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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敬)과 의(義)의 선비정신과 실천철학

[김삼웅의 인물열전 - 진짜 선비 남명 조식 평전 3] 퇴계의 사상이 관념적이라면 남명의 철학은 보다 실천적이었다

등록|2024.08.09 13:36 수정|2024.08.11 17:04
 

용암서원남명의 후학들이 지어 회산서원이라고 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서원지가 1987년 합천댐에 수몰되어 2006년 이곳 뇌룡정 옆에 복원함. 1609년 용암서원이란 이름이 사액됨. ⓒ 김진수

 
남명은 문인이면서 칼과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을 허리에 차고 다녔다. 칼에는 '내명자경(內明者敬) 외단자의(外斷者義)'라는 명(銘)을 새겼다.

"안으로 마음을 밝게하는 것은 경이고, 밖으로 의를 결단하는 것은 의이다"라는 경(敬)과 의(義)는 그의 선비정신과 실천철학의 중심가치였다. 이후 '경의' 두 글자는 "하늘의 달과 해처럼 변함없는 진리이니 힘써 지켜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하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임진왜란 때 그의 문하에서 수많은 의병장과 의병이 배출된 것은 남명의 이와 같은 실천철학에서 기인한 것이다. 누구든지 '좌우명'은 자신의 신념을 집약하는 것이지만 남명의 경우는 남달랐다.

언행 신의 있게 하고 삼가며
사악함 막고 정성 보존해야지
산처럼 우뚝하고 못처럼 깊게 해야
움 돋는 봄날처럼 빛나고 빛나리라.

남명은 학문을 연마하고 청절을 지키면서 음풍농월이나 일삼는 한가한 선비와는 격과 결이 달랐다. 나랏일에 관심이 많았고 조정의 부패에 대해서는 그때마다 매섭게 질타했다.

남명의 남명다움은 풍류적인 분방함과 올곧은 처신에 있었다. 주자학의 기존 가치관에서 벗어난 개혁의지나 유학에 바탕하면서 노장철학으로 무장한 안빈낙도의 처신은 당대는 물론 후대 선비들의 귀감이 되었다. 그는 과거 급제가 관직을 얻는 선비들의 유일한 출세의 길이었던 시대에 "관직보기를 하늘 가운데 한 점의 조각구름처럼" 여겼다.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남명의 명예는 나날이 더해지고, 조정에서 그를 찾는 일이 잦아졌다. 그리고 출사를 거부하는 일이 되풀이 되었다.

남명은 심중에 무수한 시상을 간직한 시인이었다. 어릴 때부터 천재성을 보였던 그는 시대와 불화하면서 세태와 자연에 관해 많은 시문을 남겼다. 높은 벼슬아치들을 '큰 쥐'에 비하여 쓴 <석서(碩鼠)>의 뒷 부분이다.

큰 쥐 큰 쥐야
항상 찍찍거리는구나
아첨 떨며 교묘히 남을 헤쳐
남의 마음 슬프게 하니
어떻게 불인한 고양이 얻어
한 번 잡아 씨를 말릴까
큰 쥐 한 번 새끼를 치면
쥐새끼들 온 집안에 가득
난 맘씨 좋은 영주 모씨 아니니
저 장탕의 옥에 부치리
너의 깊은 소굴 메워
종적을 멸하게 하리.
 

▲ 경상대 남명학관에 있는 남명 조신 선생 흉상. ⓒ 이우기

 
남명이 지리산 밑에 둥지를 틀고 학문 연구와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을 즈음 인근에는 퇴계 이황이 역시 출사를 중단하고 낙향하여 고고한 선비의 길을 걷고 있었다. 1501년의 동갑이고 생활권이 비슷한 데다 서로간에 소식을 익히 듣고 있었으나 생전에 한 번도 만나지 못하였다. 몇 차례 인편으로 서찰만 주고 받았을 뿐이다. 세간에서는 퇴계를 경상우도, 남명을 경상좌도를 대표하는 큰 학자로 꼽았다.

퇴계의 사상이 관념적이라면 남명의 철학은 보다 실천적이었다. 하여 임진왜란 당시 남명 문하에서 다수의 의병장이 배출되고, 강직한 제자들이 많아 조정의 대신들에 대한 잇따른 상소 등으로 크게 탄압을 받게 되었다.

남명은 숨지기 전 자신이 수양하는 데 쓰던 방울은 제자 김우옹에게, 칼은 역시 제자 정인홍에게 넘겨 주었다. 정인홍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큰 공을 세웠지만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세력이 그를 정적으로 몰아 처형하였다.

선조 4년인 1572년 남명의 나이 72살에 이르러 병세가 크게 악화되었다. 제자들이 "혹시 스승께서 세상을 떠나게 되면, 마땅히 어떤 칭호를 써야 하겠습니까?"라고 물으니, 남명은 망설이지 않고 "처사(處士)라고 쓰는 것이 옳겠다"라고 답했다.

남명은 '처사', 곧 벼슬을 멀리한 재야지식인이다. 퇴계가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을 적에 남명에게 벼슬을 추천하자 '눈병'을 핑계로 거절하면서 "경륜 없고 식견 없는 무지몽매함"을 이유로 댔다. 누구 못지 않는 경륜과 식견을 갖고 총명했던 그였다.

'처사'로서 평생을 분방하게 살아온 남명은 1572년 2월 8일 제자들에게 '경(敬)·의(義)'의 중요성을 거듭 상기하면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선조가 '통정대부 사간원 대사간'을 증직했으나 고인은 결코 사후의 큰 감투를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진짜 선비 남명 조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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