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국군 간부 총살로 끝... 한국이 정말 반성해야 할 사건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36] 국민방위군

등록|2024.08.10 11:08 수정|2024.08.10 11:08
 

▲ 한국전쟁 당시 국민방위군의 모습. 정부의 잘못된 정책과 간부들의 극심한 부패로 5만~9만 명의 장정들이 굶어죽거나 실종됐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대한민국의 주홍글자'로 평가 받는다. ⓒ 진실화해위원회

 
대한민국이 한국전쟁을 읽어가면서 뼈를 깎는 마음으로 반성해야 할 일의 하나는 국민방위군 사건이다. 한 언론인은 보도연맹 학살과 함께 국민방위군 사건을 '대한민국의 주홍글자'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전쟁이 발발하고 며칠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육군본부가 7월 1일 수원에 위치했을 때 국군은 총병력 9만 8000명 가운데 4만 4000명이 이미 전사, 포로, 행방불명 또는 낙오 상태였다. 손실병력에 대한 보충을 포함한 대대적인 인적 동원이 급박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낙동강까지 후퇴하면서 국방부는 낙오병을 다시 모으고 흩어진 부대를 수습하기에 급급했을 뿐 병역법에 따른 체계적인 소집이나 징집은 불가능했다. 급한 대로 가두에서 모집하거나, 청년방위대원이나 학도병들이 자원해서 입대하거나, 현지 부대장들이 인근 마을이나 도시에서 반강제로 집행하는 징집이나 소집에 의존했다. 전선의 전황뿐 아니라 후방의 병력동원 역시 황망한 수준이었다. 나라 전체가 패닉이었으니.

유엔군이 증원되고 낙동강 전선에서 인민군을 저지하면서 개전 초기의 패닉 상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육군본부는 신병훈련소를 대구, 김해, 구포, 제주도, 삼랑진, 진해 등에 설치했다. 그래도 동원 행태는 아직 정상적이지 못했다. 재향군인 소집은 라디오와 신문보도를 통할 뿐이었고, 현장에서는 헌병대나 경찰, 대한청년단원들이 주택이나 피난민 숙소를 불시에 검문하여 강압적으로 데려가거나, 가두에서 모집하는 방법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후방 예비부대의 창설이 추진됐다. 방위군은 17~40세의 장정 가운데, 이미 전쟁에 동원된 장정들과 학도호국단에 소속되는 학생들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장정들을 대상으로 소집하는 예비대다.

예비대는 소집된 병력을 훈련시켜 정규군 부대에게 신속하게 병력을 공급한다. 국민방위군 설치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공포된 것이 1950년 12월 21일. 바로 그날 국민방위군 사령부가 있는 창경궁에 1만여 명의 방위군 1진이 소집됐다. 이후에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방위군이 소집됐다. 소집대상은 48만여 명이었고 나중에 68만여 명까지 늘었다.

국민방위군이 처음 소집된 시기는 중국군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돼 서울을 향해 급속하게 후퇴하는 상황이었다. 인민군이 개전 직후 38선 이남 지역을 점령했을 때 약 60만 명의 장정들이 의용군으로 차출당했던 뼈아픈 손실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남아 있던 청장년들을 방위군에 편입시킨 다음 집단으로 이동해 남부 지방에 위치한 방위군 교육대에 입소시키는 게 시급한 당면과제였다.

여기까지는 전시의 정상적인 대응조치였다. 문제는 허술하다 못해 크게 잘못된 정책과, 방위군 사령부와 간부들의 극심한 부패로 인해 최소 5만에서 9만(20만 이상이라는 추정도 있다)에 이르는 장정들이 방위군에 소집된 상태에서 굶어 죽거나 실종됐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원천적으로 정부에서 식량을 제대로 제공하지 못했고, 예산과 식량은 방위군 사령부와 현장 교육대 간부들이 무지막지하게 떼어먹어서 그리된 것이다. 방위군 병사들이 병사나 아사할 지경인데도 대열을 이탈하지 못하고 잡혀 있다가 영양실조와 추위 속에 죽어간 것이다. 국민방위군 사건을 언급했던 사람들이 종종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는데 나 역시 마찬가지 심정이다. 사건이 아니라 미필적 고의에 의한 학살이라는 비난을 당해도 그게 아니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다.

잘못된 정책과 부패한 관리가 만난 참극

긴급하지만 부실하게 소집된 예비대 병력이 아사하는 참극의 끝은 국민방위군 사령관 등 고위 간부 다섯의 총살이었다. 그것도 악화된 여론에 떠밀려 단심 군법회의를 무시하고 재심이라는 편법까지 동원해서 극소수만 겨우 처벌한 것이다. 국민방위군 정책을 총괄한 국방부장관 신성모는 해임됐고, 국민방위군은 창설 다섯 달 만인 1951년 5월 해체되고 말았다. 사망자와 실종자가 몇 명인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오리무중이다.

