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식노동자 엄마가 평생 소원을 이뤘다
3대가 캠핑카에 올라탄 여행 첫날... 고속도로에서 차린 한식상과 엄마의 인증샷
"야야야~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에 나이가 있나요."
- '내 나이가 어때서' 노랫말 中
그렇다. 사랑에도 나이가 없고, 여행에도 나이가 없다. 5살 손녀도 여행을 하고, 68살 할아버지와 65살 할머니도 여행을 한다. 손녀는 유모차를 타고, 할아버지는 휠체어를 타고 여행을 한다. 캠핑카에 3대가 함께 올라타는 오늘은 여행의 첫날이기도 하지만 한국, 독일, 베트남에 흩어져 살던 우리 가족이 오랜만에 다시 만나는 날이기도 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비행기에 자식보다 소중한 전동 휠체어와 한 달 동안 먹을 김치를 싣고 인천에서 프랑크푸르트로 열심히 날아오는 중이다.
여행에 나이는 없다
"엄마 평생 소원이 북유럽 캠핑카 여행이야."
아주 옛날부터 엄마가 가졌던 소원이었다. '북유럽'과 '캠핑카'는 1950년대에 한국에서 태어나 평생 고된 노동으로 삶을 이어온 부모님이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이국적인 단어들의 조합이지 않았을까? 엄마는 핀란드와 폴란드를 헷갈려하고, 스웨덴과 스위스를 묶어서 스웨스라고 부른다. 엄마는 발음하기도 어려운 나라에서 직접 운전하는 당신의 소원이 결국 이루어질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을까?
휠체어를 타는 아버지는 당신의 휠체어가 이제 열 손가락으로는 세지 못할 정도로 많은 나라에서 아버지를 태우고 다닐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을까? 어쨌거나 엄마의 소원은 오늘부로 유효 기간이 끝난다. 아직 남은 인생이 구만 리니까 엄마는 이제 새 소원을 찾아야 한다.
본격적인 북유럽 캠핑카 여행에 앞서 준비할 것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식료품이다. 10년 전 첫 캠핑카 여행에 이어 이번에도 여행의 시작을 독일로 한 이유는 역시 여행 비용 때문이다. 해외 여행에 드는 비용을 크게 셋으로 나누면 교통비, 숙박비, 식비이다. 쇼핑이나 관광 비용 등은 마음만 먹으면 0원으로 만들 수도 있지만, 이 세 가지 항목은 고정 지출이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한 달 동안 여행하면서 다섯 번 정도 외식을 했다. 간식을 제외하고 총 90번의 식사 대부분을 캠핑카에서 모두 해결했다. 노르웨이 베르겐에서 점심식사로 피자와 파스타 그리고 음료 몇 잔을 먹고 1750크로네(약 23만 원)를 지출한 후,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이다.
'밥은 집(캠핑카)에서 먹는다.' 물론 그 경험이 아니었어도 피자와 파스타 그리고 빵만으로 한 달을 보내는 건 한국사람에게는 굉장히 곤혹스러운 일이다. 독일에 살고 있는 동생 내외 조차 오직 한식을 외치며 살고 있었고, 베트남에서 10년을 살고 있는 나 역시 항상 한식을 먹는다.
그런 면에서 우리 가족은 굉장히 큰 무기가 있었는데, 그건 엄마의 요리 실력이었다. 엄마는 국가공인 한식조리사 자격증을 갖고 은퇴하는 순간까지 공장과 회사 등에서 급식을 맡았던 프로 요리사다. 엄마의 밥 때문에 싫어도 출근한다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으니 말해 뭐해. 하루 종일 걸어도, 열시간 운전을 해도, 식사 시간이 되면 푸짐한 한식이 우리를 기다렸다. 엄마의 고된 가사 노동이 캠핑카에서도 계속 이어져서 마음이 아팠지만, 우리는 하루 세 끼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한 달치 장을 보다
출발 전에 먼저 동생네 집에 있는 냉장고와 식료품 창고를 털었다. 팬트리가 있는 집답게 어지간한 천재지변도 버틸 만큼 기본적인 식료품이 많았다. 미안한 마음은 잠시 미뤄두고 커다란 이민 가방 두 개에 옮겨 담았다. 그리고 커다란 캠핑카를 몰고 라이프치히 근교의 대형 마트를 세 군데나 더 털었다(?!).
