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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D-100, 우연히 본 아이 성적표에 흔들렸다

[아이들은 나의 스승] 방학 중에도 등교하는 고3 막내의 숨 막히는 일상

등록|2024.08.06 16:51 수정|2024.08.06 16:58
 

▲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일인 지난 2023년 11월 16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여고에서 수험생들이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올해 고3인 막내딸은 여름방학 중인데도 학교에 간다. 이른 아침 식사도 먹는 둥 마는 둥 고양이 세수만 하고 집을 나서는 모습이 학기 중보다 더 바쁘다. 학교까지 채 10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지만, 차에서 잠깐 눈을 붙이는 시간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말이 가엾기만 하다.

 

7시 40분 경인데 늦었다며 교실로 부리나케 뛰어 들어간다. 이미 친구들이 여럿 와 있어 자습실의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는 틀렸다며 뾰로통한 표정이다. 별도의 방학 중 보충수업이 없어 같은 공간에서 종일 자습하며 하루를 보내야 하기에 자리 선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거다.

 

방학 중에는 학교 급식소가 운영되지 않기에 따로 도시락을 챙겨야 한다. 덩달아 아내는 날마다 새벽부터 일어나 김밥을 싸느라 분주하다. 그래선지 은근히 개학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눈치다. 하루 자습이 끝나는 오후 4시 반에 맞춰 다시 학교로 태우러 가야 한다.

 

물론, 고3의 일과는 오후 4시 반에 끝나지 않는다. 잠깐 집에 들러 간식을 챙겨 먹기도 하지만, 대개 곧장 스터디 카페로 향한다. 하교는 하루 자습의 '후반전'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저녁은 인근 분식점에서 때우기 일쑤고, 그렇듯 고3의 '루틴'은 자정이 다 되어서야 끝이 난다.

 

한번은 늦은 밤인 데다 비마저 내려 스터디 카페로 배웅을 나간 적이 있다. 아이로부터 건네받은 제 몸만 한 책가방의 무게가 여간 만만치 않다. 교실의 사물함에 넣어두고 다니면 좋겠다고 했더니, 매일 꺼내 공부해야 할 책이라 그럴 수 없다고 단박에 무지른다.

 

'행복'은 성적 순이 아니라 말했지만

 

그 시간 집에 와서도 공부는 이어진다. 책상에 앉지 않은 채 곧장 침대에 누우면 불안하다는 거다. 침대의 머리맡에도 영어단어장과 스탠드가 놓여 있다. 잠들기 전 단 몇 분이라도 허비할 수 없다는 간절함이 엿보이지만, 부모로서 과연 제대로 잠들 수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아이의 잠드는 시간은 일러야 새벽 1시께다. 잠이 모자라면 일상이 흐트러진다고 조언하지만, 또래 수험생 중에 자기보다 먼저 자는 경우가 없을 거라며 심드렁하게 답한다. 그 늦은 밤 건너편 아파트의 불 켜진 곳들은 하나같이 고3 수험생이 사는 집일 거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아이는 하루에 채 5시간도 못 자고 일어나야 한다. 명색이 부모인데, 그보다 먼저 잠드는 날이 많아져서 미안한 얼굴로 아침을 맞는다. 졸린 눈 비벼가며 수건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매일 보는 게 괴로울 따름이다. 수능만 끝나면 이 '루틴'도 끝나게 될까.

 

우연히 아이의 모의고사 성적표를 보게 됐다. 사실 중학교에 입학한 이후부터 아이에게 성적표를 보여달라고 한 적도 없고,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인터넷에서 간단히 조회만 해도 알 수 있었지만, 부러 하지 않았다. 담임선생님과의 상담 때도 성적 이야기는 되도록 피했다.

 

그러잖아도 주변에서 성적에 대한 압박이 클 텐데, 부담을 가중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컸다. 한편으론, 부모이기 전에 교사로서, 점수와 등급 등 계량화된 지표로 아이들의 재능과 역량을 평가할 수 없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도덕 시험을 잘 봤다고 도덕적 인간이라 단언할 수 없다.

 

무엇보다 대입 하나로 인생이 결정된다는 뿌리 깊은 편견에 맞서는 나만의 방식이었다. 부모의 신념 때문에 자녀의 미래를 희생시키는 건 잘못이라는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지만, 굴하지 않았다. 행복은 성적 순이 아니라는 '진리'를 언젠가 아이 스스로 증명해 내리라 믿었다.

