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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언덕에서 산삼보다 더 귀한 걸 찾았네요

달라 언덕을 등산하다 발견한 고사리 천국... 타지에서 느끼는 진한 한국의 맛

등록|2024.08.06 14:57 수정|2024.08.06 15:16
스코틀랜드로 온 지는 3년 되었습니다. 틸리라는 조그만 마을에 영국인 남편과 세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국적도 자라 온 배경도, 피부색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 곳의 소식을 전하고 싶습니다.[기자말]
 

 

친구 릴리가 한국에서 왔다. 중국에서 살았을 때부터 그를 알았으니 그를 안 지도 10년이 넘었다. 그는 미국계 한국인이라 한국과 미국을 번갈아 다니는데 스코틀랜드는 그의 버킷리스트에 있던 나라여서 꼭 오고 싶었다고 했다. 오랜만에 만난 그에게 내가 자주 등산하는 달라(Dollar) 언덕을 보여주고 싶었다. 달라 언덕에는 스코틀랜드 느낌이 물씬 풍기는 '캠벨성'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마을의 오크힐 언덕 꼭대기인 벤클루(Ben Cleuch)만 해도 721m나 되고, 우리 집 옆 동네에 있는 달라 언덕도 648m로 이곳에선 언덕이라 불리지만 꽤 높은 편이다. 달라에 있는 캠벨성(Campbell Castle)은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캠벨 클랜(씨족)의 추장인 아가일 백작의 소재지였고 1556년에 열정적인 개신교 설교자 존 녹스(John Knox), 그리고 1563년에는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이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 달라 언덕에 우뚝 솟은 'Campbell Castle' ⓒ 위키피디아


 

70살인 릴리가 가파른 협곡 사이를 잘 걸어갈 수 있을까 조금은 걱정이었지만 지팡이 하나로 씩씩하게 잘도 올라갔다. 콰르르 흐르는 물과 살랑이는 푸른 나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불끈 솟아올랐다. 중간쯤 오르다 보면 바다처럼 푸른 '블루벨'(bluebell)이 찰싹찰싹 내 발목을 간지럽혔다.

 

릴리의 외침, 그리고 시작된 일

 

▲ 달라언덕에서 출렁이는 불루벨 ⓒ 제스혜영


 

아름다운 달라언덕을 흠뻑 만끽하고 있는데 릴리가 크게 소리쳤다.

 

"고사리다!"

 

마치 산에서 산삼이라도 찾은 심마니처럼 그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이런 걸 고사리라고 하는구나.'

 

갈색 고사리는 평생 살면서 먹어봤지만 땅 위로 올라온 푸른 고사리와의 만남은 처음이었다. 사실 이 고사리는 스코틀랜드 지천에 깔려있다. 이것을 '펀'(Fern)이라고 부르는데 '펀'이라 함은 우리 집 뒷마당에도 있기 때문에 내가 몰랐던 식물은 아니었다. 단지 이것이 '날고사리'였다는 사실을 스코틀랜드에서 산 지 3년 만에 그리고 이 언덕을 수십 번도 넘게 오르면서 이제야 알게 되었다.

 

릴리 말에 의하면 먹을 수 있는 고사리가 있고 먹지 못하는 고사리가 있단다. 릴리는 내 키보다 훨씬 높은 펀(날고사리)의 꼭대기 부분을 손으로 끊었다. 또르르 말린 고사리 부분이 세련된 지팡이 모양을 하고 있었다. 조금 더 가다 보니 이제 막 올라온 어린 고사리순도 눈에 띄었다.

 

비가 많이 오는 스코틀랜드에선 고사리가 울창한 숲을 이룰 만하다. 어느 누가 숨어도 보이지 않을 만큼 무성한 이 고사리 수풀을 보고 있자니 '이곳에는 분명 한국 사람이 없구나'라는 생각 또한 스쳤다. 릴리와 나만이 발견한 흙 속의 진주라 흥미진진했다.

 

▲ 스코틀랜드 달라(Dollar) 언덕길에 있는 고사리밭 ⓒ 제스혜영


▲ 땅 위로 올라온 어린 고사리순 ⓒ 제스혜영


 

그때부터 우리의 목표가 달라졌다. 언덕 꼭대기에 있는 캠벨성은 이미 관심에서 멀어졌고 고사리를 수확하기에 나섰다. 8살 아들부터 70세의 릴리까지 모두가 전투적으로 달려들었다. 지나가는 현지인이 '이런 잡초를 왜 뽑을까' 이상하게 쳐다봤을지도 모르지만 고사리를 한 두 개 꺾다 보니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 달라언덕에서의 고사리 수확 ⓒ 제스혜영


 

채취한 생고사리에는 독성분이 있기 때문에 하룻밤을 물에 담가 두었다. 다음날이 되어 팔팔 끓는 소금물에 데쳤다. '스코틀랜드에서 고사리라니!' 비빔밥과 육개장을 먹을 때면 고사리가 없어서 섭섭했던 터라 고사리가 익어가는 과정만 보고 있어도 입 안에서 침이 고였다.

 

▲ 스코틀랜드 친구도 좋아했던 고사리 무침 ⓒ 제스혜영


 

릴리는 달라언덕에서 가져온 고사리에 들기름을 두르고 고사리무침을 만들었다. 들기름의 고소함이 고사리뿐만 아니라 부엌 전체를 에워쌌다. 스코틀랜드에서 제대로 만들어 보는 '나물 무침'이라니. 고사리무침을 다 만들고 남은 고사리가 두 소쿠리나 되었다. 고사리를 두 봉지에 나눠 넣고 냉동실에 쟁여 두었다. 왠지 부자가 된 기분이다.

 

스코틀랜드 친구도 릴리가 만든 고사리무침을 좋아했다. 달라언덕에서 이런 걸 먹을 수 있다는 것에 신기해하면서 그날 저녁에 무쳤던 고사리를 몽땅 해치웠다. 릴리가 말하길 내년에는 7월 말고 5월이나 6월에 올라오는 햇고사리를 따라고 한다. 그때가 더 연하고 맛있는 고사리를 먹을 수 있다고. 릴리는 어떻게 이런 것도 알고 있을까? 평소 궁금한 것이 생길 때면 먼저 검색창을 두드리는 나에게 검색창의 한계를 넘어선 그의 지혜가 위대해 보였다.

 

육개장 한 그릇에 담긴 릴리의 모습

 

▲ 고사리 넣고 만든 육개장 ⓒ 제스혜영


 

오랜만에 육개장을 만들었다. 육개장 하면 빠질 수 없는 고사리! 쟁여 두었던 냉동 고사리를 냄비 안에다 퐁당 던졌다. 고사리가 보들보들 씹히는 게 육개장의 얼큰함을 더해 주었다. 릴리는 저번주에 노르웨이로 떠났다. 고사리가 목구멍으로 들어갈 때마다 떠나간 릴리를 다시 소환시킨다.

 

쩌렁쩌렁하게 고사리를 외쳤던 그의 목소리. 고사리를 뽑느라 한동안 몸을 웅크리다 '아이고아이고' 허리를 붙잡고 천천히 일어서던 뒷모습. 고사리를 한주먹 움켜쥐며 세상을 다 가진 듯 활짝 드러낸 하얀 이빨. 한동안 고사리와 릴리를 서로 떼어낼 수 없을 것 같다. 만약 떼어 낸다면 고사리에서 우러나는 깊은 맛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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