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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믿을 수 없는 비리경찰, 전도연의 서늘한 복수전

[리뷰] 영화 <리볼버>

등록|2024.08.05 14:15 수정|2024.08.05 14:15
 

▲ 영화 <리볼버> 스틸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푸석한 얼굴로 교도소를 나온 하수영(전도연)은 돈, 집, 사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허탈해한다. 2년 전 모든 죄를 뒤집어쓰는 대가로 새 아파트와 돈을 받기로 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생각할 틈도 없이 낯선 얼굴, 정윤선(임지연)이 수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윤선은 임석용(이정재)과 안면 있는 사이인 듯 수영의 과거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 수영은 기분 나쁘지만 윤선을 일단 곁에 두기로 한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처지의 수영은 윤선을 이용해서라도 정보를 캐내야 했다. 두 사람의 아슬아슬한 공조는 위태롭게 흘러가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임석용의 사망 소식이 들려오자, 무언가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수영은 제 몫을 되찾기 위한 여정 중 앤디(지창욱)를 만나 거대한 진실과 마주한다.

<리볼버> 속 캐릭터 열전
  

▲ 영화 <리볼버> 스틸컷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인물과 상황을 다루는 의외성이 강하다. 강남의 고층 빌딩, 고급 술집과 차에 익숙한 인물이 산기슭의 사찰에서 휠체어에 의지하는 아이러니가 실소를 머금게 한다. 자갈길을 하이힐을 신고 걸어야 하는 장면은 쓴웃음을 짓게 한다. 수영이 인물을 한 명씩 대면할 때마다 서로 흔들리는 심리묘사가 압권이다. 예상했던 이미지, 장소, 상황을 조금씩 비튼 삐걱거림이 오승욱 표 영화의 특별한 인장이다.

영화의 중심에는 안타고니스트(작품 속에서 주인공에 대립적이거나 적대적인 관계를 맺는 인물 - 기자 말) 앤디와 기회주의자 윤선이 있다. 로맨틱 코미디 이미지가 강하던 지창욱은 앤디를 통해 비열하고 지질한 모습을 연기한다. 앤디는 권력, 돈, 신뢰를 잃으면서 밑바닥 인생으로 전락해 모든 걸 잃은 또 다른 하수영이기도 하다.
 

▲ 영화 <리볼버> 스틸컷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윤선은 겉만 봐서는 도무지 속내를 가늠하기 힘든데, 영화 <배트맨>의 로빈과 배트맨처럼 수영과 대등한 관계로 설정해 시너지를 낸다. 여성으로서의 동질감과 연대, 그 이상의 복잡한 감정이 교차된다. 또 임석용과 그레이스(전혜진)의 전사가 쉽게 드러나지 않아 관객으로 하여금 인물의 관계를 더욱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수영은 형사였지만 경찰 홍보국 아나운서로 일하며 경찰서나 현장 보다 강남의 술집과 호화로운 생활에 익숙해진다. 본분은 잊고 불륜까지 한 수영은 어떤 일이 틀어진 걸 책임지기 위해 복역한다. 2년 동안 교도소에서 온갖 일을 겪으며 상처투성이가 됐지만 새로운 미래를 꿈꾸며 출소한다.

완벽히 배신당하고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 수영은 총 한 자루를 쥐고 무조건 전진한다. 누구라도 한 방에 날리고 싶은 생각은 간절하나, 총을 쏠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다. 대신 경찰 삼단봉을 휘두르며 앞길을 막는 위험과 잔혹한 대결을 펼친다. 죄를 지었지만 살인은 하고 싶지 않다는 신념을 지키려 발버둥 친다. 그렇게 인간의 품위를 지켜내며 제 자신을 찾아간다.

 

영화는 하수영을 필두로 연인 임석용(이정재), 속내를 알 수 없는 조력자 정윤선, 약속을 어긴 당사자 앤디, 돈줄의 출처이자 미스터리한 인물 그레이스 등 개성 있는 캐릭터 향연의 조화가 매력적이다. 연기라면 믿고 보는 배우들이 총출동해 누구 하나 튀지 않고 융화되며, <리볼버> 속에 안착한다.

배신의 순간 드러나는 인간 군상
  

▲ 영화 <리볼버> 스틸컷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초록물고기>(1997), <8월의 크리스마스>(1998), <이재수의 난>(1999)의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다 2000년 <킬리만자로>로 데뷔한 오승욱 감독은 경력에 비해 작품 편수가 많지 않다. 연출작으로는 <리볼버>가 세 번째인데, <무뢰한>(2015)으로 인연을 맺은 전도연과 두 번째로 의기투합했다.

비정하고 눅진한 피카레스크, 누아르, 하드 보일 장르를 꾸준히 만든 오승욱 감독은 여러 인터뷰를 통해 믿음이 깨어지는 순간 다양한 인간 군상이 발현되는 힘에 매료됐다고 밝혔다. 

 

<킬리만자로>는 지방 건달인 쌍둥이 동생의 죽음 이후, 동생인 척 고향으로 향한 정직 당한 형사(형)가 서서히 그들과 동화되는 쓸쓸한 새드무비다. 당시에는 처참한 흥행 실패로 쓴맛을 보았지만, 24년이 지난 지금은 시대를 잘못한 한국형 누아르라는 평을 듣는 영화가 되었다. 박신양의 색다른 1인 2역과 안성기의 농익은 처절함을 만나 볼 수 있다.

본격적으로 전도연과 호흡을 맞춘 <무뢰한>은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되며 세계적인 인정을 받았다. 말 그대로 밑바닥, 처절한 삶을 사는 한 여성이 남성으로 인해 고통받지만 자신을 이용하려는 또 다른 남성을 만나 진심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다. 전도연과 김남길의 연기 대결뿐만 아닌 장르적 특성까지 살려 팬층이 두꺼운 영화다.

 

전도연의 적극적인 제안으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리볼버>는 <무뢰한> 당시와 최대한 같은 스태프를 꾸려 시너지를 냈다. 하수영은 <무뢰한>의 김혜경보다 조금은 가벼운 분위기이지만 무표정과 차분한 말투, 억누르는 감정을 보인다. 돈, 집, 사람을 잃으며 투명 인간에 가까웠던 하수영이 여러 사람을 만나며 자신을 채워가는 분투기이기도 하다. 오승욱표 영화의 뿌리인 믿음과 배신을 중심에 두는 건 <무뢰한>, <리볼버> 모두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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