 

'Carpe Diem!' (현재를 즐겨라)

 

교직에 첫발을 내디딜 무렵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며, 감동했고 성찰했고 다짐했던 문구다. 무릇 교사라면 아이들 앞에서 그렇게 가르쳐야 한다고 하루에도 수십 번 되뇌었던 말이다. 부모는 자녀 앞에 모두가 교사다. 부모가 자녀에게 건네야 할 금언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행복을 느끼는 것 역시 배워서 터득해야 할 중요한 역량이다. 지금 소소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이는 미래에 찾아오는 행복을 누리기는커녕 알아채지도 못한다. 확실하지도 않은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의 행복을 희생시키는 건 바보짓이다. 행복은 저당잡힐 수 없는 가치다.

 

부모로서, 교사로서, 30년 가까이 이렇게 다짐하고 실천하며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 우연히 본 아이의 성적표에 잠시 흔들렸다. 누가 고등학교 교사 아니랄까 봐, 그가 바라는 곳에 진학하기가 어렵다는 계산이 본능처럼 스쳐서다. 더 노력해야 한다는 '야만적인' 생각마저 들었다.

 

방학 중인데도 전쟁 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는 아이에게 더 노력해야 한다는 건, 차라리 죽으라는 이야기다. 몇 해 전 한 학부모와 상담 중에 무례를 범한 적이 있다. 그는 한사코 자녀의 성적이 오르지 않는 원인을 노력이 부족한 탓으로 돌리기에 도중 말을 끊고 '바루어' 주었다.

 

"머리는 좋은데, 노력이 부족한 것 같아요. 공부 시간을 조금 더 늘릴 수 있도록 따끔하게 질책해 주십시오.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될 것도 같은데."

 

"하루에 네다섯 시간밖에 못 자고 학원과 독서실을 순례하듯 하는데, 더 노력하라고 채근했다간 건강을 해치게 될 겁니다. 어쩌면 노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머리가 나쁜 것 아닐까요?"

 

그랬던 내가 고3 수험생의 학부모 처지가 되니, 그 학부모와 별반 다르지 않게 됐다는 생각에 흠칫 놀란 거다. 교단에서 아이들에게 건넨 말과 학부모로서 자녀에게 건넨 말이 다르다면, 그건 위선이다. 나아가 명색이 교육자로서 도덕적 자질 부족을 드러낸 것이나 마찬가지다.

 

수능은 100일 남았지만, 인생은

 

▲ 한국의 고3은 쉴 틈이 없다. ⓒ unsplash


하마터면 주춤한 성적에 애면글면할 막내 앞에서 큰 실수를 저지를 뻔했다. 자녀의 올곧은 성장에 가장 큰 장애물은 부모의 위선이다. 삶으로 보여주지 못하는 부모의 가르침은 자녀에게 왜곡된 가치관만 심어줄 뿐이다.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라는 금언을 되새겨야 한다.

 

팔불출 같지만, 부모로서 지난 18년 동안 아이의 적성과 재능을 똑똑히 봤다. 사회적 이슈를 주제로 토론하는 걸 즐기고, 힘들어하는 친구들을 외면하지 못하는 오지랖을 지녔다. 언뜻 고지식해 보이지만, 사소한 불의조차 용납하지 않고 따져 바루려는 정의감이 누구보다 강하다.

 

그것들은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중요한 역량인데도, 계량화된 지표로 산출할 수 없다는 이유로 철저히 무시된다. 숫자로 계량화될 수 있는 것들만 평가받는 현실에선 성적이 좋은 아이가 다른 역량도 모두 뛰어난 것으로 '마사지'되기 일쑤다. 학생부종합전형의 한계로 지적된다.

 

수능과 학생부종합전형 사이의 양자택일 문제가 아니다. 이든 저든 아이들의 재능과 역량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을뿐더러 그들이 지금 누려야 할 행복을 짓누르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오로지 대입 준비에 10대 시절을 다 보낸 우리 아이들에게 최소한의 연민조차 사라진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오늘도 파김치가 돼 있을 아이를 태우러 가는 길, 라디오에선 수능이 100일 남았다며 모든 수험생 파이팅을 외치는 목소리로 요란하다(202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날짜는 11월 14일로, 6일 기준 100일이 남았다). 수능 100일은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 경건한 기념일로 자리 잡았다. 모두 힘내라는 말만 할 뿐, 그것이 지금 수십만 수험생들에게 저지르고 있는 '패악질'에 대한 고민은 아예 찾아볼 수 없다.

 

라디오 속 '고진감래'라는 말조차 가증스럽다. 수험생들을 속이는 셈이어서다. 말뜻 그대로, 수능이라는 고통이 끝나면 행복한 시간이 펼쳐질까. 그게 아니라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안다. 수험생 대다수에게 열패감을 안기는 대입이 사라져야 비로소 행복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아이들은 언제쯤 깨닫게 될까. 수능은 100일 남았지만, 아이들의 인생은 100년 가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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