해 본다.
셋째만 낳고 그만 낳으려 했지만 시어머니 권유에, 터울이 8년 차이인 막내를 낳았다. 딸이었다(실은 그때 시댁에서 딸만 낳았다며 대놓고 차별을 해 내심 상처를 많이 받았다. 그래서 딸들을 더 잘 키우려고 노력했던 것도 있다).
요즘은 세상 속에 사는 것이 너나 할 것 없이 힘들고 피곤하다. 그저 엄마는 딸들이 무탈하게 잘 살기를 기도할 뿐이다. 가족이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음속에 늘 보이지 않는 어떠한 끈과 연결되어 있어 세심하게 촉각을 곤두 세우며 살고 있다.
부모 자식의 관계란 참, 생각할수록 묘한 것 같다. 모든 사람 관계가 그러하듯 부모 자식이라도 서로의 사생활을 관여하지 않아야 한다. 다만 수고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하며 위로와 응원을 해주는 쪽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딸이 온다는 소리에 제일 먼저 한 생각
▲ 미국에 있는 큰 딸이 한국에 잠시 왔을 때 함께 찍은 사진. ⓒ 이숙자
며칠 전엔 갑자기 서울 사는 셋째 딸이 방학한 손자를 데리고 군산 친정으로 내려왔다. 출발하면서 내려온다고 연락을 해왔다. 덥다고 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다. 사실 여름이면 사람이 많이 모일수록 더 덥긴 하겠으나, 그래도 만나서 얼굴 보며 때때로 충전을 하고 그 에너지로 남은 일상을 살아내는 것이다.
어느 날부터인지 몰라도 딸들이 하는 말에 이유를 묻지 않는다. 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겠지 하고 마음을 내려놓으면 편안해진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모두 똑똑하고 현명한 것 같다. 자꾸 구속하려 들면 서로 마음만 불편할 따름이다. 나는 딸에게 "그래, 조심히 내려오렴"이라고만 하고 전화를 끓었다.
친정이란 마음의 쉼터 같은 곳이다. 내가 그랬으니. 나도 예전에 경험했기에 그 마음을 안다. 딸들은 때로는 지치고 힘들 때 잠깐만이라도 부모 곁에 와서 엄마 밥 먹으며 쉬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근심 걱정 다 내려놓고, 남이 해 주는 밥을 먹으며 세상 속에서 아팠던 마음을 조금이라도 치유받고 싶을 것이다.
매번 만나도 반가운 것이 가족이다. 딸이 온다는 소리에, 엄마인 나는 그때부터 무얼 만들어 먹이고 무슨 반찬을 만들어 보내야 할까 그 생각부터 한다.
딸이 집에서 살림하고 가사 노동만 하는 가정주부 같으면 사서 먹든 해먹든 알아서 하라고 할 텐데, 딸은 여전히 워킹맘에 워낙 일이 많아 종종 대며 바쁘게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늘 딸이 뭘해서 밥을 먹을까, 반찬은 괜찮을까 혼자서 딸네 밥상을 염려하고 있다. 누가 알면 '걱정도 팔자'라는 말을 할듯하다.
요즘은 고구마 순 김치 담가 먹는 철이다. 김치도 때에 맞추어 담가 먹어야 맛있다. 고구마 순 김치도 먹어야 할 때가 있다. 조금 있으면 질기고 맛이 줄어든다. 시장에 나가 고구마순 한 박스, 깻잎 한 박스, 열무 한 단 얼갈이배추 한 단을 사다가 놓으니 마치 김장하듯 푸짐하다.
▲ 고구마 순 김치지금 막 담가 먹으면 맛있는 고구마 순 김치 ⓒ 이숙자
혼자서는 힘들겠지만 남편이 옆에서 많이 도와주니 한결 수월하다. 고구마 순은 껍질 벗기는 일이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런 이유에서 바쁜 사람들은 집에서 고구마 순 김치 담가 먹을 엄두를 못 낸다.