마법 같은 그 한 마디 "한 달이잖아"를 앞에 붙이기만 하면 술과 고기와 간식들이 카트에 가득 담겼다. 캠핑카의 냉장고로는 턱없이 부족해서 큰 아이스 박스도 추가로 구입했다. 덕분에 한 달 동안 우리 가족은 쌀 20kg과 김치 20kg을 먹었다. 쌀은 준비했던 10kg 금세 바닥나서 중간에 이집트 쌀로 보충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라이프치히에서 프랑크푸르트 공항으로 출발했다. 사실 여행을 계획하면서 휠체어를 타는 아버지보다 더 큰 걱정은 태어나서 가장 긴 시간 동안 자동차를 타야 하는 5살 고래양이었다. 고래양이 짜증을 부리거나 병으로 드러누우면 여러 사람이 매우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다행히 고래양은 캠핑카를 좋아했다. 정확하게는 캠핑카의 테이블 좌석에 앉아서 겨울왕국 보는 것을 좋아했다. 고래양이 겨울왕국 주제가를 영어로 불러대는 통에 나도 영어 리스닝 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려 아이패드와 디즈니플러스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날씨가 정말 쾌청해서 가슴이 뻥 뚫렸다. 그림 같은 하늘이 눈앞에 펼쳐졌다. 위도의 차이 때문인지, 기후대가 달라서 그런지 자세한 건 알 수 없지만 공기가 투명했다. 매일 컴퓨터 모니터만 쳐다보고 살다가 시선의 끝이 수십 킬로미터에 이르니 잃었던 시력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초록의 들풀과 노란 밀밭 그리고 하늘과 구름이 만들어 내는 풍경이 우리 여행의 첫 번째 배경이었다. 가까운 전방에서 사고가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접촉 사고 후 벌어진 이상한 일
프랑크푸르트를 한 시간 정도 남겨 놓고 시원하게 달리던 아우토반에서 차량 간격이 점점 좁아지더니 급기야 앞에서부터 차들이 서로 간격을 벌리기 시작했다. 훌륭한 시민 의식의 상징과도 같은 도로 위 모세의 기적이 일어났다. 우와...역시 질서의 독일인 건가? 하며 감탄하고 있는데, 동생 내외의 표정이 어둡다.
"햄아, 이 정도면 몇 시간 걸릴 수도 있다. 부모님 마중 못 갈 것 같다."
사고가 난 곳은 육안으로도 보이는 몇 백미터 전방이었다. 이미 사고 수습 차량들이 모세의 기적을 따라 간 상황이었는데 몇 시간이라니? 동생의 이야기에 따르면 독일은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나면 통행을 재개하는 것보다 사고 수습이 우선이란다. 때문에 도로가 완전히 정리되기 전에는 한 차선을 먼저 확보해서 보내주는 일이 없단다. 고속도로 위는 주차장으로 변했고, 사람들이 차에서 내려 산책을 다닌다. 삼삼오오 모여서 담소를 나누고, 다른 캠핑카에 타고 있던 어린 아이들은 씽씽이를 꺼낸다.
이것도 여행이려니 생각하고 캠핑카에서 고래의 'Let It Go'를 들으며 커피를 홀짝이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프랑크푸르트 출국장 앞에서 아들 내외와 손녀를 찾기 위해 고개를 두리번 거리며 헤매고 있을 부모님을 생각하니 여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공항 무선인터넷을 사용하면 되지만, 첫 화면이 독일어로 되어 있어서 접속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차린 한정식
그때 반가운 카톡 소리가 울렸다. 부모님은 벌써 공항에 도착해서 휠체어와 수하물도 다 찾았고, 편안한 의자에 앉아서 유튜브를 보고 계신단다. 아버지 덕분이었다. 장애인은 인천 공항에서 티케팅 할 때부터 목적지에 도착해 수하물을 찾아 출국장을 나올 때까지 공항 직원들의 안내를 받는다. 그리고 부모님은 영어를 못하시지만, 요즘 사용하는 한국어에 이미 영어가 많으니 상황 맥락과 손짓발짓만으로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셨다.
'휠체어 찾아야 해요. 내 캐리어가 없어요. 카트가 필요해요. 인터넷 연결해주세요.'
