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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었던 부하의 배신... 숨어있던 전봉준의 마지막

전봉준 피체지, 전북 순창군 쌍치면 금성리 피노마을에 가다

등록|2024.08.11 19:35 수정|2024.08.11 19:35
2024년이 동학혁명 130주년이다. 처음엔 반역에서 동학란으로, 또 그사이 동학농민전쟁이었다가 백주년에서야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름 하나 바꾸는데 백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동학혁명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혁명에 참여했던 오지영 선생이 지은 <동학사> 한 권을 들고 전적지를 찾아다니며, 그 답의 실마리나마 찾아보려 한다. 우리를 되돌아보는 기행이 되었으면 한다.[기자말]

전봉준이 붙잡힌 지역이라 그런지, 생경하다. 여느 농촌일 따름인데 말이다. 피노리 길을 전봉준과는 다르게 잡아 보았다. 가고자 했으나, 끝내 가지 못한 그의 길이기도 하다. 정읍 산내 종성리에서부터 길을 거꾸로 더듬었다. 그곳에서 김개남을 만나려던 그의 생각을 좇아서다.

그 겨울, 눈은 무릎 넘게 쌓였으리라. 바람은 또 얼마나 맵차고 드셌을까. 사방이 산으로 막힌 고즈넉한 산골 주막 아랫목이다. 따뜻한 구들은 어미 닭의 품처럼 뽀송하다. 뜨끈한 국밥은 천상의 한끼다. 그때 담밖에서 괴한들 악다구니가 요란하다.

순간 그의 마음은 어디에 잇닿았을까. 배신감에 치를 떨었을까. 영웅도 어쩔 수 없다며 한탄했을까, 아니면 탈출할 방도를 모색했을까?
 

피노리 가는 길(박홍규 화백)매서운 한 겨울, 일행 몇과 권토중래를 꿈꾸며 험한 산길 따라 김개남을 만나러 가는 길, 중간이 피노리다. ⓒ 이영천(대뫼마을 촬영)

 
전봉준이 논산에서 어느 스님을 만난 일화가 회자한다. 스님은 "계룡과 경천을 조심하라"는 말을 전해준다. 전봉준은 이를 공주 계룡산과 그 아랫말 경천으로 이해했단다. 우금티 패배에 견주어 격려로 여겼단다. 그러나 이는 전봉준의 신상에 관한 내용이었다.

포악한 노론(老論)을 피(避)해 왔다는 순창 쌍치 피노리(금성리)에도 이 둘은 있었다. 국사봉 줄기가 남으로 뻗어 뾰족이 솟은 '계룡산'이 하나다. 그 산자락 아랫말 피노리엔 김씨 성의 '경천'이란 자가 머물고 있었다. 여기서 붙잡히고 말았으니, 영웅도 운이 다했다며 시절을 탓할만하다.
 

피노마을험준한 산들이 이룬 작은 분지에 앉은 피노마을. 사진 중간 나무 뒤가 전봉준 피체지로 알려진 자리다. ⓒ 이영천

 
피노리 가는 내내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살면서 누구나 몇 번의 죽음을 마주한다. 부모나 가족의 죽음은 평생 뇌리에 남는다. 나와 무관한 죽음을 새긴다는 건 그래서 무척 예외일 수밖에 없다. 영향을 크게 받았거나,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게는 전봉준이 그러했다.

숨 죽이며 살피는 일본군 동정

전라남북도를 경계 짓는 노령의 몸피는 굵고 억세다. 서남으로 뻗어오던 산맥이 마지막 힘을 다해 웅장한 산들을 잇달아 세우곤, 서해로 머리를 풀어 사그라든다. 방장산과 입암산, 백암산, 내장산이 늘어선 산세는 그래서 험준하다.

이곳을 넘는 갈재도 구절양장이다. 남도에서 전주, 한양으로 가는 이 고개 동북쪽에, 험한 산세에 의탁한 입암산성이 앉아 있다. 백양사와 순창으로 가려면 반드시 입암산성을 지나야 한다.

갈재를 넘은 전봉준 일행이 암암리 도움을 준 입암산성 별장 이종록을 찾아간다. 벗이지만 그는 관리다. 그러나 개의치 않고 전봉준 일행을 환대한다. 그의 인품이 치열한 전쟁과 허리를 휘감는 눈길의 피로를 녹여준다. 따스한 구들장은 내 집 같다. 여기서 일본군의 동정을 살핀다.
 

