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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는 자신의 시가 이곳에서 불릴 줄 알았을까

[2024, 지금 김남주] 자유

등록|2024.08.19 14:24 수정|2024.08.19 14:24
김남주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딱 30년이 되었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라고 노래한 시인의 바람대로, 우리는 손을 잡고 함께 걸어온 것일까.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김남주 정신이 필요하다면 어떤 이유에서일까. 지금 여기에서 김남주가 다시 살아 서 있는 모습을 그려본다. 24인의 문학인들과 활동가들이 2024년의 한국 사회를 짚어보며,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보고자 한다. [편집자말]

▲ 1983년 서울 종로구 낙원동 전경 ⓒ 서울역사박물관


세월이 지나며 변하지 않은 것 무엇이랴. 탑골공원 뒷골목 허름한 냉면집은 어느 날엔가 고깃집이 되더니, 내 나이 또래 젊은 사람들이 줄 서서 먹는 맛집으로 소문이 났다. 그렇게 반짝하더니 개발 이슈인지 무엇인지, 뒷골목 터줏대감이던 옆 가게와 함께 문을 닫았다. 확장 이전했다는 소식과 함께.

오래된 도시에는 어김없이 사랑받아 마땅한 구석진 골목이 있다. 세월을 머금고 변하지 않을 것처럼 찬란한 오래됨을 뽐낸다. 구석진 곳을 닮아 그늘진 사람들이 머물 곳이 된다. 주머니 가벼운 이들의 친구로, 늙은 자영업자의 터전으로, 공허한 이들을 채워주는 언어로 제 몫을 다한다. 그 구석진 골목도 변했다.

시인의 시간이 끝나고 삼십 년, 자본은 도시 곳곳을 재편했다. 종로는 여전히 종로라 불리지만 피맛골이 사라졌고, 을지로에는 을지면옥과 을지오비베어가 쫓겨났다가 가까스로 돌아와 새로운 장소에서 명맥을 유지하게 됐다. 그이가 그토록 사랑했던 민중들의 가난한 삶터들은 철거당했다.

모두가 아파트에 살게 된 것도 아닌데, 그 자리에는 우후죽순 아파트가 솟았고, 지금도 솟고 있다. 불타는 용산 남일당이 있었고, 홍대의 두리반과 서촌의 궁중족발이 있었다. 재개발과 재건축, 젠트리피케이션이 가난한 이들과 그이들의 공간을 흩었다. 그렇게 민중시인의 시가 읽혀질 공간들도 사라졌다. 기념 시비에서 그의 흔적을 찾지만 공허하다. 그이의 시는 그렇게만 읽힐 게 아닌 것 같은데.

나는 그의 시를 동아리방에서 만났다. 기타를 퉁기던 선배는 '자유'를 맛깔나게 불렀고, 신입생인 나는 그의 시를 유튜브에 업로드 되어 있는 낭독, 그 육성으로 매일 같이 들었더랬다. 당혹스러울 만큼 단순했다. 낭독은 날카롭고, 이해는 어렵지 않다. 그 새빨간 단순함이 좋았다.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

땀 흘려 함께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인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

피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인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

피와 땀과 눈물을 나눠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인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사람들은 맨날

겉으로는 자유여, 형제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

그늘진 사람들 사이의 언어

그렇게 읽은 시를 철거 현장에서 부르며 다녔다. 키를 두 개 정도 낮춰서, 조금 더 부르기 편한 음정으로. 그렇게 시는 철거 당해 쫓겨난 세입자의 천막에서 불렸다.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의 업장에서, 무산자의 몸 누일 집 앞에서 불렸다. 고작 서너 명, 많아봐야 십 수 명 되는 연대문화제에서, 작가들의 낭독회에서, 끝 모를 뒤풀이에서 불렸다.

건물주가 월세를 네 배나 올려 쫓아내겠다고 족발집에 윽박지를 때, 장사를 하는 상인을 용역 깡패가 끌어내 손이 크게 다쳤을 때, 열두 번의 강제집행을 막아내며 끊임없이 상생을 얘기할 때, 그 때 외치길 "궁중족발이 쫓겨나면 모두가 쫓겨난다!" 모두가 쫓겨나지 않기 위해 이 가게를 지키겠다는 다짐. 그러니, 그 작은 가게를 지키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대한 대의 없이도 구석진 곳의 그늘진 존재들과 함께였다.

그이의 시는 그런 곳에서 읽힐 때 비로소 제대로 읽힌다. 만인을 위해 함께 싸울 때 비로소 자유, 단 한 사람의 억압 앞에서도 몸부림치며 괴로워할 때 비로소 자유, 말이 아니라 몸으로 서로를 동여맬 때 비로소 자유라는 그 단순한 진리를, 조금 더 복잡해진 세상이지만, 있는 그대로 살아내는 이들 사이에서.

이 얼마나 자유로운 도시인가? 돈 좀 있는 사람들은 평생의 터전을 사들이더니 종이 한 장의 권리로 사람을 짐짝처럼 드러낸다. 밑바닥에서는 전세사기가 판을 치는데, 아직도 재개발을 외치고 아파트가 솟아나는 걸 누구도 막지 않으니 얼마나 자유로운 도시인가? 이 얼마나 자유로운 광장인가? 다른 세상을 향한 숱한 약속들이 책임 없이 내뱉어지고 그 누구도 주워 담지 않아도 규탄 당하지 않으니.

이 얼마나 자유로운 세상인가? 자영업자 폐업률과 서민 부채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데 한편에서는 여전히 집값이 오르고 있으니. 이 얼마나 자유로운 세계인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침략하는 이들과 이익집단에 아무 말 얹지 못한 채 다가올 전쟁을 넋 놓고 바라보는 세계가. 이 얼마나 자유로운 인간종인가, 결국 제 살을 깎아 먹는 지속불가능한 세계를 만들어 놓고 아직도 각자도생을 외치고 있으니. 제 자신을 속이는 이들 앞에 싸구려 자유만 굴러다니는 시절이다.

시인도 구석진 곳을 사랑했을까. 삼십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풍경을 사랑했을까. 그리 많지 않았던 그의 서정시에서 그 흔적을 찾는다. '옛 마을을 지나며'

"찬 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

그의 시가 나무 끝에서 불리길 바랐다. 도시의 구석진 골목, 그늘진 사람들 사이의 언어로 불리길 바랐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이종건 옥바라지선교센터 활동가입니다.

공동주최 : 김남주기념사업회·한국작가회의·익천문화재단 길동무
후원 : 더숲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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