다른 방법으로는, 반찬을 파는 집에서 사다가 먹으면 되겠지만 나는 지금까지 반찬을 사다 먹는 게 익숙하지 않다. 나중에 내가 움직이지 못할 때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내 손으로 만들어 먹을 수 있어 얼마나 감사한지.
몇십 년을 김치 담그고 가족들 밥 해 먹고 살아왔으니 김치 담그는 일도 순식간에 해 낼 수 있다. 무슨 일이든지 오래 하다 보면 손에 익어 일의 속도가 빠르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이제는 몸에 신호가 온다. 나이는 못 속이는가 보다. 피로도 빨리 오고 자꾸 편하고 싶으니, 어쩔 수 없는 나이 든 사람인 건가.
며칠 후엔 서울 병원을 예약해 놓았다. 몇달 전 내가 일상생활을 하다가 무릎인대가 찢어지는 일이 생겨서 치료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둘째 딸네도 가져다주려고 넉넉히 담갔다.
막내딸은 결혼하고 여태껏 내 반찬을 한 번도 가져다 먹지 않았다. 막내 사위가 요리도 잘하고 음식을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어서기도 하지만, 완전히 서울 사람인지라 젓갈이 들어간 전라도 김치는 입맛에 잘 맞지 않는다고 하니 도리가 없다.
▲ 깻잎 김치손자가 좋아하는 깻잎 김치 ⓒ 이숙자
고구마 순 김치, 깻잎김치, 열무김치까지... 김치를 종류별로 담가 놓으니 마치 내가 부자가 된 듯 마음이 흐뭇하다. 그새 도착한 딸이 맛있다고 좋아해 주니 더 기분이 좋다.
고추조림도 하고 잔 멸치 볶음도 하고 반찬들을 만들어 짐 싸서 들려 보내고 나니 얼마나 마음이 홀가분한지. 해야 할 숙제를 마친 느낌이다. 친정엄마란 언제나 딸들 밥상 걱정을 하고 그렇게 세월을 엮으며 사는 것일까.
내 삶 전부였던 딸들... 생의 시간이 줄어드는 요즘
▲ 열무 김치열무 김치 ⓒ 이숙자
지금 네 딸은 각각의 인생을 잘 살고 있다. 지금은 모두 결혼해서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살고 있어 그저 감사할 뿐이다. 큰 딸은 1990년도 미국 유학을 간 후 거기서 자리잡았고, 둘째 딸도 대학 졸업 뒤 회사를 차려 대표를 하고 있으며, 셋째 딸은 과외와 프리랜서 업무를 병행하고 있다. 늦게 낳은 막대딸도 대학 졸업 뒤 지금은 한 회사에서 실장으로 근무 중이다.
며칠 후면 뉴욕에 사는 큰 딸도 한국 우리집에 온다는 연락을 받았다. 딸만 넷 친정 엄마인 나는 생각이 깊어진다. 내가 딸들에게는 어떤 엄마로 기억될지 잘 모르겠다. 어느 부모나 마찬가지겠지만, 나 역시 딸들을 위해 지방에서 수없이 많은 날 반찬을 만들고 해 나르며 자녀 교육을 시켰다.
딸들이 어떤 마음일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게 딸들은 나의 삶 전부였고 그 자체로 보람이었다. 네 딸이 모두 결혼하고 난 지금, 나는 친정 엄마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응원하는 마음 뿐, 엄마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생각도 든다
다만 1944년생인 데다 이제는 80이란 나이가 넘어 건강이 예전 같지 않아 걱정이다. 반찬 정도야 아직 해 줄 수 있어 다행이지만, 나이가 더 들어가는 내 몸이 앞으로 어떤 상황이 될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가 없다. 내 생의 시간이 줄어드는 나이, 내가 살아 움직일 수 있는 한 딸들에게 따뜻한 친정엄마로 기억되도록 살고 싶다.
내 등에 '네 딸들'이란 사랑의 짐이 없었다면 나는 세상을 지금 같이 바르게 살지는 못 했을 것이다. 내게 그렇듯, 딸들에게 나 또한 좋은 엄마로 기억되길 희망해 본다.
▲ 엄마와 딸(자료사진).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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