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유난히 기도가 필요한 때" 사이렌 소리에 잠을 깼다

'반이민' 혐오 불 붙은 영국 사회... "친절해라" 당부하신 시아버지 말 곱씹는 요즘

등록|2024.08.08 17:10 수정|2024.08.08 17:10
시댁 어르신의 팔순잔치가 있던 지난 3일. 내가 사는 영국 데본주에서 시댁이 있는 맨체스터 근교까지는 부산에서 서울 올라가는 거리 정도다. 평소였으면 축하카드와 선물만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아버지 장례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그까짓 교통체증이 대수인가 싶었고, 나갈 준비를 했다. 기회가 될 때면 어르신들은 더 자주 봬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기 때문이다. 힘든 여정이 될 것을 알면서도 상경 길에 나선다.

막상 고속도로에 올라보니 교통량뿐만 아니라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앰뷸런스, 경찰차, 레커 차량. 가다 서다를 수없이 반복하다 보니 빠르면 네 시간 정도면 도착하던 거리를 일곱 시간 반 만에 도착했다. 영국도 시간대를 잘 고민하지 않으면 이렇게 악명 높은 교통체증을 경험하게 된다.
 

골프를 즐기는 사람들맑은 날씨에 골프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 ⓒ 픽사베이

 
팔순잔치가 열리는 날, 골프클럽으로 가족들과 어르신 친구분들이 속속 도착한다. 영국 북서부는 워낙 비 오고 어두운 날이 많다. 하지만 이날은 유난히 햇볕 좋고 제법 더운 여름 날씨였다.

푸르디 푸른 골프클럽과 파란 하늘이 평화롭기 그지없다. 친지, 가족들에 멀리 미국 사는 아들네까지 모두 모여 어르신 팔순 생신 축하노래를 부른다. 시댁 어르신은 눈물까지 글썽이시면서 이런 좋은 날이 내 인생에 또 있겠냐 하신다. 행복해하시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모인 사람들은 한참을 그렇게 웃고 이야기 나누면서 그 좋은 날을 만끽한다.

이후 이 어르신 포함, 일가친척들은 시어머니 댁에 다시 모였다. 다시 여러 술잔들이 오고 가고 거나해진 식구들끼리 모여 TV를 켠다. 프랑스 올림픽 승전보들에 이어, 영국 여기저기 무력 충돌로 난리가 난 영상들이 뜬다. 그제야 10대 조카가 레스토랑 아르바이트 다녀와서는 '오늘 할 일이 별로 없었다'며, '근무지 근처에서 시위대와 경찰 충돌이 있어서인 것 같다'고 말한 기억이 난다.

영국은 다인종사회다. 특히 대도시의 경우에는 정말 다양한 인종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데, 이곳 북서부 지역의 경우에는 무슬림 인구가 유독 급격히 증가했다. 시댁 근처 카톨릭 성당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큰 규모의 무슬림 사원이 있다. 최근 무슬림 학교가 따로 건립되기도 했다.

물론 그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동유럽계, 힌두계, 중국인을 비롯한 아시아계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인구 규모가 커져서인지 유난히 무슬림 인구와 현지인들간의 반목이 눈에 띈다.

영국 사회는 가족과 일터 이외는 성당, 학교 아니면 펍이나 사회클럽에서 주로 사람들을 만나 교류한다. 내가 알기로 무슬림들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 종교도 확실히 다르다. 내가 팔순잔치를 위해 방문했던 골프클럽이나 크리켓 클럽 같은 곳은 현지 백인이 거의 대부분이다. 각자 커뮤니티에서 여가를 즐기는 것이다. 유년 시절 학교에서가 아니라면, 타 인종 사람들과 교류 기회는 많지 않아 보인다.

영국에서 일어난 폭동 사태
 

▲ 지난 3일 영국 리버풀에서 벌어진 시위 현장 모습(자료사진). ⓒ AFP 연합뉴스

 
지난주 영국 북서부 사우스포트(Southport)라는 해안도시에서 방학을 맞아 무용학교에 갔던 6~8세 아이들이 10대 청소년이 휘두른 칼에 희생되는 비극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3명의 어린이들이 숨지고 다른 여덟 명 아이들과 어른 두 명 또한 부상을 입었다. 범인이 18세 미만 미성년자였기에, 법에 따라 영국 경찰은 그의 신상정보를 일절 발표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SNS에서 확인되지 않은 거짓 정보가 돌기 시작했고, 급기야 '무슬림계가 한 범죄'라는 가짜 뉴스가 돌면서 영국민들의 분노가 엉뚱하게 폭발했다.

뒤늦게 나온 사정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범인은 영국에서 나고 자란 르완다 출신 가정의 17세 청소년이었다. 말하자면 이민 2세인 셈이다.

사건 발생 이후, 영국 내에선 '반이민', '반무슬림' 등 혐오적 표현이 섞인 폭력 시위가 확산 중이다. 사상자가 발생한 사우스포트를 시작으로 근처 북서쪽 대도시인 리버풀(Liverpool) 및 중소 도시들로 폭력 시위가 확산되더니, 이제는 저 멀리 북아일랜드 벨파스트(Belfast), 어젯밤(8월 5일)에는 영국남서부 대도시 플리머스(Plymouth)까지 소요 사태가 전국 단위로 확산 중이다.

현재까지 경찰 발표에 따르면 시위자 중 378명이 체포되어 구속수사를 앞두고 있고, 지금도 SNS를 통해 제2, 제3의 소요사태가 더 기획되는 중이라고 경찰은 추정하고 있다. 경찰은 이번 폭동이 '용의자가 무슬림'이라는 가짜뉴스(허위정보) 탓에 발생한 것이라 믿고 있다고도 알렸다.

