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남의 일기를 읽느냐고? 이래서 읽는다
[김성호의 독서만세 238] 장일호 <슬픔의 방문>
누군가는 말한다. 남의 일기를 왜 읽느냐고. 프랑스어로 시험하다는 뜻 그대로, 가볍고 자유로운 글로 태어난 게 에세이(Essai)다. 최초의 에세이로 흔히 언급되는 몽테뉴의 <수상록(Essais)>부터가 '시도들 모음집'이란 뜻을 가졌고, 이후 발표된 유명 에세이 가운데도 별 의미 없이 쓰인 토막글이 수두룩하다.
프란시스 베이컨이나 볼테르, 조지 오웰 같은 이들이 에세이를 문학의 정수로까지 끌어올렸단 평을 받으며 규격 있고 멋스러운 글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에세이의 근간은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쉬우면서도 자유로운 것이 아닌가 한다.
쉽게 말해 페이스북이며 인스타그램 같은 곳에 짤막하게 남기는 토막글이 지난 시대의 에세이와 같은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누군가는 중수필로 분류되는 인상 깊은 글을 쓰고, 또 누구는 가볍고 얕은 호흡으로 토막글을 쓸 뿐이다. 무엇이 에세이고 무엇이 아닌가를 본래 문학은 구분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야를 출판계로 한정해보면 에세이에도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당장 서점가 에세이 코너에 가보면 중수필은 얼마 없고 죄다 경수필이란 점을 알아챌 수 있다. 확고한 주제의식은 물론 긴 호흡에 무엇보다 문학적 정취까지 가진 중수필은 서점가에서 멸종위기에 처한 지 오래다.
교과서에 실릴 법한 명작 수필들, 윤오영의 '방망이 깎는 노인', 법정의 '무소유' 같은 글을 더는 출판 서적 가운데서 만나기 어렵단 기분을 느낄 때도 많다. 당장 글을 써서 출판계 사람들과 만남을 가질 때면 '인스타그램' 길이로 써주세요, 일상 이야기를 많이 해주세요, 전문적인 이야기는 빼주세요 하는 답을 들을 때가 수시로 있는 것이다. 경수필조차도 더욱 짧고 가벼우며 감상적이 되고 있다는 말을 전하며 말이다.
그래서일 거라고 생각한다. 에세이를 좀처럼 읽지 않는다는 독자가 늘어나는 이유가 말이다. 그들로부터 "에세이는 일기 같아요", "남의 일기를 왜 찾아 읽지요?" 하는 답을 듣는 경우가 늘어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오늘날 주류 독자의 취향에 맞추어 호흡이 얕고 분량이 짧은 데다 민감한 감상과 공감에 집중하는 저술이 가질 밖에 없는 한계, 즉 이미 아는 얘기가 태반이고 이렇다 할 통찰이며 깊이가 없다 느껴지는 문제를 오로지 작가의 탓이라 하기에는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반박하고 싶을 때가 많다.
일기? 다 아는 말? 그 발화의 의미
장일호의 에세이 <슬픔의 방문>도 이와 같은 지적을 받을 수 있는 책일 수가 있겠다. 실제로 이 책을 들고 나간 자리에서 만난 어느 독서가가 내게 대뜸 앞의 따옴표에 든 이야기를 전해왔으니. 틀림없이 책에 담긴 생각 중 많은 수에 공감할 그와 같은 독자조차, 그것도 더욱 많은 책을 열성적으로 읽어내는 이들일수록 이런 생각을 갖는 경우가 많다는 게 내게는 그저 지나칠 수 없는 일로 느껴졌다.
그저 그 하나만의 문제는 아니다. 오죽하면 '추천의 말' 격으로 '책의 말이 허물어지는 자리에서'란 글을 쓴 김애란조차 그와 같은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 전한다.
다 아는 말이라 생각하겠지만, 다 아는 말이 아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는 없다 느낄 수도 있겠으나 그런 이야기라도 듣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제 삶과 이미 많이 나온 이야기를 연결지어 '구체적이고 육체적으로' 써냈으므로, 의미를 갖는다고 말이다. 온전히는 아니지만 일부는 동의하므로, 나는 이 책을 그래도 읽을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에세이를 일기라 표현한 이에게 "집을 나온 일기는 그저 일기이기만 한 것이 아니죠"하고 답한 것도 그래서였다.