외국인이라고 지레 겁먹고 회피하지만 않는다면, 대한민국 할머니 할아버지 누구나 공항 서비스를 누릴 수 있다. 최근에는 '사우스 코리아(South Korea)'와 '토일렛(toillet)'을 배웠다. 엄마는 그 두 단어로 노르웨이에서 태국 할머니와 친해졌고, 덴마크의 빵 공장 직원에게 부탁해서 화장실을 마음껏 이용하셨다.
모든 일정이 늦어졌지만, 결국 우리는 저녁 늦게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부모님을 태웠다. 승강장까지 나와 계신 부모님을 차에 바로 태우고 주차장을 빠져 나왔는데 주차비는 5유로(7500원)였다. '5분 이내 무료'는 보편적인 룰이 아니었던가? 인색하다고 생각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공항이 부모님을 몇 시간이나 보호해주고 있었으니까 그저 감사해야지.
공항을 빠져 나와 북쪽으로 달렸다. 우리의 첫 번째 목적지는 공항에서 1,000km 떨어진 덴마크 북쪽 끝에 있는 히르트스할스(Hirtshals) 항구였다. 다음날 오후 6시에 덴마크에서 노르웨이로 가는 피오르 라인(Fjord Line) 페리가 예약되어 있었다.
낮에 고속도로에서 보낸 시간 때문에 일정이 늦어져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첫 저녁 식사를 했다. 엄마가 잠깐 이것저것 뚝딱뚝딱하더니 한정식 집에서 받는 밥상이 차려졌다. 독일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아삭아삭 하는 고추를 쌈장에 찍어 먹을 줄이야. 와우.
저녁을 먹고 뒷정리가 끝나고 나니 그제야 엄마 눈에 캠핑카가 들어 왔나보다. 구석구석 살펴보고, 짐 정리도 다시 하고, 캠핑카 옆에 서서 인증샷도 찍었다.
"내 소원을 이뤘네. 아들 고마워~"
사랑에 나이가 있나요."
- '내 나이가 어때서' 노랫말 中
그렇다. 사랑에도 나이가 없고, 여행에도 나이가 없다. 5살 손녀도 여행을 하고, 68살 할아버지와 65살 할머니도 여행을 한다. 손녀는 유모차를 타고, 할아버지는 휠체어를 타고 여행을 한다. 캠핑카에 3대가 함께 올라타는 오늘은 여행의 첫날이기도 하지만 한국, 독일, 베트남에 흩어져 살던 우리 가족이 오랜만에 다시 만나는 날이기도 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비행기에 자식보다 소중한 전동 휠체어와 한 달 동안 먹을 김치를 싣고 인천에서 프랑크푸르트로 열심히 날아오는 중이다.
▲ 부릉부릉 북유럽 캠핑카 1만km 가족들 ⓒ 한성은
"엄마 평생 소원이 북유럽 캠핑카 여행이야."
아주 옛날부터 엄마가 가졌던 소원이었다. '북유럽'과 '캠핑카'는 1950년대에 한국에서 태어나 평생 고된 노동으로 삶을 이어온 부모님이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이국적인 단어들의 조합이지 않았을까? 엄마는 핀란드와 폴란드를 헷갈려하고, 스웨덴과 스위스를 묶어서 스웨스라고 부른다. 엄마는 발음하기도 어려운 나라에서 직접 운전하는 당신의 소원이 결국 이루어질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을까?
휠체어를 타는 아버지는 당신의 휠체어가 이제 열 손가락으로는 세지 못할 정도로 많은 나라에서 아버지를 태우고 다닐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을까? 어쨌거나 엄마의 소원은 오늘부로 유효 기간이 끝난다. 아직 남은 인생이 구만 리니까 엄마는 이제 새 소원을 찾아야 한다.
▲ "엄마 평생의 소원이 북유럽 캠핑카 여행이야." ⓒ 한성은
▲ 코펜하겐 뉘하운휠체어 타고 세계여행, 할 수 있습니다. ⓒ 한성은
본격적인 북유럽 캠핑카 여행에 앞서 준비할 것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식료품이다. 10년 전 첫 캠핑카 여행에 이어 이번에도 여행의 시작을 독일로 한 이유는 역시 여행 비용 때문이다. 해외 여행에 드는 비용을 크게 셋으로 나누면 교통비, 숙박비, 식비이다. 쇼핑이나 관광 비용 등은 마음만 먹으면 0원으로 만들 수도 있지만, 이 세 가지 항목은 고정 지출이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한 달 동안 여행하면서 다섯 번 정도 외식을 했다. 간식을 제외하고 총 90번의 식사 대부분을 캠핑카에서 모두 해결했다. 노르웨이 베르겐에서 점심식사로 피자와 파스타 그리고 음료 몇 잔을 먹고 1750크로네(약 23만 원)를 지출한 후,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이다.