전쟁에 군인으로 징집됐으나 전장도 아닌 후방 교육대에서 죽은 숫자가 최소 5만이라니. 74년 전의 역사를 읽으면서도 망연자실할 뿐이다. 몇만 명이 죽은 사건은 결코 우발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여러 가지 나쁜 내력이 쌓여오다가 한날한시에 한 지점에 결집되면서 역(逆)의 시너지효과로 폭발해서 발생하는 법이다. 이 사건은 잘못된 정책과 관리의 부패가 결합하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참담한 사례다.

국민방위군 작전처장 이병국의 증언에 따르면 1만 명 가까운 병력을 후송하는 데 쌀 한 톨, 군복 한 벌 안 주고 언제까지 집결하라는 것도 없이 막연히 '착지 부산 구포'라는 작전명령을 육군본부로부터 하달받았다고 한다. 대신 양곡권이라는 것이 지급됐다. 행군 도중에 대열 책임자가 경유지의 군수나 시장에게 보이고 급식을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성모의 국방부와 조병옥의 내무부가 서로 양곡지급권을 갖겠다고 다투다가 조병옥은 시장·군수들에게 양곡을 지급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중앙정부의 부처 사이에 이견이 있으면 적절하게 협의해서 조정하면 될 일을 다투기만 하다가 군인에게 양곡을 지급하지 말라니, 아무리 대한민국이 건국초기의 취약국가라 해도 믿기지 않는 일이다.

국민방위군의 예산은 1951년 1~3월분 예산으로 209억830만 원이 책정됐다. 장병을 50만 명으로 잡고 최소한의 식량(쌀 4홉/일)과 취사연료(40원/일), 잡비(10원/일) 세 가지 항목만 책정한 것이 전부였다. 사령부는 물론 15개의 단, 49개의 교육대(1951.2 기준), 본대의 운영비, 장정들의 월급과 피복비, 의료비와 후생비 등은 일체 없었다.

서울에서 소집해 부산까지 이동하라는 작전명령서가 하달됐으나 수송비도 없었다. 방위군의 하사관과 기간사병이 9만여 명,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 교관요원 등 장교들이 2만여 명의 봉급도 없었다. 예산과 정책 자체가 사령부와 간부, 교욱대 교관과 기간병들이 방위군 예산을 뜯어먹게끔 만들어진 것이다.
 

▲ 1948년 재일대한청년단을 예방한 자리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 현직 대통령 신분으로 민간 단체인 대한청년단의 총재를 맡았다. 이후 대한청년단은 민간인 살해와 불법구금을 진두지휘하다 국민방위군 사건에까지 연루된다. ⓒ 대한뉴스

 
조직과 인적구성 역시 문제의 소지가 상당했다. 국민방위군의 사령관과 부사령관 모두 사형을 당한 것도 우발적인 일이 아니었다. 국민방위군은 대한청년단과 청년방위대를 기간으로 창설했는데 이것이 조직상의 중대한 문제가 됐다.

대한청년단은 이승만이 해방 후에 난립하던 청년단체들을 통합한 전국 조직으로 남녀 단원이 200만에 달했다. 중앙조직 아래 서울에 9개 구지부, 전국에 10개 도지부가 있었고 가장 하위에는 읍·군·가두의 지부가 4230개나 됐다. 숫자로는 대한민국의 청년 대부분을 포괄하는 초대형 우익단체였다.

한편 병역법에서는 병역에 편입되기 전의 청년들에 대해 군사훈련을 실시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다. 이를 근거로 대한청년단은 각 지부의 간부 720명을 육군보병학교 배속장교교육대에 입교시켰다. 이들은 40일간의 군사훈련을 수료하고 예비역 소위로 임관했다. 이들은 각 지부에 돌아가 인근 군부대 협조를 받아 대한청년단원들을 훈련시켰다. 대한청년단은 청년을 내세운 정치단체였지만 준군사단체의 성격도 갖게 된 것이다.

청년방위대는 이승만 정부가 1949년 11월에는 병역법에 근거해 육군본부 청년방위국이 관장하는 청년방위대를 설치했다. 충남 온양에 청년방위대 간부훈련학교에서 한 달 간의 훈련을 거쳐 방위소위로 임관했다. 청년방위대 편성은 1950년 3월에 완료됐다.

시도별로 사단급인 방위단이 있고 그 아래 지대(군, 연대), 편대(면, 대대), 구대 또는 소대(리, 중대)를 편성했다. 청년방위대의 시도 방위단장은 대부분 대한청년단의 각 지방 단장이었다. 청년방위대는 사실상 사설단체인 대한청년단에게 병역법의 청년방위대란 외피를 입힌 것이었다. 국민방위군은 바로 이 대한청년단과 청년방위대를 기간으로 창설한 것이다.