추천의 말을 포함하여 모두 24편의 글이 손바닥 두 개면 가득 차는 작은 판형으로 겨우 250여 페이지를 채웠다. 장마다 여백 또한 크게 들어가 읽는 데 부담이 없다. 넉넉잡아 하루, 빠르면 두어 시간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다.
가벼운 책 안에 든 결코 가볍지 않은 이야기
저자의 어린 시절부터 현재의 삶까지를 사회의 여러 문제와 마주하여 써낸 점이 특징적이다. 시사주간지 <시사IN> 기자로 2007년 입사한 이래 현재까지 몸담고 있는 이답게 제 삶과 사회문제가 닿는 지점을 놓치려 들지 않는다. 지난 시간 수많은 독서가 그를 채워왔음을 짐작할 수 있도록 인용된 서적 또한 한가득이다. 그 책들을 읽은 이라면 책이 미친 영향이 어떠한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작가의 사고와 지적 배경이 소개된 책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책이 인간을 만든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고백하자면 장일호는 좋아하는 기자는 아니었다. <시사IN>을 꼼꼼히 애독한 시절이 길었음에도 마음이 가는 기사는 대개 다른 이가 쓴 것이었다. 그의 기사에서 답답하거나 아쉬움이 남는 때가 잦았으므로, 나는 그와는 잘 맞지 않는 독자라고 여겼다. 문제를 대하는 관점이며 감상의 교접이란 말 그대로 미묘한 부분이어서 아마도 그가 쓴 다른 형태의 글 또한 그러리라고 쉽게 단정하였던 것도 같다.
그러나 <슬픔의 방문>은 조금은 그를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 책을 읽으며 오래 전 보았을 기사들과 그것이 다룬 문제들과 다시 그에 다가서는 기자의 태도를 생각하게 되었다. 기자가 걸어온 길과 마주한 세상이 그가 세상을 바라보고 문제를 대하는 시각과는 떨어질 수 없는 것임을 새삼 깨닫는다. 기자 홀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기자 또한 길러내는 것이다. 그 기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독자가 이해하는 기회가 흔치 않으므로, 내게는 이 책이 제법 흥미로운 감상을 일으켰다.
책의 제목에 '슬픔'을 꼽아 붙인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책 가운데 드러난 장일호의 두드러진 특징이 그와 깊은 연관이 있는 탓이다. 죽음, 특히 자살을 수차례 언급하고, 삶 가운데 감정의 큰 기복을 수시로 드러낸다. '먹지도 잠들지도 못했다'거나 '한참을 울었다'거나 하는 표현이 곳곳에서 등장한다. 흔히 공감을 기자의 주요한 능력으로 꼽는 이가 많은데, 그렇다면 장일호는 그 측면에서 아주 뛰어난 역량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이것이 그대로 기자로서의 장일호의 특징이기도 하였으므로 나는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술, 가난, 페미니즘 그리고 슬픔과 공감
삶 가운데 슬픔이 내려앉을 때마다 저자는 숨기를 선택했다고 고백한다. 가장 잦은 도피처는 술이다. '맥주는 내게 365일 제철 음식이다'라고 적어나가다 아예 스스로를 '알코올 의존증 환자'라고 표현하기까지 한다. 술로써 맺어진 관계와 삶이 단순한 것으로 환원되는 때의 즐거움을 나 또한 알고 있기에 그가 전처럼 낯설게만 다가오지 않는다.
가난도 그녀를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일 수 있겠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버지와 평생 식당 찬모로 일하며 가계를 책임진 어머니의 이야기를 저자는 담담하게 풀어낸다. 열렬한 기복신앙으로 종교를 믿는 어머니와 단박에 그 종교와 연을 끊은 저자 사이에 닿지 못할 거리감을 표하는 대목은 여느 부모와 자식 사이에 일어날 법한 일상적 에피소드다.
