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이 대포와 총알... 동학군, 장렬한 최후 전투
그 자리가 무덤이 될지언정 싸우던 보통 사람들... 장흥 석대들판, 보은 북실마을
2024년이 동학혁명 130주년이다. 처음엔 반역에서 동학란으로, 또 그사이 동학농민전쟁이었다가 백주년에서야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름 하나 바꾸는데 백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동학혁명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혁명에 참여했던 오지영 선생이 지은 <동학사> 한 권을 들고 전적지를 찾아다니며, 그 답의 실마리나마 찾아보려 한다. 우리를 되돌아보는 기행이 되었으면 한다.[기자말]
정읍 천원역에서 해산한 잔병이 광주와 나주를 방어하던 동학군과 한 몸으로 서남쪽으로 밀려난다. 그렇게 밀려난 수만 농민군이 장흥과 강진, 병영성을 점령한다. 새로운 불길이 남도에서 이는 듯하였다.
▲ 탈출(박홍규 화백)서남해안까지 밀려난 동학혁명군이 장흥 석대 들판 전투를 끝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많은 수의 혁명군이 섬으로 탈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이영천(대뫼마을 촬영)
북접의 사정은 더욱 딱하다. 군세도 남접에 비해 허약했지만, 전쟁 패배는 뼈저린 이중의 고초를 떠안겼다. 확대일로에 있던 교세가 꺾인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이제 교단과 교주 보호가 절대 사명으로 다가왔다.
완전한 반란이었다. 무장봉기를 넘어선 전쟁이었다. 1871년 영해민란과는 근원이 달랐다. 이젠 이단이란 낙인의 문제가 아니다. 차원이 전혀 다른 존립의 문제다. 절체절명이다. 은거의 시간은 또 얼마일까. 그러함에도 끝까지 지켜낼 건 지켜야만 했다.
장흥 석대 들판
일본군은 작전대로 동학군을 해안가로 밀어낸다. 원평과 태인에서 패배한 동학 잔병이 광주와 나주를 지키던 군사와 합류, 장흥 건산리로 밀려간다. 족히 몇만은 넘고도 남았다. 탐진강을 사이에 두고 가까이 장흥 성을 위협하는 너른 평야다.
▲ 석대 들판가운데로 흐르는 탐진강 건너 편이 건산리다. 사진 좌측에 장흥 성이 있었다. ⓒ 이영천
장흥의 이방언 장군도 밀려온 동학군의 요구를 뿌리칠 수 없다. 해산하리라던 마음을 바꿔 일본군에 맞서, 그 자리가 무덤이 될지언정 싸워보기라 다짐한다.
12월 5일(음) 장흥 성을 공격하여 점령한다. 7일엔 김방서의 군대가 강진 성을 점령하고, 10일에는 장흥과 강진에서 일제히 들고 일어나 전라 병영성을 점령해 버린다. 전혀 새롭게 남도의 끝자락 장흥과 강진에서 새로운 불길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 전라 병영성 남문남도에서 군사 기지의 중심이던 강진의 전라 병영성. 직각 사각형의 높고 견고한 성곽을 가지고 있다. ⓒ 이영천
장흥 지방의 적 이방언·이사경·이인환·백인명·구교철 등이 회령진을 점거하였는데 그 떼거리가 수만 명이었다. 장흥 군리 천여 명이 출정하였으나 패하고 돌아와 병영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중략)… 12월 5일 적이 장흥을 함락하고 부사 박헌양은 죽었다. 이방언 등이 4일 벽사 역을 불 지르자 …(중략)… 다음날 새벽 적이 장흥을 침범하였다. 이때 성안의 수비가 매우 허술하여 …(중략)… 병사와 백성 중 죽은 사람이 4~500명이나 되었다.
