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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경기도청은 왜 광화문에 있었을까

[지명을 통한 서울여행] 세종로 600년의 역사를 보다

등록|2024.08.09 11:29 수정|2024.08.09 11:37
현재 우리가 발을 딛고 살며, 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지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그 범위는 서울이 중심이 될 것이며 또 서울의 해당 지명에 조응하는 전국의 지명들을 함께 비교 검토할 것이다. 단순히 지명 유래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지역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 등을 함께 이야기 하며 그 곳에서 벌어진 우리의 역사를 상상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고자 한다. <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 <서촌을 걷는다> 등 서울의 도시 탐방에 관한 책을 쓴 바 있다.[기자말]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서울 탐방을 통한 지명 유래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그 시작은 조선의 한양천도 이후 현재까지 서울의 중심 역할을 해온 광화문네거리에서 시작하기로 한다. 우리의 도로법은 서울의 기준점을 뜻하는 '도로원표'의 기준을 광화문네거리로 삼고 있다. 즉 우리의 수도가 서울이며 그 중에서도 서울의 기준점이 광화문네거리인 셈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도로원표가 위치한 법정동, 즉 '세종로'를 이 글의 출발점으로 하는 것은 당연하다.
 

▲ 법정동으로서의 종로구 '세종로' ⓒ 유영호

 
법정동으로 '세종로'는 광화문네거리부터 북쪽으로 광화문광장, 경복궁, 청와대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광화문통(光化門通)'으로 불리던 것을 해방 후 1946년 일본식지명을 정리하면서 세종대왕이 인근의 준수방(俊秀坊, 종로구 통인동 일대)에서 태어났고, 또 한글창제 등 그의 업적이 대단하여 세종의 묘호를 빌어 '세종로'로 고친 것이다(일본식 행정구역 명칭인 통(通)은 우리의 로(路)에 해당하며, 정(町)은 우리의 동(洞)에 해당한다. 따라서 1946년 일제강점기 사용되었던 ~통(通)과 ~정(町)을 ~로(路)와 ~동(洞)으로 일제히 바꾸었다).

참고로 일제강점기 '세종로 1번지'는 조선총독부가 위치한 곳이었으며, 해방 후에는 그 공간을 차지한 중앙청이 이어받았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그 1번지는 청와대로 바뀌었고, 또 1995년 옛 총독부건물조차 철거했지만 세종로 1번지는 경복궁에게 돌아간 것이 아니라 여전히 청와대 자리에 부여되어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1968년 1.21청와대습격 사건 이후 전국민의 감시와 통제를 위하여 같은 해 11월 주민번호라는 개인별 고유번호를 부여했을 때 박정희 대통령 부부가 받은 번호는 각각 110101-100001과 110101-200002였다.
 

▲ 1968년 주민등록번호를 최초로 도입할 당시 주민번호의 기입체계, 당시에는 앞번호 6자리가 생년월일이 아니라 거주지역을 표시했다. ⓒ 유영호

 
표에 나타난 바와 같이 당시의 주민번호 배열방식은 지금과 달랐다. 이 방식에 따르면 당시 대통령 가족의 주민번호를 모두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세종'과 관련된 전국 지명들.

▷ 경기도 여주군 세종대왕면 : 세종대왕을 모신 영릉의 서쪽에 위치한다 하여 본래 능서면(陵西面)이라 하던 것을 2021년 12월 세종대왕면으로 개칭하였다.

▷ 세종특별자치시 세종동 : 인구가 증가하면서 2023년 3월 새롬동에서 분리 신설되었으며, 세종시이기에 세종동이라 작명 되었을 뿐 세종대왕과 특별한 인연은 알려진 바 없다.

'세종로'의 역사적 변천 과정 

▲ 시대별로 본 종로구 세종로의 변천과정 ⓒ 유영호

 
청와대-경복궁-광화문광장 등 법정동 세종로를 차지하고 있는 세 곳가운데 광화문광장의 변화를 살펴보면 위 사진과 같다. 이 가운데 이 곳의 변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몇 곳만 간단히 보충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 기로소(耆老所)
쉬운 말로 표현하면 나이 먹어(51세) 퇴임한 고위관료들을 위한 국립경로당에 해당한다. 뿐만 아니라 1765년(영조41)부터 국왕도 참여하면서 관부서열 1위로 법제화되었다.

▷ 기념비전(紀念碑殿)
 

▲ 1902년 고종이 왕이 된지 40년을 기념하여 제작된 ‘서울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가 모셔진 '기념비전' '도로원표'도 1935년 이곳에 옮겨져 있다. ⓒ 유영호

 
1902년 고종이 왕으로 등극한 지 40년을 기념한 '서울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를 보존하고 있는 전각으로 왕과 관련된 건축물이기에 '기념비각'이 아니라 '기념비전'이라 명명된 것이다.