'밥은 집(캠핑카)에서 먹는다.' 물론 그 경험이 아니었어도 피자와 파스타 그리고 빵만으로 한 달을 보내는 건 한국사람에게는 굉장히 곤혹스러운 일이다. 독일에 살고 있는 동생 내외 조차 오직 한식을 외치며 살고 있었고, 베트남에서 10년을 살고 있는 나 역시 항상 한식을 먹는다.
▲ 1750NOK의 교훈"밥은 집에서 먹는다." ⓒ 한성은
그런 면에서 우리 가족은 굉장히 큰 무기가 있었는데, 그건 엄마의 요리 실력이었다. 엄마는 국가공인 한식조리사 자격증을 갖고 은퇴하는 순간까지 공장과 회사 등에서 급식을 맡았던 프로 요리사다. 엄마의 밥 때문에 싫어도 출근한다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으니 말해 뭐해. 하루 종일 걸어도, 열시간 운전을 해도, 식사 시간이 되면 푸짐한 한식이 우리를 기다렸다. 엄마의 고된 가사 노동이 캠핑카에서도 계속 이어져서 마음이 아팠지만, 우리는 하루 세 끼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한 달치 장을 보다
▲ 한식 요리사와 함께 떠나는 캠핑카 여행 ⓒ 한성은
출발 전에 먼저 동생네 집에 있는 냉장고와 식료품 창고를 털었다. 팬트리가 있는 집답게 어지간한 천재지변도 버틸 만큼 기본적인 식료품이 많았다. 미안한 마음은 잠시 미뤄두고 커다란 이민 가방 두 개에 옮겨 담았다. 그리고 커다란 캠핑카를 몰고 라이프치히 근교의 대형 마트를 세 군데나 더 털었다(?!).
마법 같은 그 한 마디 "한 달이잖아"를 앞에 붙이기만 하면 술과 고기와 간식들이 카트에 가득 담겼다. 캠핑카의 냉장고로는 턱없이 부족해서 큰 아이스 박스도 추가로 구입했다. 덕분에 한 달 동안 우리 가족은 쌀 20kg과 김치 20kg을 먹었다. 쌀은 준비했던 10kg 금세 바닥나서 중간에 이집트 쌀로 보충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라이프치히에서 프랑크푸르트 공항으로 출발했다. 사실 여행을 계획하면서 휠체어를 타는 아버지보다 더 큰 걱정은 태어나서 가장 긴 시간 동안 자동차를 타야 하는 5살 고래양이었다. 고래양이 짜증을 부리거나 병으로 드러누우면 여러 사람이 매우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다행히 고래양은 캠핑카를 좋아했다. 정확하게는 캠핑카의 테이블 좌석에 앉아서 겨울왕국 보는 것을 좋아했다. 고래양이 겨울왕국 주제가를 영어로 불러대는 통에 나도 영어 리스닝 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려 아이패드와 디즈니플러스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날씨가 정말 쾌청해서 가슴이 뻥 뚫렸다. 그림 같은 하늘이 눈앞에 펼쳐졌다. 위도의 차이 때문인지, 기후대가 달라서 그런지 자세한 건 알 수 없지만 공기가 투명했다. 매일 컴퓨터 모니터만 쳐다보고 살다가 시선의 끝이 수십 킬로미터에 이르니 잃었던 시력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초록의 들풀과 노란 밀밭 그리고 하늘과 구름이 만들어 내는 풍경이 우리 여행의 첫 번째 배경이었다. 가까운 전방에서 사고가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접촉 사고 후 벌어진 이상한 일
▲ 우리 여행의 첫 번째 풍경들풀과 밀밭 그리고 하늘과 구름이 만들어 내는 그림 ⓒ 한성은
프랑크푸르트를 한 시간 정도 남겨 놓고 시원하게 달리던 아우토반에서 차량 간격이 점점 좁아지더니 급기야 앞에서부터 차들이 서로 간격을 벌리기 시작했다. 훌륭한 시민 의식의 상징과도 같은 도로 위 모세의 기적이 일어났다. 우와...역시 질서의 독일인 건가? 하며 감탄하고 있는데, 동생 내외의 표정이 어둡다.