말 그대로 '복음'처럼 다가왔다는 페미니즘과 수많은 책들로부터 접한 사상과 사고의 체계 또한 그를 이루었다. 젠더의 해방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수많은 불편의 지점들을 짚어내는 장들 또한 인상적이다. 한국의 어머니들과 노예를 빗대는 대목처럼 과한 표현들도 제법 있지만, 불편함이 많은 이가 세상을 더 이롭게 하리라는 기대 또한 품게도 된다.
결혼생활을 하는 독자들에겐 저자의 결혼생활도 상당히 인상적일 듯하다. 따박따박 제 요구를 말하여 시어머니가 문자 그대로 화장실에서 '토 하게' 했다는 대목은 스릴러 영화 못잖은 긴장감을 일으킨다. 결혼식부터 결혼생활, 또 장례식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관례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제가 옳다 믿는 바를 관철시켜가는 모습을 보자면 용맹하단 생각이 들 정도다.
저널리즘이나 사회문제에 대한 보다 깊은 이야기를 원하는 독자에겐 실망이 있을 수도 있다. 파고드는 쓰기가 아닌, 저와 제 삶에 대한 담담하고 진솔한 쓰기에 집중한 때문이다. 책이 다루고 있는 많은 주제가 어떤 관점에선 흔한 것이고, 다루는 시각 또한 새롭지는 않은 게 사실이다. 책이 인용한 여러 서적을 고려하면 과연 이 정도 문제의식을 위하여 책 한 권을 읽는 것이 가치가 있는가, 그와 같은 쉬운 평가가 나올 법도 하다.
그러나 나는 이 글에도 의미가 있다고 여긴다. 김애란이 적었듯 '한번 더 보게 하고, 읽게 하는 것'에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여전히 수많은 이들이 그 빤한 문제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으므로, 저자에게 그러했듯 가난과 상실과 불평등과 같은 것이 슬픔처럼 찾아들고는 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그 빤하고 흔한 시각을 새로운 방식으로 접해나가야 한다. 어쩌면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수많은 담론으로 독자를 이끄는 입문서가 되어줄지도 모를 일이다.
책을 읽고 기자 장일호에게 약간이나마 관심이 생겼다면, 그를 응원하고 싶어졌다면, 충분한 변화가 아닐까. 적어도 나는 그렇다.
프란시스 베이컨이나 볼테르, 조지 오웰 같은 이들이 에세이를 문학의 정수로까지 끌어올렸단 평을 받으며 규격 있고 멋스러운 글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에세이의 근간은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쉬우면서도 자유로운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시야를 출판계로 한정해보면 에세이에도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당장 서점가 에세이 코너에 가보면 중수필은 얼마 없고 죄다 경수필이란 점을 알아챌 수 있다. 확고한 주제의식은 물론 긴 호흡에 무엇보다 문학적 정취까지 가진 중수필은 서점가에서 멸종위기에 처한 지 오래다.
교과서에 실릴 법한 명작 수필들, 윤오영의 '방망이 깎는 노인', 법정의 '무소유' 같은 글을 더는 출판 서적 가운데서 만나기 어렵단 기분을 느낄 때도 많다. 당장 글을 써서 출판계 사람들과 만남을 가질 때면 '인스타그램' 길이로 써주세요, 일상 이야기를 많이 해주세요, 전문적인 이야기는 빼주세요 하는 답을 들을 때가 수시로 있는 것이다. 경수필조차도 더욱 짧고 가벼우며 감상적이 되고 있다는 말을 전하며 말이다.
그래서일 거라고 생각한다. 에세이를 좀처럼 읽지 않는다는 독자가 늘어나는 이유가 말이다. 그들로부터 "에세이는 일기 같아요", "남의 일기를 왜 찾아 읽지요?" 하는 답을 듣는 경우가 늘어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오늘날 주류 독자의 취향에 맞추어 호흡이 얕고 분량이 짧은 데다 민감한 감상과 공감에 집중하는 저술이 가질 밖에 없는 한계, 즉 이미 아는 얘기가 태반이고 이렇다 할 통찰이며 깊이가 없다 느껴지는 문제를 오로지 작가의 탓이라 하기에는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반박하고 싶을 때가 많다.