국민방위군법은 방위군이 군사행동과 훈련 이외에 정치운동 청년운동과 일반치안에 관여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청년단체를 자신의 정치활동에 동원해 온 이승만을 견제하는 장치였다. 국방차관 장경근은 국회에서 법안 취지를 설명하면서 "청년방위대가 후방 예비군 역할을 해온 까닭에 잡음과 부작용이 많았고, 법적 근거를 만들기 위해 국민방위군을 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잡음과 부작용'이 많은 청년방위대를 개선하지 않고 오히려 법적 근거까지 부여했으니, 국민방위군의 부패는 곧 대한청년단과 청년방위대의 잡음과 부작용의 동의어인 셈이었다.

1950년 12월 전선이 다시 밀리는 상황에서 창설된 국민방위군은, 조직과 편제와 예산, 실무조직의 구성과 기간요원의 교육훈련과 같은 기본업무는 일사천리로 처리됐다. 일사천리는 곧 주먹구구였고 '잡음과 부작용'을 새로운 법과 제도에 이식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국방부장관 신성모는 자신의 심복이자 대한청년단 2대 단장이었던 김윤근에게 파격적으로 준장 계급장을 달아주며 방위군 사령관에 임명했다. 김윤근은 자신이 부단장으로 거느리고 있던, 자신을 주군처럼 떠받든다는 윤익헌을 부사령관(대령)에 앉혔다. 그 아래 참모들 역시 청년방위대 간부들로 채웠다.

김윤근은 윤익헌에 대해 "돈을 만들어 내는 재주가 그와 맞먹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추천했다"고 실토할 정도였다. 방위군 수뇌부와 사령부는 신성모가 측근들로 하는 병정놀이처럼 창설된 것이다. 이처럼 잘못된 정책, 문제 있는 조직, 잘못된 인사가 단단하게 결합됐으니 무슨 사건이 일어나도 놀랄 일은 아니었던 상태였다.

약탈과 전염병... 참담한 현장

그 결과 국민방위군의 현장에서 벌어진 일은 참담하기만 하다. 진실화해위원회의 보고서(2010) 일부를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국민방위군에 소집된 자들의 주요 목적지인 대구, 경산, 마산, 부산, 통영 등에 도착하면 신체검사가 행해졌다. 일단 신체가 건강한 장정은 현역병이나 국민방위군 기간병으로 선발됐으며, 여기서 불합격 인원은 영천이나 울산, 사천, 진주 등의 교육대로 다시 보내졌다. 거기서도 본부대와 지대로 재편성되어 인근의 수용시설로 보내졌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병약한 자는 자꾸 걸러져서 열악한 환경으로 밀려나 죽음으로 내몰리는 상황이 됐다.

국민방위병의 배급식량은 1인당 4홉으로 전쟁포로들보다 적었다. 의약품은 거의 전무하였다. 그런데 교육대 간부들은 식량을 빼돌려 부정처분을 하거나 횡령하기 일쑤였다. 일부 간부들은 장정들의 주먹밥을 떼어내거나 쌀을 통째로 상인에게 팔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방위군의 조직구성은 청년방위대의 인적 구성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었다. 애초에 군 경력이 거의 전무한 대한청년단 배속장교나 청년방위대 장교 출신들에게 벼락 진급을 시켜 관리를 맡겼던 것부터 부실의 원인이 됐다. 사령부 자체가 부정을 일삼았으므로 내부 감시체계마저 마비되어 교육대가 해체될 때까지 부정과 횡령은 전면적으로 계속되었다.

배급되는 식사의 양은 갈수록 줄어들어 나중에는 계란 만한 소금 주먹밥이 나왔고, 굶주림에 직면한 국민방위병들은 민가에 뛰어들어 구걸이나 약탈을 하고, 너무나 배가 고파 소나무 껍질, 땅속의 메뿌리, 정미소 벽에 붙은 왕겨, 인분을 뿌린 밭작물도 마다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먹었다. 심지어 우물가 수채에 버려진 밥풀을 주워 먹기도 했고, 바닷물을 먹고 사망에 이른 경우도 있었으며, 밥을 훔쳐 먹다 기간사병에게 맞아 죽기도 했다니.

이렇게 열악한 영양공급 상태와 비위생적인 환경 속에서 다수의 인원을 집단수용 하게 되자 발진티푸스 등 유행병도 급속히 퍼져 사망자가 속출했으나 교육대는 별 대책이 없었다. 환자가 생기면 닭장, 옹기가마, 창고 등 별도의 장소에 따로 격리했다가 죽으면 들것에 실어 아무 데나 묻어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나마 교육대 근처에서 사망하면 암매장지라도 추정할 수 있었으나, 길가에서 죽은 많은 장정들은 사망지점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사망자 명단도 가족에게 통지한 게 없었다. 살아 돌아온 고향 친구가 사망사실을 알려주는 게 고작이었다. 거의 모든 교육대에서 사망사실이 확인됐으며, 많게는 수용 인원의 90% 이상이 죽었다는 증언이 있는 바, 이를 그대로 믿기 어렵지만 당시 처참했던 상황을 인정하기에는 충분하다.