"햄아, 이 정도면 몇 시간 걸릴 수도 있다. 부모님 마중 못 갈 것 같다."
사고가 난 곳은 육안으로도 보이는 몇 백미터 전방이었다. 이미 사고 수습 차량들이 모세의 기적을 따라 간 상황이었는데 몇 시간이라니? 동생의 이야기에 따르면 독일은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나면 통행을 재개하는 것보다 사고 수습이 우선이란다. 때문에 도로가 완전히 정리되기 전에는 한 차선을 먼저 확보해서 보내주는 일이 없단다. 고속도로 위는 주차장으로 변했고, 사람들이 차에서 내려 산책을 다닌다. 삼삼오오 모여서 담소를 나누고, 다른 캠핑카에 타고 있던 어린 아이들은 씽씽이를 꺼낸다.
▲ 첫 번째 난관출국장에서 부모님을 만날 수 없는 상황이 생겨버렸다. ⓒ 한성은
이것도 여행이려니 생각하고 캠핑카에서 고래의 'Let It Go'를 들으며 커피를 홀짝이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프랑크푸르트 출국장 앞에서 아들 내외와 손녀를 찾기 위해 고개를 두리번 거리며 헤매고 있을 부모님을 생각하니 여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공항 무선인터넷을 사용하면 되지만, 첫 화면이 독일어로 되어 있어서 접속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차린 한정식
그때 반가운 카톡 소리가 울렸다. 부모님은 벌써 공항에 도착해서 휠체어와 수하물도 다 찾았고, 편안한 의자에 앉아서 유튜브를 보고 계신단다. 아버지 덕분이었다. 장애인은 인천 공항에서 티케팅 할 때부터 목적지에 도착해 수하물을 찾아 출국장을 나올 때까지 공항 직원들의 안내를 받는다. 그리고 부모님은 영어를 못하시지만, 요즘 사용하는 한국어에 이미 영어가 많으니 상황 맥락과 손짓발짓만으로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셨다.
'휠체어 찾아야 해요. 내 캐리어가 없어요. 카트가 필요해요. 인터넷 연결해주세요.'
외국인이라고 지레 겁먹고 회피하지만 않는다면, 대한민국 할머니 할아버지 누구나 공항 서비스를 누릴 수 있다. 최근에는 '사우스 코리아(South Korea)'와 '토일렛(toillet)'을 배웠다. 엄마는 그 두 단어로 노르웨이에서 태국 할머니와 친해졌고, 덴마크의 빵 공장 직원에게 부탁해서 화장실을 마음껏 이용하셨다.
모든 일정이 늦어졌지만, 결국 우리는 저녁 늦게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부모님을 태웠다. 승강장까지 나와 계신 부모님을 차에 바로 태우고 주차장을 빠져 나왔는데 주차비는 5유로(7500원)였다. '5분 이내 무료'는 보편적인 룰이 아니었던가? 인색하다고 생각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공항이 부모님을 몇 시간이나 보호해주고 있었으니까 그저 감사해야지.
공항을 빠져 나와 북쪽으로 달렸다. 우리의 첫 번째 목적지는 공항에서 1,000km 떨어진 덴마크 북쪽 끝에 있는 히르트스할스(Hirtshals) 항구였다. 다음날 오후 6시에 덴마크에서 노르웨이로 가는 피오르 라인(Fjord Line) 페리가 예약되어 있었다.
낮에 고속도로에서 보낸 시간 때문에 일정이 늦어져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첫 저녁 식사를 했다. 엄마가 잠깐 이것저것 뚝딱뚝딱하더니 한정식 집에서 받는 밥상이 차려졌다. 독일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아삭아삭 하는 고추를 쌈장에 찍어 먹을 줄이야. 와우.
▲ 첫 번째 식사독일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한정식 차리는 중 ⓒ 한성은
저녁을 먹고 뒷정리가 끝나고 나니 그제야 엄마 눈에 캠핑카가 들어 왔나보다. 구석구석 살펴보고, 짐 정리도 다시 하고, 캠핑카 옆에 서서 인증샷도 찍었다.
"내 소원을 이뤘네. 아들 고마워~"
▲ 출발부릉부릉 캠핑카 북유럽 1만km 지금 출발합니다. ⓒ 한성은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기자의 블로그 <a href="https://ninesteps.tistory.com" target="_blank" class=autolink>https://ninesteps.tistory.com</a>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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