일기? 다 아는 말? 그 발화의 의미
▲ 슬픔의 방문책 표지 ⓒ 낮은산
장일호의 에세이 <슬픔의 방문>도 이와 같은 지적을 받을 수 있는 책일 수가 있겠다. 실제로 이 책을 들고 나간 자리에서 만난 어느 독서가가 내게 대뜸 앞의 따옴표에 든 이야기를 전해왔으니. 틀림없이 책에 담긴 생각 중 많은 수에 공감할 그와 같은 독자조차, 그것도 더욱 많은 책을 열성적으로 읽어내는 이들일수록 이런 생각을 갖는 경우가 많다는 게 내게는 그저 지나칠 수 없는 일로 느껴졌다.
그저 그 하나만의 문제는 아니다. 오죽하면 '추천의 말' 격으로 '책의 말이 허물어지는 자리에서'란 글을 쓴 김애란조차 그와 같은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 전한다.
'다 아는 말' 속에는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삶이 들어 있는지. 그리고 그 삶 하나하나는 얼마나 구체적이고 육체적인지. 우리가 지레 빤한 말이라 치부한 그 말이 누군가에는 목숨줄이고, 실존의 테두리임을 다시 깨닫는다. (...) 많은 이들이 이미 알거나, 안다고 착각하는 이야기를 한번 더 보게 하고, 읽게 하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 가끔은 그 일을 '독서'라 불러도 좋다고 조용히 끄덕이면서. 그 발화가 고맙다. - 254, 255p
다 아는 말이라 생각하겠지만, 다 아는 말이 아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는 없다 느낄 수도 있겠으나 그런 이야기라도 듣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제 삶과 이미 많이 나온 이야기를 연결지어 '구체적이고 육체적으로' 써냈으므로, 의미를 갖는다고 말이다. 온전히는 아니지만 일부는 동의하므로, 나는 이 책을 그래도 읽을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에세이를 일기라 표현한 이에게 "집을 나온 일기는 그저 일기이기만 한 것이 아니죠"하고 답한 것도 그래서였다.
추천의 말을 포함하여 모두 24편의 글이 손바닥 두 개면 가득 차는 작은 판형으로 겨우 250여 페이지를 채웠다. 장마다 여백 또한 크게 들어가 읽는 데 부담이 없다. 넉넉잡아 하루, 빠르면 두어 시간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다.
가벼운 책 안에 든 결코 가볍지 않은 이야기
저자의 어린 시절부터 현재의 삶까지를 사회의 여러 문제와 마주하여 써낸 점이 특징적이다. 시사주간지 <시사IN> 기자로 2007년 입사한 이래 현재까지 몸담고 있는 이답게 제 삶과 사회문제가 닿는 지점을 놓치려 들지 않는다. 지난 시간 수많은 독서가 그를 채워왔음을 짐작할 수 있도록 인용된 서적 또한 한가득이다. 그 책들을 읽은 이라면 책이 미친 영향이 어떠한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작가의 사고와 지적 배경이 소개된 책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책이 인간을 만든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고백하자면 장일호는 좋아하는 기자는 아니었다. <시사IN>을 꼼꼼히 애독한 시절이 길었음에도 마음이 가는 기사는 대개 다른 이가 쓴 것이었다. 그의 기사에서 답답하거나 아쉬움이 남는 때가 잦았으므로, 나는 그와는 잘 맞지 않는 독자라고 여겼다. 문제를 대하는 관점이며 감상의 교접이란 말 그대로 미묘한 부분이어서 아마도 그가 쓴 다른 형태의 글 또한 그러리라고 쉽게 단정하였던 것도 같다.
그러나 <슬픔의 방문>은 조금은 그를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 책을 읽으며 오래 전 보았을 기사들과 그것이 다룬 문제들과 다시 그에 다가서는 기자의 태도를 생각하게 되었다. 기자가 걸어온 길과 마주한 세상이 그가 세상을 바라보고 문제를 대하는 시각과는 떨어질 수 없는 것임을 새삼 깨닫는다. 기자 홀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기자 또한 길러내는 것이다. 그 기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독자가 이해하는 기회가 흔치 않으므로, 내게는 이 책이 제법 흥미로운 감상을 일으켰다.