그러나 국가는 너무 안일하게 대처하였다. 국방부는 국회에서 유엔 구호물자는 유엔 중앙구호위원회의 정책상 민간이 아니면 배정할 수 없으며, 국민방위군이 정규군이 아니기 때문에 원조물자를 배정할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제2국민병에 잘 조치하라는 이승만대통령의 지시(1951.1.11.)에도 불구하고 3월 중순이 돼서야 귀향이 시작됐다. 그동안 교육대에 구호물자가 즉각 지급되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다.

두 차례에 걸친 수사와 재판 끝에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을 포함한 5인이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됐으나, 피해를 입은 국민방위병과 그 유족들에게는 별다른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정부가 취한 최선의 구호사업이 바로 1951년 4월 15일에 시작된 귀환장정환자 치료사업이다. 이 사업 결과 1만1298명의 국민방위군 환자를 전국 10개 진료소에서 치료해 결국 575명은 치료 도중 사망했고, 퇴원자 1만371명과 환자 352명이 잔류했다.

인민공화국 치하에서 인민군에게 의용군으로 끌려갔다가 다시 국민방위군에 자원입대한 5대 국회 민의원 서태원은 "인민군 의용군 시절에는 주먹밥이나마 하루 세 끼를 거른 적은 없었지만 국민방위군으로 남하할 때는 병자와 아사자가 속출해도 아는 체하는 사람도 없었다"고 증언했다.

국가는 충분히 반성했는가
 

▲ 1951년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을 포함한 5인이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되는 장면. ⓒ KBS 갈무리

 
생각하면 할수록 이 땅의 백성들에게 참으로 가혹한 시대였다. 발 빠르게 피란하지 못한 사람들은 인민군에게 끌려가서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기 일쑤였다. 인민군 치하에서 운 좋게 살아남아 봤자 수복 후에 부역자로 즉결처분이나 당하는 처지였다. 반대로 재빠르게 피란길에 나섰으나 불시검문에 걸려 국민방위군으로 소집되거나, 처음부터 정부의 동원령에 순응해 국민방위군에 들어가서는 전투도 아닌 상황에서 굶어 죽은 것이다. 이런 참담한 선택지가 바로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제시됐었다니. 이를 과연 사람의 운명이라 할 수 있을까.

달리 생각하면, 중국군에 밀려 다시 후퇴하면 인민군이 또 장정들을 끌어갈 것이니, 그보다는 길에서 굶어 죽더라도 우리가 끌고 가는 게 낫다는... 그런 발상은 아니었기를 빌어야 할 판이다.

국가보훈부에는 전국의 국가수호 현충시설 리스트가 있다. 모두 1324개 시설(2024년 6월 30일 기준)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어 나의 한국전쟁 답사여행에서 중요한 기본자료의 하나다. 이 리스트에는 국민방위군 관련 시설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전북 무주의 '국민방위군 6.25 무주수복 공적비'이고 다른 하나는 충북 보은에 있는 '국민방위군 의용경찰 전적기념탑'이다. 두 개 모두 지역의 국민방위군이 인민군과 벌인 전투를 기록한 것이다.

애초에 전투부대가 아닌 후방의 예비대였기 때문에 전투의 공적으로 기록될 기회는 적었다. 그러나 주둔 지역에서는 치안활동에 참여했기 때문에 일부 전투가 있었고 미약하나마 이런 시설물이 남게 됐다.
 

▲ 충북 보은에 있는 국민방위군 의용경찰 전적 기념탑. ⓒ 윤태옥

   

▲ 국민방위군 6.25 무주수복 공적비. ⓒ 윤태옥

 
그런데 지금까지 살폈다시피 국민방위군이 널리 알려지고 기억되는 것은 부패사건이라는 오명 때문이었다. 희생자가 5만~9만 명이나 됐고 국가적으로 중대한 과오였으니 희생자들에 대한 위로나 추모, 정부와 군의 반성과 다짐과 같은 현충시설이 있을 만하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정부나 군대와 같은 국가기관의 과오는 일체 공론에 허용하지 않으려는 권위주의 시대가 길었기 때문일까.

민주화 이후에는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신청인 김OO 등이 신청한 국민방위군 운영 및 관리 과정에서 인권침해 사실이 확인됐다"고 결정한 것이 있을 뿐이다. 민주화 이후에도 이같은 국가폭력에 대한 추모와 반성을 보여줄 만한 가시적인 조치가 미미했다는 사실도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