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경찰, '집게손 피해자' 고소 각하...이유 황당
"페미 동조, 고소인 비판은 논리적 귀결"... 전문가들 "경찰, 일베 내용을 수사 지식으로 활용"
▲ 서울 서초경찰서(자료사진). ⓒ 김화빈
"고소인은 그림 담당자가 아닌 것으로 확인되나 이전에 페미니스트들을 동조하는 듯한 내용의 트위터 글을 게시한 사실이 있는 바 피의자들이 고소인을 대상으로 비판하는 것은 그 논리적 귀결이 인정된다고 보인다." - 서울서초경찰서 수사결과 통지서
경찰이 "페미니즘에 동조했다"는 등의 이유를 들며 '넥슨 집게손 사태' 피해자가 고소한 온라인상 신상공개, 명예훼손, 모욕 등 사건을 모두 각하했다. 경찰은 피해자에게 가해진 사이버불링(온라인 집단괴롭힘)을 "비판"이나 "다소 무례하고 조롱 섞인 표현"으로 규정한 수사결과 통지서를 피해자에게 보냈다.
피해자 측 "경찰이 혐오·차별 승인"
▲ 현재는 비공개로 돌려진 넥슨의 게임 '메이플스토리'의 캐릭터인 엔젤릭버스터의 리마스터 홍보 영상 중 한 장면이다. ⓒ 넥슨
A씨는 이른바 '집게손'을 그리지 않았음에도 성명불상자인 피고소인들로부터 작업 담당자로 지목돼 실명과 사진 등 신상이 온라인을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유포됐다. 성희롱을 비롯한 모욕·비난 글 또한 수시로 게시됐다.
그러나 서초경찰서는 A씨의 고소 사건을 모두 불송치(각하)했다. 서초경찰서 수사14팀은 지난 7월 24일 A씨에 보낸 수사결과 통지서를 통해 "현재 대한민국에서 '집게 손가락 동작'을 기업광고에 사용하는 것은 금기시되는 것이 풍토"라며 "본건은 고소인(A씨) 소속 회사가 애니메이션 그림에 남성혐오적 손가락 모양을 그린 것이 기사화되며 피고소인들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비판의 글을 게시했다"고 밝혔다.
이어 "비록 고소인이 관련 그림 담당자가 아닌 것으로 확인되나 고소인 소속 회사는 집게 손가락 동작 관련하여 사과문을 게시한 바 있다"며 "고소인 또한 이전에 페미니스트를 동조하는 듯한 내용의 트위터 글을 게시한 사실이 있는 바 피의자들이 고소인을 대상으로 비판하는 것은 그 논리적 귀결이 인정된다"고 적었다.
서초경찰서는 A씨에 대한 성적 모욕이 담긴 트위터 글에 대해선 "혐의가 상당하다"면서도 "수사 실익이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수사팀은 "트위터를 통해 고소인에 (가해진) 통신매체이용음란 혐의는 상당하나 트위터는 미국 소재 기업"이라며 "(해외기업의 수사) 협조 범위는 살인·강도·강간 등 강력범죄에 한하고 있고, 형사사법 공조 또한 본건 범죄 특성상 그 회신을 기대하기 어려워 압수수색 영장 신청 등 수사 계속의 실익이 없다"고 밝혔다.
또 "피의자들의 글은 전체적으로 고소인 등 특정인물에 대한 비판보다는 극렬한 페미니스트들의 부적절한 행위(자기 작업물 등에 몰래 집게손가락 표현을 넣는 행위)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는 과정에서 다소 무례하고 조롱 섞인 표현을 사용한 것에 불과하다"고 밝히며 온라인 집단괴롭힘의 중대성을 축소하는 듯한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수사결과 통지서엔 '피해자'를 '피의자'로, '고소인'을 '피고소인'으로 잘못 적기도 했다.
A씨를 대리하는 범유경 변호사는 5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고소인은 도를 넘는 심각한 모욕적인 표현과 고소인이 하지도 않은 작업을 했다는 내용의 허위사실 유포,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수준의 성적 비하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 것"이라며 "이러한 피해는 고소인이 페미니스트에 동조하는 글을 올렸는지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말했다.
A씨의 법률·언론 대응을 조력하는 김민성 한국게임소비자협회 대표는 "넥슨 집게손 사태는 성차별적이고 극단적인 인터넷 커뮤니티가 사회에 얼마나 침투해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라며 "이번 사태를 불송치로 방조한다면 국가기관이 혐오와 차별을 승인해주는 꼴"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 "일베 내용을 수사 지식으로...경찰청장이 해명해야"
▲ 한국여성민우회 등 9개 시민단체가 2023년 11월 28일 오전 경기 성남시 분당구 넥슨코리아 사옥 앞에서 게임문화 속 페미니즘 혐오몰이를 규탄하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 김화빈
전문가들은 경찰의 이 같은 판단을 "2차 가해를 넘어선 직접 가해"라면서 "범죄사실을 소명하고 가해자를 색출해 피해자를 보호해야 할 수사기관이 '일베(일간베스트 저장소)' 등 남초 커뮤니티에서 오가는 내용을 토대로 불송치한 것은 대단히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연구관(여성학 박사)은 이날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경찰이 페미니즘에 대한 개념이 없고, 그야말로 일베 같은 곳에서 오가는 내용들을 자신의 수사 지식으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온라인상에서의 위협이 실제 가해로 이어지는 것이 최근 나타나는 범죄 경향임에도 완전히 무지한 모습"이라고 지적했다.
허 연구관은 "성차별적이고 편파적인 왜곡된 인식 하에 피해자가 마치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식의 판단을 한 것도 모자라 피해자에게 가해진 비난을 '비판'으로 인식하고 있다"며 "중립성·객관성을 담보해야 할 수사기관이 이런 판단을 내린다는 건 정말 시대의 비극"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특히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비난을 (경찰이) '비판'으로 포장해 준 것은 감사 대상이라고 보인다"며 "(수사결과 통지서를 보면 경찰의) 공정한 법집행을 담보하기 어려워 보인다. 본인들이 마녀사냥에 동조한 바 없고 페미니즘에 잘못된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면 경찰청장이 적극 소명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수정 한국여성의전화 여성인권상담소장도 "과거에 작성한 게시글을 이유로 경찰이 '피해자는 비난받을 만했다'고 판단한 것은 경찰이 여성폭력 문제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답습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여성민우회 여성노동팀도 "수사기관은 이 사건을 여성 노동자에 대한 (집단) 괴롭힘이 아닌 남성혐오 사건으로 정의하고 있다. 공공기관이 성차별적 인식을 승인한 것과 마찬가지"라며 "비현실적 판단에 의거해 이러한 결정을 내렸다는 점에서 경찰은 부끄러움을 느껴야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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