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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차 세우고 보는 꽃, 함께 보시죠

서천 문헌서원과 군산 옥구향교에 만개한 배롱나무꽃

등록|2024.08.05 08:58 수정|2024.08.11 19:51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교육기관 향교(鄕校)는 국립기관이요, 서원(書院)은 사립기관이다. 공통점을 말하자면 각 지방에서 유교를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 공간이자 성현들에게 드리는 제향 공간, 그리고 고유한 지역의 문화를 대표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지금과 같은 현대사회에서 향교나 서원은 이미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보다는 매우 특수한 경우에나 만나는 박물관 또는 전시관 같은 역할을 할 뿐이다. 하지만 이런 건물적 기능을 벗어나서 최고의 아름다움을 구가하여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유인하는 때가 바로 요즘이다.
 

문헌서원입구홍살문까지 배롱나무꽃과 목은 이색의 시 깃발이 나부낀다 ⓒ 박향숙

 
건물의 오색 단청보다 더 고풍스런 모습으로 피어나는 붉은 배롱나무꽃이 지천에 가득하다. 가까운 이웃 서천에는 배롱나무 길(서천군 종천면-서면, 약 20km)이 있고, 근래에는 군산의 낮과 어둠을 밝히는 가로수에도 배롱나무꽃이 만발했다. 운전할 때마다 눈길이 자꾸 옆으로 새어나가고, 급기야 도로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풍성한 꽃나무를 사진에 담기 바쁘다.

매일 30도를 훨씬 웃도는 폭염과 높은 습도 탓에 말랭이 책방까지 올라오는 사람들이 없다. 핑계김에 배롱나무꽃들의 세례라도 받아볼까 하고 '한두 시간 번개여행'을 며칠 다니면서 올여름 원 없이 배롱나무꽃을 즐기고 있다.

2년 전 8월 한여름, 우연히 서천 문헌서원(서천군 기산면 소재)에 갔다가 입구부터 줄지어 서 있는 배롱나무꽃의 붉은 융단에 반해서 서원의 역사를 공부함은 물론이고 여름 피서지로 지인들에게 서원에서의 하룻밤을 강추하기도 했다.
 

문헌서원경내전통한옥호텔과 한식식당이 입구에 위치, 숙박형 피서지로 강추 ⓒ 박향숙

 
그래서 올해 짧은 학원 방학 동안 선택한 피서 방법은 문헌서원을 비롯한 충남 서천군 일대와 군산 옥구향교의 배롱나무꽃 즐기기였다. 작년에는 장기간에 걸친 장마와 태풍으로 인해 여름꽃들 대부분이 진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시들었는데 올해는 더운 날씨 덕분에 배롱나무꽃들의 개화가 일러서 가는 곳마다 그 모습이 장관이다. 시인 도종환님의 <배롱나무>를 읽다보니 마치 나의 마음을 읽은 듯한 시 구절이 있어서 소리내어 몇 번을 읽기도 했다.
배롱나무 - 도종환

배롱나무를 알기 전까지는
많은 나무들 중에 배롱나무가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장 뜨거울 때 가장 화사한 꽃을 피워놓고는
가녀린 자태로 소리없이 물러서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남모르게 배롱나무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 뒤론 길 떠나면 어디서든 배롱나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지루하고 먼길을 갈 때면 으레 거기 서 있었고
지치도록 걸어오고도 한 고개를 더 넘어야 할 때
고갯마루에 꽃그늘을 만들어놓고 기다리기도 하고

(중략)

늘 다니던 길에 오래 전부터 피어 있어도
보이지 않다가 늦게사 배롱나무를 알게 된 뒤부터
배롱나무에게서 다시 배웁니다

사랑하면 보인다고
사랑하면 어디에 가 있어도
늘 거기 함께 있는 게 눈에 보인다고

올해도 변함없이 문헌서원 정문에는 소나무와 배롱나무꽃 그리고 목은 이색(고려말 학자 1328~1396)의 한시가 적힌 깃발이 있었다. 서천군의 서원정비사업으로 교육관, 전시관, 한옥전통한옥호텔과 전통음식점이 추가 공사 중이었지만 기존의 변함없는 정원 형태는 사람들을 웃으며 맞이해주었다.

장마 후 특유의 푸른 여름 하늘과 보색을 이루는 진붉은 배롱나무꽃의 조화, 그리고 문헌서원의 입구에 서 있는 홍살문을 지나 연못 속에 있는 경헌루까지만 보아도 세속의 시끄러운 맘에 평화가 인다.

대문인 진수문을 거치면 서원의 주요시설들을 만날 수 있고, 언덕 위 멀리 소나무본진을 두르고 놓여있는 한산이씨 선조들의 무덤과 석상들도 보인다. 멀고 먼 옛날 이곳에서 울렸던 스승과 유생들의 학문에 대한 교학상장(敎學相長)의 무대 위로 나도 역시 주인공이 되어 시공을 초월한다.
 

옥구향교내 단군묘건물뙤약볕에도 사진작가와 모델들의 치열한 촬영 ⓒ 박향숙

 
이번에는 군산의 옥구 향교(군산 옥구읍 상평리)의 배롱나무 꽃을 보러 갔다. 1984년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유산자료 제96호로 지정된 향교로 조선 태종(1403년)에 창건되었다. 특히 이곳에는 신라시대 유학자 최치원의 영정이 봉안된 문창서원(文昌書院)과 단군묘(檀君廟)가 있다.

경내의 대성전, 명륜당을 비롯한 각 건물마다 배롱나무꽃이 사방으로 피어나서 향교의 크기는 크지 않아도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손꼽는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한다. 마루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이 비 오듯 흐르는데, 사진모델과 사진작가들은 뙤약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배롱향기를 담아내느라 상(上)노동에 가까운 촬영을 하고 있었다.
 

옥구향교경내건물마다 들어앉은 배롱나무꽃이 절경이다 ⓒ 박향숙

 
아마추어로서 그들을 따라가며, 옆에 서서 어떤 각도로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지 구경하다가 얼굴과 양팔에서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을 보는데 왠지 '이게 진짜 여름나기지'라는 호기가 치솟기도 했다. 덕분에 옥구향교의 배롱나무꽃 사진을 원 없이 찍었다.

'간지럼 타는 나무'라는 별칭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은 맘에 매끄러운 나무 줄기를 손톱으로 간질거리기도 했다. 꽃잎은 바람만 쳐다보는데, 여름날 성악가 매미만 간지럼을 타는지 그의 목소리가 창공을 꿰뚫는다. 사람들의 귀는 땀으로 범벅이 되었지만 마음만은 붉은 사랑으로 물들어갔다.

올해 군산에서는 '군산문화유산야행(2024.8.16.-8.24)'이 열리는데, 2주간에 걸쳐 주말 저녁(8.16-8.17/ 8.23-8.24)을 이용하여 진행된다. 군산 문화유산구역인 군산 내항 역사 문화공간과 원도심 일원에서 야간에만 문화유산을 향유하는 행사인데, 이 기간이면 옥구향교의 배롱나무꽃 광경을 함께 볼 수 있으니 꼭 방문해보길 추천한다.

군산시가 좀 더 마음을 쓴다면 야행과 옥구향교를 잇는 여행길 하나를 만들어서 아침부터 오후까지는 향교와 그 주변 관광을 소개하고 야간에는 야행을 즐기게 하는 문화체험 프로그램도 권하고 싶다. 일 년에 한 시절만 만나는 이 아름다운 풍경을 그냥 보낼 수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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