적은 또 장흥의 관아 건물을 불태워버렸다 …(중략)… 7일 일본군이 하동에 들어갔다. 이날 장흥의 적이 강진을 함락시켰는데 의병장 김한섭이 전사하였고 …(중략)… 그는 본디 방언과 함께 동문수학한 사이로 방언이 적에 물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편지를 써 방언을 타일렀지만 …(중략)… 10일 장흥 지방의 적이 병영을 침범하였는데 병사 서병무는 성을 버리고 달아났고 …(중략)… 모두 죽었다.
이때 장흥과 강진이 연달아 함락되자 인심이 매우 흉흉해졌고 아무도 굳건한 의지가 없었다 …(중략)… 적은 9일 병력을 나누어 장흥·강진·보성으로 각각 진격하여 진을 쳤는데 서로 간의 거리가 십 리, 이십 리 정도였으며 각 진의 인원은 몇천 명 정도였고 서로 포성을 들을 수 있었다.
병영의 군대는 감히 출전하지 못한 채 다만 성을 지키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 여기고 성을 삥 둘러 사방에 나무 울타리를 설치하여 견고함으로 삼았다 …(중략)… 얼마쯤 시간이 지나 적들이 나무 울타리를 불살라 버리고 함성을 지르며 성벽 위로 올라왔다. 관군은 선두와 후미가 서로 돌아볼 겨를 없이 일시에 무너져 버렸다. (번역 오하기문. 황현. 김종익 옮김. 역사비평사. 1995. p293~298)
남도로 진군한 조일 연합군이 지휘관 미나미의 명령에 따라 3방향에서 장흥을 공격해 들어간다. 13일 공격이 개시된다. 성안 여기저기 수없이 포탄이 떨어진다. 포격에 성내 방어진이 흩어진다.
성을 에워싸고 사방에서 대포와 기관총이 난사된다. 소총 부대를 마치 게릴라처럼 움직여 곳곳에서 동학군을 괴롭힌다. 동학군 진영이 야금야금 무너져간다. 규칙적인 포격에 성안에 남아나는 게 없을 정도다.
▲ 장흥 동학농민혁명기념관1894년 12월, 일본군이 석대 들판을 공격한 곳인 작은 석대산에 세워진 장흥 동학농민혁명기념관. ⓒ 이영천
동학군은 할 수 없이 성을 버려야 했다. 탐진강 둑을 방패 삼아 반격을 시도하며 강진 쪽으로 퇴로를 잡아 나간다. 동학군이 석대 들판 한가운데를 지날 무렵 대열 앞뒤로 무지막지한 포격이 가해진다. 우왕좌왕 대열이 흐트러진다.
수십 분 동안의 포격이 멎고 가까운 산봉우리에서 기관총이 난사된다. 동시에 강둑에 매복한 조일 연합군의 맵찬 공격이 이어진다. 동학군도 반격하면서 재빠르게 강진과 남상 방향으로 퇴각을 시도한다. 그러자 지독한 포격이 다시 이어진다. 긴 시간의 포격이 멎으면 사방에서 기관총이 불을 뿜고, 뒤이어 소총을 든 조일 연합군이 개미처럼 몰려든다.
▲ 장흥 동학농민혁명기념탑석대 들판을 망망하게 내려다 보는 충열리 공설운동장 북쪽 산자락에 세워진 기념탑. ⓒ 이영천
거리를 벌려 퇴각하면 그 간격에 맞춰 포탄이 날아오고, 거리가 좁혀지면 기관총탄이 날아왔으며, 가까이에선 소총 탄환이 가슴을 꿰뚫고 지나갔다. 설상가상이다.
눈발 흩날리는 새하얀 들판이 온통 핏자국으로 선연하다. 석대 들판 가득한 주검이 스스로 제 목을 떨구는 동백꽃 마냥, 처연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남도 끝자락에서 역사의 새봄을 불러오는 장렬한 싸움이었다.
보은 북실마을
처절한 패배를 맛본 손병희 어깨엔, 교단 보호라는 짐까지 얹히게 된다. 동학군이 해산하자, 북접군의 길은 첩첩산중 험로뿐이다. 정읍에서 갈재를 넘어 장성을 지난다. 산길을 따라 담양에 이른 군사는 일천여 명이다.
