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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못 고치면 어디서도 못 고쳐요"

열여덟 청년 때 배운 TV수리기술, 44년 평생 업으로 삼은 김도용 복음전자 대표

등록|2024.08.05 14:06 수정|2024.08.05 16:21

▲ 신례원에 위치한 전파사 ‘복음전자’ 김도용 대표가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TV수리용 회로집을 보여주고 있다. ⓒ <무한정보> 황동환


카세트 테이프로 음악을 듣던 세대에게 추억을 소환하는 전자제품 수리 가게가 있다.

김도용(68) 대표가 운영하는 '복음전자' 현관 문을 빼꼼히 열고 들어서자 △50년 된 전축 △금성사에서 만든 에어컨 △보국전자 브랜드명이 선명한 밥솥 △88올림픽을 계기로 급속히 보급됐던 삼성 칼라 TV 등 한눈에 봐도 오래된 물건들이 즐비한 골동품 가게를 방불케 한다. 심지어 그가 개업할 때 쓰던 041-334-3129 전화번호조차 그대로다.

"가끔씩 소니 워크맨, 삼성 마이마이, 내쇼날, 파나소닉 휴대용 카세트를 들고 와 수리를 부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김 대표는 "여기 말고는 카세트 벨트 부품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가게는 거의 없을 걸요"라고 말한다.

 

▲ 복음전자 전경. ⓒ <무한정보> 황동환


예전엔 '전파사'라는 말이 더 익숙했던 전자제품 수리점. 김 대표는 1980년 24세의 나이로 예산읍 신례원에서 '복음전자'라는 상호로 개인 전파사를 개업한 뒤 44년 동안 전자기기 속 부품 사이를 종횡무진하고 있다.

그는 이보다 4년 앞선 18세 때 처음으로 납땜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신암 오산리 출신인 그의 학력은 신암국민학교에서 멈췄다. 당시 우리나라 농촌의 척박한 환경 때문이었을까? 그 역시 가난했던 부모님 밑에서 어렵게 자라면서 못내 학업을 이어갈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서울로 향했다. 세운상가 내 한 전파사 직원으로 일하면서 낙원동 인근에 위치한 중앙TV학원에서 TV수리기술을 배우는 등 주경야독했다.

"그때 결핵이 걸렸다. 학원은 1년 6개월 다녔는데, 제때 밥을 챙겨먹지 못하고 스티로폼 위에서 잠을 자는 등 열악한 환경에서 지냈던 게 탈이 난 것"이라며 당시 고생했던 상황을 떠올린다.

 

▲ 직접 쓴 노력?실천 등의 단어가 인상적인 권총인두.?김 대표가 젊은 시절 학원에서 기술을 배울 때부터 지금까지 사용하는 장비다. 마치 그의 수족처럼 50년을 함께하고 있다. ⓒ <무한정보> 황동환


"형광등 수리를 많이 했다. 주로 안정기를 교체하는 수준이다. 한번은 어떤 식당에서 형광등이 안 들어온다는 수리 요청을 받고 가서 덮개를 열어보니 쥐가 산 채로 들어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던 적이 있었다"며 그가 겪었던 일화를 전한다.

학원 졸업 뒤 그곳에서 알선해 준 성우전자(독수리표)에 취업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결핵이 문제였다. 그리고 그가 다시 향한 곳은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 오산리다. 집에서 건강을 회복하며 신례원에 있던 전파사 '충남전자'에 취업해 수리기사 일을 다시 시작했다.

"카세트, 진공관 전축, 도시바 오디오, TV, 밥솥 등의 수리를 많이 했다. 특히 충남방적 여직원들이 기숙사에서 다림질용으로 사용하던 다리미 수리 요청이 많았다. 자취하는 학생들은 고장난 카세트, 야외용 전축 수리 요청이 많았다"며 웃음 띤 얼굴로 "지금 돌아봐도 그때가 가장 좋았던 시절이다"라고 말한다.