유교사회에서는 건축물도 각 기능과 역할에 따라 건물명칭 뒤에 전당합각제헌루정(殿堂閤閣齋軒樓亭) 가운데 한 글자를 따서 붙이는데 그 중 '전(殿)'은 임금이나 왕비와 관련된 건물에 붙는 명칭이다. 한편 1902년은 고종 역시 51세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가게 된 것도 함께 기념하고 있다.

▷ 도로원표(道路元標)

위 그림 속 붉은 점은 앞서 설명한 도로원표가 1914년 처음 위치했던 곳일 뿐만 아니라 현재 표석은 옮겨졌어도 법률상 서울의 도로원표의 기준점이 되는 곳이다. 당시 설치된 표석은 1935년 길 옆에 위치한 칭경기념비전 옆으로 옮겨졌고, 1997년 현재 광화문빌딩 남쪽 세종로파출소 앞에 새롭게 설치해 놓았다.
 

▲ 도로원표에 대한 남북 각각의 모습. 사딘 속 평양의 '나라길시작점' 바로 위가 김일성광장의 주석단이며, 서울의 도로원표는 현재 광화문네거이 세종로파출소 앞에 설치되어 있다. ⓒ 유영호

 
참고로 북한은 평양시 김일성광장 주석단 바로 아래 위치해 있으며 그 이름도 일본이 작명한 도로원표가 아니라 순 우리말로 '나라길 시작점'이라고 한다. 그리고 미국은 워싱턴 백악관 앞에 위치해 있으며 그 명칭은 제로마일스톤(Zero Milestone, Kilometre zero)이다. 또 프랑스는 노트르담 성당 앞에 설치되었으며 명칭은 제로 포인트(Zero Point, (프랑스어)Point zéro (topographie))이다.

▷ 경기도청
 

▲ 1930년대 경기도청의 모습|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일본지리풍속대계-조선편, 신광사, 1930 ⓒ 서울역사박물관

 
경술국치 직후 한성부가 경기도 산하의 경성부로 강등되고 바로 그 해 경기도청을 이곳에 설치하였다. 참고로 광화문으로 오기 전 조선시대 경기감영은 한양도성 밖 지금의 지하철 서대문역 인근의 적십자병원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그후 갑오개혁을 거치며 1896년 경기도 수원으로 이전했다가 14년 뒤 서울로, 그것도 가장 핵심인 경복궁 바로 앞으로 온 것이다. 그리고 해방이 되자 1946년 서울은 서울특별시가 되고 경기도와 분리되었지만 경기도청은 계속 광화문에 위치하였다가 1967년 6월에야 경기도 수원으로 이전하였다.

▷ 경성법학전문대학

1895년 최초의 국립법학교육기관으로 '법관양성소'란 이름으로 설립되었으며, 1903년 위 그림 속에 위치한 광화문 육조거리 가운데 호조 건물로 이전하였다. 경술국치 후 여러 번화를 겪다 1922년 관립 경성법학전문학교로 승격되면서 3년제 전문학교로 개교하였고, 1937년 청량리로 이전하였다. 해방 후에는 미군정의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국대안)에 따라 6년 과정의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와 함께 지금의 서울대 법대를 이루게 되었다.

▷ 세종문화회관
 

▲ 1972년 12월 3일자 한국일보. 이렇게 전소된 서울시민회관 자리에 지금의 세종문화회관이 건설된 것이다. ⓒ 한국일보

 
본래 이곳은 1956년 이승만정권 시절 그의 호를 따서 '우남회관'으로 착공하여 1960년 예정 준공일과 맞춰 그 때 있은 대통령선거 후 취임식을 이곳에서 개최하려고 하였지만 4.19로 무산되었고, 그 이듬해 준공된 '서울시민회관'이 있던 곳이다. 하지만 1972년 12월 'MBC 10대가수 청백전'이 열리던 중 화재로 전소되고 1978년 세종문화회관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지어진 건물이다.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1962년도 국가재건최고회의 시무식에서 연설하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모습. 당시 최고회의가 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입주해 있었다. ⓒ 대통령기록관

 
이 건물은 현 미대사관 건물과 함께 1961년 같은 시기에, 같은 설계로 건설된 쌍둥이 건물이다. 마침 준공시기에 5.16쿠데타가 일어나 이곳을 제일 먼저 사용한 기관은 쿠데타세력인 '국가재건최고회의'며, 3층 북동쪽(경복궁쪽) 끝 방은 당시 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가 쓰던 방이다.

그 후 이 건물은 경제기획원, 재무부 등 여러 행정기관들이 사용하였고, 맨 마지막 사용한 주체는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유인촌)가 사용했으며, 해당 장관들이 박정희의 방을 이어받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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