이번 사건이 폭동의 직접 계기가 되었지만, 그 원인에는 사실 여러 배경이 있다. 최근 평범한 시민들 사이에 칼부림 범죄가 증가하고, 불법이민자 입국 문제, 영국으로 들어오는 난민 증가 문제 등 사회적 불만이 쌓여왔다.

영국 정부로부터 난민으로 인정되면 초반에는 정부가 제공하는 호텔에서 생활하다가 이후에는 지역 자치단체가 주는 무상 하우스가 배정된다. 그 뒤로는 일반 영국민들과 같은 사회서비스, 즉 무상교육, 무상의료서비스를 똑같이 받게 된다. 이는 모두 영국인들의 세금으로 충당된다. 그런데 막상 현지인들이 주택난과 재정난에 허덕이다 보니 그에 대한 불만이 높은 상황이다.

이민 유입을 줄이겠다던 브렉시트 공약과는 달리, 지난해엔 역대 최대 규모의 영국 내 이민이 발생했다는 뉴스가 나온다. 또 지난달 13년 만에 보수당에서 노동당으로 정권이 바뀌었다. 새로 들어선 정권의 진보적 색채를 우려하는 보수층들의 걱정이 있던 참이다.

이런 상황에서 폭동 사태에 대해 키어 스타머 새 총리가 국민의 불만을 일부 극우파의 폭력 행위(far-right thuggery)로 규정하고, 위협에 놓인 영국 내 무슬림 사회를 지키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불만이 고조된 또 다른 국민들은 경찰의 '이중 접근(two tier policing)'으로 임무 중이라며 새 정부를 비난하고 나섰다. 백인들 시위는 무력 진압하면서 무슬림 위협 행위에 대해서는 유화적으로 접근한다는 비판이다.

이번 사태는 방화 등이 포함된 폭력시위 뿐 아니라, 가장 민감할 수 있는 인종문제, 이민 문제와 연결된 문제이기도 해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긴장하는 모습이다.

모두에게 친절할 때

어쨌거나 아이들이 숨졌다. TV에서 희생된 아이들을 기리는 지역사회 주민들의 아파하는 모습, 시위대와 맞서며 또 한번 폭력에 노출된 경찰들의 모습이 보인다.

평화는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의 노고나 희생으로 가능하구나 다시 절감하는 주말이었다. 팔순 잔치가 있던 그날 밤, 몇 번의 사이렌 소리에 잠을 설쳤던 것을 보면 그 날도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밤새 이어진 듯하다.

돌아가신 시아버지는 아들만 넷을 키워내셨다. 살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순간도 많았을 테다. 돌아가시기 전에 만났을 때, 어떻게 이렇게 구성원 누구 하나 탈 없이 대가족이 이렇게 화목하게 사느냐고, 그 비결이 무엇이냐고 여쭤 본 적이 있었다.

시아버지의 간결한 대답은 "Be Kind(모두에게 친절하렴)", 만나는 모두에게 친절하라는 것. '주위 사람들에게 품을 넓게 가져라' 하는 의미로 하신 그 말씀을, 나는 여전히 마음 깊이 담아두고 있다. 일상을 살다 보면 앞서 하신 그 말씀대로 살기 얼마나 어려운지 체감하게 된다.
 

▲ 돌아가신 시아버지는 아들만 넷을 키워내셨다. 어떻게 이렇게 대가족이 화목하게 사느냐는 내 질문에 그는 간결하게 이렇게 대답했다, "Be Kind(모두에게 친절하렴)". ⓒ rodlong on Unsplash

 
서로에게 조금만 품을 넓게, 이해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인내심을 가지고 폭력이 아닌 대화로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다면.

행동으로 실천하는 게 쉽지는 않지만 내가 사랑하는 가족, 사회가 유지되려면 그 어려운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하고 문제를 함께 풀어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유난히 기도가 필요한 때인 것 같구나."

주말 미사를 함께하는 가족들에게 시어머님이 들릴 듯 말 듯 말씀하신다.

많은 사람들의 안전과 평화에 대한 염원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상황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지난 7일(현지시간)엔 전국 규모의 폭력 집회가 예정되어 있다는 소식에 온 영국 사회가 긴장한 하루였다. 상점들은 창문에 나무판자를 붙인 채 일찍 문을 닫았고, 시민들은 자체적으로 안전을 위해 외출을 자제하자는 이메일을 서로 나눌 정도였다.

그런데, 막상 집회 예상 시간이 되자 길거리에는 폭력사태에 반대하는 대규모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인종차별주의 반대' , '폭력시위 반대', '폭도들은 우리 마을에서 나가라', '우리는 난민을 환영한다' 등 피켓을 들고 말이다.
 

영국서 '극우 반대' 시위 지난 7일(현지시간) 저녁 영국 런던 브렌트퍼드에서 극우에 반대하는 시위자들이 모여 '난민 환영' 등 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영국에서는 한 주간 이어진 극우 시위에 반대하는 맞불 시위가 이날 곳곳에서 열렸다. ⓒ 연합뉴스

 
아직 사태가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폭력 시위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행동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희망이 보인다. 이 소요 사태가 가라앉기를, 어서 서로 치유하는 사회 공동체 본연의 모습을 영국이 되찾기를 바라본다.
덧붙이는 글 이글은 개인블로그와 브런치 사이트에도 게재됩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