책의 제목에 '슬픔'을 꼽아 붙인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책 가운데 드러난 장일호의 두드러진 특징이 그와 깊은 연관이 있는 탓이다. 죽음, 특히 자살을 수차례 언급하고, 삶 가운데 감정의 큰 기복을 수시로 드러낸다. '먹지도 잠들지도 못했다'거나 '한참을 울었다'거나 하는 표현이 곳곳에서 등장한다. 흔히 공감을 기자의 주요한 능력으로 꼽는 이가 많은데, 그렇다면 장일호는 그 측면에서 아주 뛰어난 역량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이것이 그대로 기자로서의 장일호의 특징이기도 하였으므로 나는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술, 가난, 페미니즘 그리고 슬픔과 공감
삶 가운데 슬픔이 내려앉을 때마다 저자는 숨기를 선택했다고 고백한다. 가장 잦은 도피처는 술이다. '맥주는 내게 365일 제철 음식이다'라고 적어나가다 아예 스스로를 '알코올 의존증 환자'라고 표현하기까지 한다. 술로써 맺어진 관계와 삶이 단순한 것으로 환원되는 때의 즐거움을 나 또한 알고 있기에 그가 전처럼 낯설게만 다가오지 않는다.
가난도 그녀를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일 수 있겠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버지와 평생 식당 찬모로 일하며 가계를 책임진 어머니의 이야기를 저자는 담담하게 풀어낸다. 열렬한 기복신앙으로 종교를 믿는 어머니와 단박에 그 종교와 연을 끊은 저자 사이에 닿지 못할 거리감을 표하는 대목은 여느 부모와 자식 사이에 일어날 법한 일상적 에피소드다.
말 그대로 '복음'처럼 다가왔다는 페미니즘과 수많은 책들로부터 접한 사상과 사고의 체계 또한 그를 이루었다. 젠더의 해방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수많은 불편의 지점들을 짚어내는 장들 또한 인상적이다. 한국의 어머니들과 노예를 빗대는 대목처럼 과한 표현들도 제법 있지만, 불편함이 많은 이가 세상을 더 이롭게 하리라는 기대 또한 품게도 된다.
결혼생활을 하는 독자들에겐 저자의 결혼생활도 상당히 인상적일 듯하다. 따박따박 제 요구를 말하여 시어머니가 문자 그대로 화장실에서 '토 하게' 했다는 대목은 스릴러 영화 못잖은 긴장감을 일으킨다. 결혼식부터 결혼생활, 또 장례식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관례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제가 옳다 믿는 바를 관철시켜가는 모습을 보자면 용맹하단 생각이 들 정도다.
저널리즘이나 사회문제에 대한 보다 깊은 이야기를 원하는 독자에겐 실망이 있을 수도 있다. 파고드는 쓰기가 아닌, 저와 제 삶에 대한 담담하고 진솔한 쓰기에 집중한 때문이다. 책이 다루고 있는 많은 주제가 어떤 관점에선 흔한 것이고, 다루는 시각 또한 새롭지는 않은 게 사실이다. 책이 인용한 여러 서적을 고려하면 과연 이 정도 문제의식을 위하여 책 한 권을 읽는 것이 가치가 있는가, 그와 같은 쉬운 평가가 나올 법도 하다.
그러나 나는 이 글에도 의미가 있다고 여긴다. 김애란이 적었듯 '한번 더 보게 하고, 읽게 하는 것'에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여전히 수많은 이들이 그 빤한 문제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으므로, 저자에게 그러했듯 가난과 상실과 불평등과 같은 것이 슬픔처럼 찾아들고는 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그 빤하고 흔한 시각을 새로운 방식으로 접해나가야 한다. 어쩌면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수많은 담론으로 독자를 이끄는 입문서가 되어줄지도 모를 일이다.
책을 읽고 기자 장일호에게 약간이나마 관심이 생겼다면, 그를 응원하고 싶어졌다면, 충분한 변화가 아닐까. 적어도 나는 그렇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서평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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