신암면 집에서 신례원까지 걸어 출근했다. 한창 젊은 시절이라 빨리 걸으면 30분 정도 걸렸다고 한다. 돈을 절약하려는 생각도 있었다. 농사꾼 부모는 아들이 어엿한 서비스 기사라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가졌다고 한다. 추억 거리가 많았던 충남방적이 부도가 나면서 '복음전자' 개업으로 이어졌다.


사람들이 냉장고를 사면 동네 사람들이 우물에다 담가 놓고 먹으면 되는데 냉장고를 샀다고 손가락질 하던 시절. 접이식 문이 달려 있던 TV를 수리하다가 주인이 브라운관 뒤에 보관했던 소 판돈을 발견하고 돌려준 일. 경찰서가 고물상 대장을 두고 전파사들을 관리했던 이야기 등은 김 대표가 아니면 듣기 힘든 시대의 단면들이다.

"지금은 사라진 제도지만 전파사는 등록할 때 '낡은 물건을 새것으로 고친다'는 의미에서 고물상으로 허가를 받았고 경찰서에서 관리했다"며 "가령 삼성 TV 14인치를 팔려면 전파사마다 누구에게 언제 팔았는지 적어야 했다. 누가 물건을 도난당하면 경찰들이 전파사 장부를 들여다 봤다. 장물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라고 말한다.

 

▲ 시중에서 보기 힘든 8트랙 테이프. 4곡의 음악을 녹음해 플레이하면 끝없이 무한 반복된다. 과거 관광버스에서 자주 사용했다고 한다. ⓒ <무한정보> 황동환


전파사 주인들 얼굴에 웃음꽃이 만발했던 시절은 88올림픽을 계기로 컬러 TV가 많이 보급될 때다. 낙뢰가 있는 날도 전파사에겐 길일이다.

"옥외 안테나를 두고 TV를 보던 시절인데, 낙뢰 한번 치면 일거리가 엄청나게 늘곤 했다"며 "전파사 주인들끼리 일거리가 없을 땐 농담으로 '벼락 한번 안치나'라고 농담도 주고 받았다"고 한다.

"한달 봉급이 3만5000원일 때 낙뢰 한번 치면 2~3일에 남들 월급을 벌었던 시절엔 한 달에 100~130만원 정도 수입이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1000만원 단위다"라며 호시절을 기억한다.

"납 한 타래(1㎏) 팔면 아파트 한 채 산다"는 이야기가 회자되던 시절이다. 전파사 해서 부자 안 된 사람 없었다"던 시기를 보내면서 4남매를 키웠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눈가에 웃음이 번진다.

김 대표는 5년 전 시작한 에어컨 설치기사 일로 지금은 가게를 비우는 일이 잦다. 전파사를 찾는 손님들도 예전만 못한 상황이다.

"가끔씩 어르신들이 밥솥, 선풍기, 전기장판 조절기 수리를 위해 찾는다. 누전차단기 교체 일도 잠깐씩 한다. 그래도 경비 서는 것보다는 낫다. 내 사업이고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며 "이제는 사람들이 이런 곳에 물건을 사러 오지 않는다. 그래서 물건들을 하나씩 없애는 중이다"라고 말한다.

 

▲ 금성사가 만든 에어컨. 예전 농협조합장 주택에 설치됐던 것으로 김 대표는 국내에서 한 대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 <무한정보> 황동환


그러면서 그가 응시한 곳을 따라가 보니 낡은 에어컨 한 대가 놓여 있다. "농협 조합장이었던 분이 집에서 사용했던 에어컨인데 금성사 제품"이란다. "아마도 국내에서 한 대밖에 없을 것"이란 말도 덧붙인다.

"우리 집이 최종 종착점이다. 우리 집에서 못 고치면 어디서도 못 고친다고 보면 된다"는 말에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부심이 묻어난다.

언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을까? "자식들 등록금을 호주머니에서 꺼내 건네줄 때"라는 말을 전하는 김 대표에게 기쁜소식(복음)은 여전히 자녀들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충남 예산군에서 발행되는 <무한정보>에서 취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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