담양에서 북쪽으로 순창 복흥을 거쳐 임실 갈담에 스며든다. 11월 28일이다. 심산유곡에서 해월 최시형이 합류한다. 최시형은 우금티 패배를 옛 영해민란의 아픔처럼 곱씹었을까.
▲ 통곡의 벽예루살렘이 아닌, 충청도 보은 성족리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에 있는 '통곡의 벽'이다. ⓒ 이영천
진안에서 장수를 거쳐 백두대간 등허리에 올라탄다. 가는 곳마다 군사가 합류한다. 12월 5일 무주 점령에 군사가 칠천 명이었다. 그러함에도 해월의 안전은 절대적이다. 길목마다 양반들이 조직한 민포병이 괴롭힌다. 가급이면 싸움을 피하는 게 상책이나 부득이 싸워야 할 때도 있다. 7일 무주를 출발, 8일 설천과 월전에서 민포병과 싸워 이긴다.
충청도에 이르러 영동 황간 남쪽 서수원에 진을 친다. 대오를 나누어 9일 황간과 영동 읍내를 점거한 다음 날, 지형적으로 유리한 영동 용산장터에 주둔한다. 험한 산길을 이동해 온 북접군은 무척 지쳐 있다.
경상도 관군과 민포병, 일본군이 토벌에 나선다. 11일 영동 민포병의 공격을 가볍게 제압하자, 12일 토벌군이 두 차례 공격해 온다. 먼저 중앙 경리병이, 다음은 상주 유격병이다. 북접군은 유리한 지형과 대군의 위력으로 이 공격을 가까스로 막아낸다.
곧장 보은으로 빠르게 진군한다. 청산을 지나 16일 보은을 점령한다. 다음 날 저녁 종곡리 북실마을에 진을 친다. 이를 정탐한 일본군과 상주 민포병이 17일 저녁 어둠을 틈타 3방향에서 기습해온다. 최시형 등 지도부가 머문 누청리 김소촌 집을 공격하나 허탕이다.
사망자만 2600여 명
▲ 북실마을북접군이 최후의 전투를 벌인 보은읍 종곡리 북실마을. 입구에 인상적인 목재 조형물이 서 있다. ⓒ 이영천
곧바로 북실이 공격당한다. 밤새도록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나, 화력에 밀려 더는 버티지 못한다. 18일 늦은 오후까지 학살이 이어진다. 2600여 명 사망자가 발생한다.
이 싸움을 끝으로 북접군도 해산한다.
살아남은 이들은 속리산에 들어서 뿔뿔이 흩어진다. 이 전투를 기억하려 북실마을 인근에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을 들여 앉혔다.
호서군(湖西軍)은 손병희, 손천민 등의 지휘하에 장성에서 담양, 순창 경계를 넘어 임실 깊은 산속에서 해월 선생을 만난다. 겨우 천여 명의 군사로 진안, 장수, 무주 등 여러 읍을 거쳐 호서 경계까지 들어가는 도중 곳곳에서 관병과 민포병과 만나 많은 위험을 겪는다.
나중 충청도 황간, 영동 근처에 이르러 군대를 해산한다. (동학사. 오지영. 문선각. 1973. p256)
▲ 보은 동학농민혁명기념탑보은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안, 가장 높은 곳에 기념탑이 서 있다. 여기서 최후 격전지인 북실마을이 지척이다. ⓒ 이영천
손병희와 손천민, 김연국 등은 최시형을 보위하여 강원도 홍천에 은거한다. 그나마 정세가 누그러진 1895년 원주 치악산 밑 수레마을로 옮겨 은거하며 교단 보호에 최선을 다한다.
이로써 장엄한 동학혁명이 막을 내린다. 곳곳에서 산발적인 전투가 있었으나 대세를 바꾸기엔 너무 버거웠다. 민족사에서 찬란했던 '민중 반란'은 이렇듯 처연한 모습으로 역사에 큰 획을 그어놓았다. 그 정신은 1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기억하는 한 그들은 살아 꿈틀거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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