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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과 함께 살아가기

등록|2024.08.09 10:05 수정|2024.08.09 10:05
그칠 것 같지 않던 비가 멈추니 따가운 햇빛에 살이 익을 것 같은 무더운 날이 이어진다. 비가 올 때는 비가 내려 마당일을 하기 어렵다는 핑계로 손 놓고 있었다. 비가 오는 건 싫지만 비는 덕분에 일을 안 해도 되는 좋은 핑곗거리가 됐다.
 

▲ 필자 정원에 찾아온 새 손님 홍줄노린재 ⓒ 용인시민신문

 
조삼모사 아니,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는 속담이 딱 맞는 시절이 도래했다. 장마 전에 우습게 보이던 풀들이 하루에 10cm는 족히 자란 듯한 모양이다.

손가락만 하던 풀들은 필자 키를 훌떡 뛰어넘고도 남았고, 잘 자라던 고구마순은 풀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다. 게으른 농부의 결과다. 뒤늦은 후회로 다시 풀과의 전쟁을 선포하며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 풀을 뽑았다.

몇 년 전 기존 밭이었던 터에 1m 가까이 마사토를 쌓아 집터를 조성했다. 거름기 하나 없는(아마 땅속 깊은 곳에서 햇빛을 본 적도 없었을) 흙은 풀씨 하나 없는 순결한 상태였다.

흙을 쌓아주던 기사님이 새 흙이니 풀 걱정은 없을 거라고 했는데, 정말 첫해는 풀이 자라지 않아 편하게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풀이 안 자라는 땅은 당연히 정원수나 꽃에도 좋은 환경일 리 없었다.

그 결과 나무나 꽃을 심어도 잘 자라지 않고 생명만 연장하는 정도로 근근이 살아있는 상태였다. 몇 년에 걸쳐 거름을 주고 물도 주고 죽은 것들은 새로운 나무들로 교체하면서 그나마 성장세가 붙어 요즘은 '나도 정원입니다' 하고 소개할 수 있을 정도의 상태가 됐다.
 

▲ 작은 그늘을 만들어 주는 풀 ⓒ 용인시민신문

 
물론 풀도 예외는 아니어서 애써 심은 꽃 반, 알아서 자란 풀 반으로 풀들도 아주 잘 자라고 있다. 쑥쑥 자라는 풀을 뽑으면서 깨달은 달라진 정원 모습 중 하나는 흙의 상태다.

첫해 딱딱하게 굳은 마사토로 삽질하기도 어려웠던 흙은 올해 유난히 부드러워지고 색깔도 짙은 갈색으로 변했다. 풀뿌리가 땅속 깊이, 혹은 얕지만 넓게 퍼져 딱딱하게 굳어있던 흙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잘 자란 풀잎은 그늘을 만들어줘 지렁이나 벌레들이 땡볕에 노출되지 않아 잘 살 수 있게 해준 것 같다. 지렁이들이 잘살게 되니 흙 상태는 점점 더 좋아졌다.

그 덕분에 어느 해보다 꽃들도 잘 자라고 있다. 필자가 애지중지 키운 꽃들에게 피해를 주고 훼방 놓는 골칫덩어리라고 여겨졌던 풀이 마당 생태계에선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 올해에도 찾아온 산호랑나비 애벌레 ⓒ 용인시민신문

 
잘 자라는 꽃에도 여러 손님이 찾아온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찾아온 산호랑나비 애벌레는 마당에 널린 산형과 식물인 아미초 잎을 열심히 뜯어 먹고 있다. 처음으로 정원에 나타난 홍줄노린재도 산형과 식물의 꽃과 열매를 좋아한다.

여러 마리가 한 나무에 붙어있는 모습은 신기하면서도 생경한 풍경이다. 나비와 벌, 등애는 꿀을 찾아 여러 꽃 사이를 배회한다. 넘쳐나는 벌레는 새들의 좋은 먹잇감이니 새들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맛집이라고 소문난 듯 갖가지 새들이 마당을 훑고 다닌다.

예쁘지 않다고 천대받는 풀 한 포기에 마당 생태계가 다채로워지고 풍성해졌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필자는 팔을 걷어붙이고 풀을 뽑는다. 분명 풀과의 전쟁에서 질 테고 그 덕분에 풍요로워질 생태계를 예측하지만, 정원의 아름다움을 포기할 수 없기에 오늘도 호미를 든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용인시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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