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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내식은 없었지만 아이에게 극찬 받은 여름휴가

여름휴가를 낼 수 없었던 아빠와 함께 보낸 도시에서의 주말 이야기

등록|2024.08.15 15:50 수정|2024.08.15 15:50
그룹 '육아삼쩜영'은 웹3.0에서 착안한 것으로, 아이들을 미래에도 지속가능한 가치로 길러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서울, 경기도 가평, 부산, 제주, 미국에서 아이를 키우는 보호자 여섯 명이 함께 육아 이야기를 씁니다.[기자말]

휴가가 사라졌다

작은 회사에 근무하는 배우자는 내년도 사업 준비로 너무 바빠서 올여름엔 휴가를 낼 수 없다고 말했다. 바다로 갈지 산으로 갈지 고민하던 아이들은 금세 시무룩해졌다. 하다못해 나라도 아이들을 데리고 짧게 여행을 다녀올까 했으나 그것도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바쁜 아빠를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서운함을 감출 수 없었던 아이들은 약간 풀이 죽은 표정들이었다.

일정 기간 동안 일을 멈추고 여유롭게 쉬는 것이 휴가다. 공식적인 휴가를 가질 순 없지만 휴식은 필요하기에 모두가 쉴 수 있는 방향으로 주말을 보내자고 배우자가 제안했다. 회사 때문에 때로는 집안일 때문에 부부 중 한 명은 남아서 일을 하는 것이 일상이었던 우리 가족은 도시에 남아 휴가처럼 주말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배우자가 출근한 금요일, 집에 남은 식구들은 주말 동안 함께 준비할 수 있는 식사 메뉴를 정하고 필요한 것들을 구입했다. 큰 아이와 나는 캠핑용으로 만들어진 꼬치용 새우와 가리비 관자를 구입했다. 평소에는 현미나 보리를 즐겨 먹지만 주말을 위해 특별히 쌀알이 크고 둥글어 주먹밥 만들기 좋은 색다른 품종의 백미도 샀다. 장본 것들을 꺼내 먹기 좋도록 손질하고 차곡차곡 냉장고에 넣었다.

금요일이라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퇴근한 아빠와 함께 아이들은 주말에 무엇을 하며 놀고 어떤 것들을 먹을지 고민하다 토요일에는 박물관, 일요일에는 도서관을 가기로 했다. 박물관 티켓을 예매하고 맛집을 알아본 후 시계 알람을 맞추고는 부푼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도심 속 쉼터, 국립중앙박물관
 

청동 투구, 그리스, 기원전 6세기, 손기정 기증, 상설전시관 기증실(2층)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에게는 금메달과 함께 그리스 청동 투구를 부상으로 주기로 했었다. 그러나 그 당시 올림픽 규칙에 너무 비싸고 귀한 기념품을 받으면 안 된다는 내용이 있어 손기정 선수는 그 투구를 받지 못했다. 50년이 지난 1986년 투구를 돌려받은 손기정 선생은 이를 국가에 기증하기로 결심하여, 1994년 국립중앙박물관에 투구를 기증했다.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 임은희

 
용산에 위치한 국립중앙박물관은 교통이 편리해서 아이들과 즐겨 찾는 장소 중 하나지만 평소 아빠와 함께 갈 수 없었던 곳이라 선택했다. 무더위에 밥집을 찾아 나서거나 박물관 내 식당에서 줄을 서는 불편함을 줄이기 위해 도시락을 준비하기로 했다.

하얀 쌀로 밥을 지어 둥글둥글 주먹밥을 만들고 오이채와 토마토를 반찬통에 담았다. 얼음을 잔뜩 담은 개인 물통을 하나씩 들고 집을 나섰다. 마치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전등과 가스 절전 버튼을 누르고 온수도 잠근 다음 현관문을 닫았다.

'우리가 인디언으로 알던 사람들'과 '삼국삼색-동아시아의 칠기' 특별전 그리고 상설전시를 하고 있었는데 아이들이 좋아하는 인디언 전시와 상설전시를 보기로 결정했다. 큰 아이가 사물함에 도시락가방과 물통 등을 넣는 동안 작은 아이는 부리나케 맞은편 기념품매장으로 달려갔다.

유행에 민감한 초등학교 5학년에게 신상 굿즈(goods, 단순한 상품이 아닌 특정 스타 및 애니메이션과 관련된 상품을 일컫는 표현으로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전시 기념상품도 이에 해당한다)를 파악해 두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므로 우리는 작은 아이를 기다려주었다.

과거의 인디언들의 거주용 텐트인 티피(tepee)부터 이주한 유럽인들의 눈에 비친 모습까지 다양한 인디언들의 모습과 그들의 수공예품들이 강화도의 화문석, 삼한시대의 솟대나 조선시대의 장승과 비슷하다고 재잘대며 관람했다.