입암산성전남북을 가르는 경계. 전주와 한양으로 오가는 길목을 지키는 군사상 요지에 산성이 앉아 있다. ⓒ 국가유산청

 
권토중래의 기세로 싸움을 이어가야 한다. 힘을 길러야 한다. 뼈저린 패배를 맛보지 않았던가. 여러 동지의 거취를 추적한다. 그러함에도 당분간 은둔이 불가피할 것이다. 치욕일망정 훗날을 기약하려면, 깃털 같은 목숨이나마 보전해야 한다.

산내 종성리에 김개남이 은거하고 있단다. 우선 그를 만나야 한다. 그리곤 안개처럼 한양에 들어, 안팎으로 나라 돌아가는 정세도 살펴야 한다. 이종록의 후의에 감사하며 길을 나선다. 백양사 청류암에서 하루를 보낸다.

정읍 토호들이 민보군을 동원, 길목마다 지키고 있어 산속으로만 길을 잡는다. 내장산과 백양사 사잇길을 무사히 빠져나온다. 순창에 이르러 복흥으로 든다. 백방산에서 추령천을 따라 피노리에 다다른다. 길에서 마주친 크고 작은 위험이 대수랴.
 

피노마을저 길을 따라 가면 쌍치와 복흥에 다다른다. 전봉준도 저 길을 따라 왔을 터이다. ⓒ 이영천

 
고부에서 이웃에 살던 김경천을 찾는다. 과거 전봉준이 서기라는 직(職)을 맡길 정도로 신실했으니 믿어야 한다. 그게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그런데 이게 땅을 내디딘 마지막 발걸음이 될 줄이야.
김경천(金敬天)이라는 자는 본래 전봉준의 접사(接司=서기)의 직에 있던 자로, 그 접주인 전봉준을 잡아 관에 인계한 자이다. 전봉준이 패하여 도로 호남으로 돌아와 순창 산중에서 거듭 거사를 도모하려는 방책을 꾀하던 중 이 기미를 안 김경천은 구구한 공리를 얻기 위하여 관병과 연락을 취하여 전봉준을 잡아주었다. (동학사. 오지영. 문선각. 1973. p279)

 

체포 보고문피노마을에서 전봉준을 체포하고 올린 보고문. ⓒ 이영천(피노마을 기념관 촬영)

 
하지만 이 자는 인간이 아니었다. 기회주의자라는 비난도 아까운 자다. 전 전라감영 장교인 한신현에게 밀고한다. 벼슬과 재물을 탐해서다. 12월 2일(음) 일이다.

한신현이 동네 머슴과 건달들에게 '마을에 강도가 나타났으니 잡으러 가자'며 꾀어내, 주막을 둘러싸고 전봉준을 체포한 것이다. 김경천처럼 여러 얼굴을 가진 군상들이 활개 치는 오늘날은 과연 살만한가?

서울로 가던 전봉준의 마음

언젠가는 꼭 한번 눈 쌓인 겨울 입암산성에서 백양사, 내장산을 지나 복흥을 거쳐 추령천 따라 피노리까지 걸어보리라던 나와 약속을, 여태 지키지 못하고 있다. 시인 안도현은 그의 등단작인 '서울로 가는 전봉준'에서 눈 내리는 징게멩게(김제만경의 전라도 사투리) 들판을 헛헛하게 지나는 전봉준에게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주지 못'한 미안함을 노래한다.
 

피체지 터전봉준이 붙잡힌 주막이 있던 자리로 알려진 곳. 옆 추령천 지류에 냇물이 흐른다. ⓒ 이영천

 
피체 과정에서 전봉준의 두 다리는 걷지 못할 지경으로 부상이 심하다. 서울 가는 길이 얼마나 팍팍했을까. 잔악한 일제가 들것이나마 호의를 베풀었을까? 서울로 가는 전봉준의 길을 더듬어 본다.
봉준은 열몇 명과 함께 순창 삼거리에 도착하여 점심거리를 찾았다. 이때 마침 전주 군관 김 아무개 또한 이곳에 와 광양 김씨 우근(宇根)의 집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마을 사람이 와서 적이 왔다는 소식을 전하자 숟가락을 집어 던지면서 일어나 김씨 집의 남초도(南艸刀)를 집어 들고 바로 적이 있는 곳으로 쳐들어가 큰소리로 "도적들은 오랏줄을 받아라"라고 소리쳤다.

