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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곡진 현대사 비극, 드라마로 만들려던 작가의 고백

[안지훈의 3인칭 관객 시점] 배우 박성훈의 연극 복귀작 <빵야>

등록|2024.08.06 11:40 수정|2024.08.06 11:40
 

▲ 연극 <빵야> 공연사진 ⓒ 엠비제트컴퍼니

 

점점 잊혀지는 드라마 작가 '나나'는 소품 창고에서 낡은 장총 한 자루를 발견한다. 나나는 그 장총에 얽힌 이야기를 토대로 드라마를 쓰려고 장총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장총은 의인화된 존재 '빵야'로 표현되는데, 최근 인기 드라마 <눈물의 여왕>과 <더 글로리> 등에서 활약한 배우 박성훈이 '빵야'를 연기한다. 대학로의 인기 배우였던 박성훈이 7년 만에 다시 무대로 돌아온 것이다.

 

1945년 인천 조병창에서 만들어진 장총 '빵야'는 일본관동군, 국방경비대, 서북청년단, 국군 학도병, 인민군 의용대 등의 손을 거치며 한국 현대사를 목도한다. 그리고 자신이 바라본 바를 나나에게 이야기하며 지난 역사를 끄집어낸다. 역사책이라기보다는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일기장을 들춰내는 느낌으로.

 

김은성 작가의 희곡을 토대로 지난 2022년 첫선을 보인 연극 <빵야>는 당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에 선정, 2023년에는 <한국연극> '공연 베스트 7'에 오르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2년이 흘러 다시 무대에 선 <빵야>는 박성훈과 함께 박정원, 전성우, 홍승안 등 연기파 배우들을 '빵야' 역으로 내세웠고, 이진희와 김국희, 전성민으로 '나나' 역을 꾸렸다.

 

이외에도 오대석, 송상훈, 금보미, 진초록 등도 작품에 참여한다. 특히 '길남'을 비롯해 다양한 배역을 연기하는 최정우는 원작 희곡에 그림 작업으로 힘을 보태기도 했다. <빵야>는 9월 8일까지 대학로 예스24아트원 1관에서 공연을 이어간다.

 

장총이 전하는 현대사의 비극

 

7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내며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 굴곡진 현대사를 겪은 '빵야'는 실로 많은 주인들을 만났다. 빵야를 손에 넣은 주인들의 이야기는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현된다. 주인 중에는 살기 위해 총을 쏘는 사람도 있고, 자신이 살려면 총을 쏴야 하지만 끝내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시대였다. 총을 들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시대였다. 방아쇠를 당기라는 시대의 강요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시대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그런 시대였다.

 

빵야는 자기 몸에서 발사된 총알로 인해 누군가 죽는 것을 보며 괴로워하다가도, 방아쇠를 당기지 못해 죽음을 목전에 둔 주인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라고 외치기도 한다. 빵야는 오랜 세월 동안 같은 일을 반복하며 회의감을 느끼며 말한다.

 

"죽이기 위해 죽이는 총보다 살리기 위해 죽이는 총이 조금 나을까? 총은 총이야. 세상의 모든 총은 슬퍼."

 

▲ 연극 <빵야> 공연사진 ⓒ 엠비제트컴퍼니

 

빵야는 본래 압록강 변의 졸참나무였다. 그리고 몸의 부품은 어떤 집의 대문, 또 어떤 집의 가마솥, 그리고 호른의 일부를 떼어다가 만든 것이다. 식민주의의 야욕이, 전쟁이라는 시대 상황이 이들을 나무와 대문과 가마솥과 악기를 총으로 만든 것이다.

 

여기서 장총과 장총 주인 간의 유사성이 발견된다. 시대가 누군가를 관동군으로 만들었고, 학도병으로, 인민군으로 만들었다. 또 시대가 졸참나무를 총으로, 가마솥의 쇠붙이를 총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이유도 모른 채 누군가에게 총을 겨눠야 했고, 장총 역시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의 몸을 태워야 했다.

 

장총은 꿈이 있었다. 바로 악기가 되는 것이었다. 자기 몸을 태워 총알을 발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을 이리저리 굴려 음악 소리를 내고 싶다는 소박한 꿈은 시대의 장벽에 가로막혀 실현되지 못했다. 결국 빵야는 암흑의 시대를 견디고 견뎌 다 늙은 후에, 자신의 소박한 꿈을 욕하지 않을 시대가 되고 나서야 꿈을 고백한다.

 

역사를 소비하는 우리의 자화상

 

장총은 분명 비극의 시대를 겪었다. 그럼 지금은 희극의 시대일까. 비극의 시대는 아닐지 몰라도, 희극의 시대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지금을 사는 드라마 작가 '나나'는 장총 '빵야'를 만나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이야기하는 작품을 쓰기로 마음먹는다.

 

그런데 난관이 있다. 각본만 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각본을 드라마로 제작해 줄 제작자가 필요하다. 또 시청자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편성되어야 하니 방송사나 플랫폼으로부터 선택받아야 한다. 이런 현실적 제약은 나나에게 압박을 가한다.

 

나나의 이야기가 드라마로 제작돼 시청자에게 도달하기 위해서는, 오늘날 시청자의 입맛에 맞게 적당히 자극적이고 빠른 전개가 이뤄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장총이 들려주는 진짜 이야기는 어느 정도 각색되어야 하고, 이런 작업을 반복하다 보면 진짜 역사 이야기를 전하겠다는 애당초의 마음가짐은 흐려질 게 뻔하다.

 

장총이 목격한 역사를 단편적인 여러 개의 이야기로 나눠 풀어내는 옴니버스 형식은 '스타 캐스팅'과 조응하지 못한다. 제작자와 방송사 입장에서는 흥행을 위해 스타 배우를 캐스팅해야 하는데, 옴니버스 드라마의 특성상 많은 배우가 적당한 비중으로 나누어 출연해야 한다. 그 배우들을 모두 스타로 채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작은 비중의 배역에 스타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망설여질 수밖에 없다.

 

▲ 연극 <빵야> 공연사진 ⓒ 엠비제트컴퍼니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마저 돈의 논리를 따라야 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민낯을 보는 듯하다. 정통 사극과 대하 사극이 자취를 감추고, 퓨전 사극이 넘쳐나는 요즘의 세태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래서인지 연극을 보는 내내 '진짜 역사는 어디로 가나' 하는 의문을 떨쳐내기 힘들었다. 오늘날 우리는 역사를 기억하는 게 아니라 그저 소비하고 있진 않은지 돌아봤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장총으로부터 전해 들은 그대로의 역사를 이야기하고자 했던 나나의 고민은 더 묵직하게 다가왔다. 현실의 벽에 부딪히던 나나가 속내를 솔직하게 털어놓는 장면은 다소 묵직하다. "기억하고 기록하고 증언하기 위해" 역사를 이야기한다고 당당히 말할 수 없다는 고백. 어느새 나나는 그저 이야기하기 위해, 작품을 쓰기 위해 역사를 말하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나나의 고백은 문제의식을 품고 있었으나, 어려운 시대를 살아내며 그 문제의식을 조금씩 놓게 되는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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