특별전 관람을 마친 후 도시락을 먹기 위해 이동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총 5곳의 식사 가능한 공간이 있다. 무더운 날씨였지만 성능 좋은 텀블러의 얼음은 꽁꽁 얼어붙어 있어서 곳곳에 설치된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마셨다.
 

국립중앙박물관 쉼터국립중앙박물관은 쉼터와 편안한 의자가 많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전시실 밖에도 쉼터가 많지만 전시실 안쪽에도 조용하고 쾌적한 쉼터들이 숨어있다. 사회생활에 지친 배우자와 방학 육아에 지친 나는 아이들 몰래 2층의 한 쉼터에서 휴식을 취했다. ⓒ 임은희

 
식사를 마친 후 상설전시 관람을 시작했다. 특별전은 함께 관람했지만 상설전시는 식구들마다 좋아하는 시대가 달라서 흩어져서 관람하다 우연히 마주치면 같이 관람하기도 하고 인사하고 지나치기도 하며 자유롭게 관람했다. 상설관 곳곳에는 쉴 수 있는 공간들이 많은데 전시관 안쪽의 쉼터들은 조용하고 비밀스러운 느낌이 있어서 격무에 시달린 배우자가 특별히 마음에 들어 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만 맛볼 수 있는 과자와 전통차까지 먹고 관람을 이어갔다. 휴가가 없으니 휴가 비용도 없다. 특별히 1인당 2개의 굿즈를 허용하니 아이들이 신나서 기념품 매장으로 들어갔다. 한 시간 후 아이들은 굿즈를 소중히 들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박물관을 나섰다.

서울 사람도 재미난 을지로 입구 나들이

1호선 서울 시청역부터 2호선 을지로 입구역까지는 시원하고 쾌적한 지하도로 연결되어 있다.

시청역은 덕수궁 대한문, 서울시청 신청사, 서울도서관, 시청 지하의 시민청까지 연결하고 있고, 을지로입구는 백화점, 영화관, 쇼핑몰, 은행을 연결하고 있는 데다 명동의 각 명소까지 이동하기 수월한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지하도를 이용하면 무더운 날씨에도 큰 어려움 없이 걸어서 관광할 수 있다.

요즘에는 외국인 관광객들도 이 길을 많이 알아서 피아노 계단 부근에서 노는 아이들을 촬영하며 즐거워 하는 가족 여행객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명동의 브런치 카페우리는 카페의 유일한 한국 손님들이었다. '이 썩는다'는 잔소리를 하지 않기로 약속받은 아이들은 마음껏 단 음식들을 주문했다. ⓒ 임은희

 
외국인들이 많은, 심지어 주문을 받는 사람도 외국인인 명동역 부근의 작은 카페에서 느긋하게 브런치를 즐긴 후 지하도를 이용해 서울도서관으로 향했다. 서울시청 구청사의 일부를 보존하여 만든 서울도서관은 점자책이나 큰 글자책을 보유하고 있는 배리어프리 도서관이기도 하다.

일주일에 사나흘을 방문하는 곳이지만 온 가족이 함께 방문하는 경우는 많지 않아서 도서관 곳곳의 작은 벤치에 모여 앉아 키득거리며 만화책을 봤다. 아이들은 아빠가 책을 본다는 사실에 좀 놀라긴 했지만 금방 적응하고는 각자의 책 보기에 집중했다.

도시에 남은 사람들과 함께
 

명동휴가를 즐기러 온 사람들과 휴가 없이 일하는 사람들이 뒤섞인 모습. 우리도 그들 중 한 무리가 되어 여름을 즐겼다. ⓒ 임은희

 
익숙한 곳들이었지만 휴가로 생각하고 방문하니 더 신나는 기분이 들었다. 십 대가 된 아이들은 함께 돌아다니며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은 것을 재미있게 여기는 듯했다.

즐거운 휴가를 위해 큰돈을 들여 멀리 떠나는 것도 좋지만 함께 국수를 삶아 먹고 동네 도서관에서 만화책을 보며 키득거리는 것으로도 휴가의 여유를 충분히 만끽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휴가철에 도시에 남아 일하는 사람들이 차려준 식탁에 앉아 밥을 먹었다. 공공도서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정성스레 정리한 도서를 빌려 일하는 사람들이 쓸고 닦은 거리를 산책했다. 배우자처럼 휴가를 떠날 수 없는 사람들도 세상에 존재한다. 고속도로 휴게소의 분식과 비행기 기내식을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아이들에게 설명했다.

어떤 사람들은 일터를 벗어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일터를 지키며 각자의 방식으로 화려하게 또는 소박하게 개인의 휴가를 보낸다. 멀리멀리 떠나는 여행은 아니었지만 서로에게 좋은 시간을 선물했으니 휴가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우리 가족은 충분히 예쁘고 재미난 휴가를 보냈다고 말할 수 있지 않느냐는 말에 작은 아이는 웃으며 외쳤다.

"고속도로 휴게소 방문은 다음도 괜찮아. 이번 휴가 최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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