봉준이 급히 칼을 빼 들고 일어났으나, 한번 뛰어오르며 내리치자 봉준의 무릎 종지뼈가 떨어져 나갔다. 마을 장정들이 달려들어 결박하였다. 잠시 후 순창지방 민포가 도착하여 봉준을 순창 감옥에 수감하려 하였고 전주 군관은 전주로 이송하고자 하여 서로 봉준을 차지하려는 다툼이 일어났다.

그런데 근방에 있던 일본군이 이 소식을 듣고 봉준을 빼앗아 데리고 가 그들의 진중에 가두어 두고 약을 주어 무릎의 상처를 치료하였다. (번역 오하기문. 황현. 김종익 옮김. 역사비평사. 1995. p308)

황현의 기술은 사실과는 일부 다른 면도 있다. 그러함에도 전봉준이 걸을 수 없는 처지였음에는 분명하다. 며칠 후인 7일, 일본군에 인계된 전봉준은 담양을 거쳐 나주로 후송된다. 병원에서 간단한 치료를 받으며, 일본군 지휘관 미나미의 심문을 받는다.

나주에서 한양으로 이송된다. 호송 길은 밝혀진 게 없다. 다만, 육로로 힘들게 이동하지는 않았으리라 추정한다. 18일 한양에 당도한 점이 이를 간접 증명한다. 걷지도 못하는 전봉준이 단 10일 만에 한양에 당도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디서건 전봉준을 빼돌리려는 동학군이 있었을 개연성 또한 무척 높다. 이런 우려로 바다를 이용, 한강 양화진에서 도성으로 들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론해 본다. 한양에 온 전봉준은 평리원에 투옥된다.

들것 위에 실려있으면서도 형형한 눈빛
 

절명시피노마을 '녹두장군 전봉준관' 입구에 서 있는 절명시. ⓒ 이영천

 
평리원에 투옥된 전봉준 등 동학 지도자들이 어떤 대접을 받았을지는 뻔하다. 신식 재판소가 설립되고 최초로 사형 선고를 받게 되는 주인공 또한 동학혁명 지도자들이다. 아이러니다.
이때 전봉준 등 동학군 수령들이 재차 거사코자 순창 복흥 산 중 피노리에 모여 모의를 거듭하던바, 돌연 관병의 손에 잡힌 바 되어 서울로 압송되고 …(중략)… 그 무렵 조선 정부에서는 박영효 서광범 등이 내외 정권을 잡고 있었다. 평리원(=의금부) 수석과 좌우 법관들도 모두 그네들의 도당이었다. 재판소에서는 전봉준 등 여러 사람을 잡아들여 문초하기 시작했다. (동학사. 오지영. 문선각. 1973. p264~265)

전봉준을 심문하던 조선과 일제의 의중은 다른 데 있었다. 동학혁명이 일어난 근인과 모순, 백성의 고통, 엄청나게 학살당한 데 대한 진상조사가 아니다.

전봉준이 흥선대원군과 내통한 사실 여부에 대한 추궁이 전부라 해도 과언 아니다.

전봉준은 그러나 흥선대원군에 대해 한마디도 꺼내지 않는다. 심문은 1895년 2월 9일, 11일, 19일, 3월 7일과 10일 등 5차례에 걸쳐 이뤄진다. 손화중이나 김덕명, 최경선 등도 심문을 받았으나 이와 관련한 기록은 없어 무척 아쉽다.
 

전봉준다리를 다쳐 걷지도 못하는 전봉준의 모습. ⓒ 고창군청

 
들것에 실린 형형한 눈빛의 전봉준은, 이때 재판소를 오가며 찍힌 흑백 사진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전봉준은 역사의 무게를 피하지 않았다. 목숨을 구걸하지도 않았다. 산화해간 수십만 생령(生靈)의 부릅뜬 눈만 두려워했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다. 그가 택한 의연한 죽음이 그것에 대한 최소한이다. 위대한 인물만이 남길 수 있는 큰 발자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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