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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향해 첩보전 펼친 스탈린, 만행의 결말은

[리뷰] tvN <벌거벗은 세계사>

등록|2024.08.14 14:31 수정|2024.08.14 14:31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권력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비밀공작기관' 제도를 적극 운용해 왔다. 소련의 KGB, 미국의 CIA, 나치 독일에 게슈타포, 이스라엘의 모사드,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대한민국에 안기부(국정원의 전신)와 보안사령부(현 기무사)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치안, 첩보, 행정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분야를 아우르며 국가와 법치 위에 군림하는 특수 조직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본래는 국가와 국민을 지켜야 할 비밀경찰과 정보기관들은, 정작 실제로는 '권력의 사냥개'로 전락해 암살, 테러, 대학살 등 무수한 악행을 저지르며 공포의 대상으로 변질된 경우가 많았다. 어쩌면 통제받지 않는 음지의 권력이 과도해졌을 때 어떤 부작용을 가져오는지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비밀공작 기관의 어두운 역사는 오늘날 21세기 현대까지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지난 13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암살부터 대학살까지, 소련 비밀경찰의 역사'편을 다뤘다. 류한수 상명대 교수가 강연자로 나섰다.
 

▲ 방송 장면 갈무리 ⓒ tvN

 
특별 권한 부여 받은 '체카'

러시아 비밀공작 기관의 기원은 1917년 설립된 '체카(Cheka)'에서 비롯됐다.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며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시회주의 정권을 수립한 볼셰비키의 지도자였던 블라디미르 레닌은, '반혁명에 맞서 싸우는 전 러시아 특설위원회'라는 의미를 지닌 체카를 창설했다. 이름 그대로 체카의 핵심 임무는 혁명정부에 대항하고 반혁명 활동을 벌이는 세력을 색출하여 무력화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소규모 조직으로 시작했던 체카는 1918년 '레닌 암살미수 사건'이 벌어지자 위상과 권한이 크게 확대된다. 위기의식을 느낀 레닌은 체카에게 반혁명세력을 즉각 총살할 수 있는 특별 권한을 부여한다. 체카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반대파를 철저히 탄압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체포하여 고문하거나 살해했다. 이중에는 무고한 이들도 다수였다. 체카는 창설 4년 만에 40여 명에 2만 명가까이 조직원이 불어나며 그 위세를 떨쳤다.

1922년 6월 러시아 내전이 혁명정권의 승리로 끝나면서 소비에트 연방을 건국한 레닌은, 세력이 지나치게 비대해진 체카를 해체했다. 하지만 2년 만인 1924년 레닌이 뇌졸중으로 사망하면서 소련은 이오시프 스탈린이라는 새로운 독재자가 정권을 장악한다.

스탈린 정권은 안에서는 무리한 국유화 정책에 대한 자국민들의 반발, 밖으로는 나치 독일의 팽창으로 인한 위협 등으로 불안한 정국에 놓여있었다. 위기감을 느낀 스탈린은 권력을 공고하게 다지기 위하여 1934년 자신의 명령을 수행할 비밀경찰 조직을 새롭게 개편하기에 이른다. 바로 '스탈린의 사낭개'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엔카베데(NKVD)의 등장이다.

엔카베데의 악행

스탈린 정권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자랑했던 엔카베데는 정보기관은 물론이고 경찰, 검찰, 내무부, 국경과 해안경비대의 업무까지 일부 아우르는 그야말로 초법적인 조직이었다. 이들의 기능은 오직 스탈린만을 위하여 치안과 행정을 장악하고, 독재자에게 방해가 되는 정적들을 체포하거나 감시하는 것에 불과했다.

1936년 스탈린이 벌인 '피의 대숙청'을 주도한 것도 엔카베데였다. 무려 3년에 걸쳐 스탈린의 권력에 위협이 될 만한 정적과 반대파들이 모두 숙청당했다. 또한 엔카베데는 일정 숫자의 가구마다 전담 요원을 배치하여 국민들의 동향을 철저하게 감시하게 했으며, 밀고 시스템을 도입하여 사람들이 혹시 반역하지 않는지 서를 감시하고 밀고하도록 유도했다.

대숙청 시기에 소련인들은 사소한 사건이나 대화 한 마디로 꼬투리를 잡아 반역 행위로 서로를 밀고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심지어 개인적 원한을 해결하는 용도로 밀고제도를 악용하면서 서로를 믿지 못하는 풍조가 만연하여 사회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심지어 스탈린은 엔카베데 요원들에게 '체포 할당량'을 부여했고 요원들은 어떻게든 목표치를 채우기 위하여 밀고 사유를 제대로 검증하지도 않고 관련자들을 체포하면서 억울한 피해자들이 속출하기도 했다.

체포된 이들 중 처형되지 않은 사람들은 노동형을 선고받아, 소련 전국 각지에 설립된 '굴라크(Gulag)'라는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이들은 하루 16시간 이상 경제개발을 위한 강제노역에 동원됐다. 다수는 가혹한 노동 속에 전염병과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수용소 내에서도 수감자들에 대한 밀고와 고문이 성행했다.

또 체포된 이들의 일부는 범죄자들로 구성된 군부대인 '형벌부대'에 차출돼 지뢰를 제거나 항공기 폭격의 미끼로 이용되는 등 전장의 소모품 취급을 당했다. 만일 전쟁에서 이들이 사망했을 시에는 "자기 피로서 국가에 보상했다"는 기록을 보고서에 남겼다.
 

▲ 방송 장면 갈무리 ⓒ tvN

 
강대국 반열 오른 소련

최근 러시아 정부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1936-1938년까지 대숙청 시기에 밀고로 체포된 이들은 3년간 170만 명에 이른다. 이 중 160만 명이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사형당한 이들만 무려 68만 명에 이른다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학자들은 이마저도 축소된 것이며, 실제로는 기록되지 않은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을 거로 추정한다. 서방의 한 만평에서는 '스탈린이 사람들을 삽으로 퍼서 지옥을 가득 채우고 있다'고 묘사할 만큼 스탈린의 잔혹한 만행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엔카베데의 만행은 소련 내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초기에 나치 독일과 손을 잡은 소련군은 폴란드 동부 지역을 점령하고 약 45만 명에 이르는 포로들을 확보했다. 스탈린은 이들 중 폴란드군 간부와 고급 지식인, 전문가 출신 포로들을 선별해 엔카베데에 넘겨 노동수용소로 보냈다. 여기서 사회주의 수용을 거부하는 이들은 '소련의 타협할 수 없는 적'으로 규정해 잔혹하게 처형했다.

1940년 3월에 벌어진 '카틴숲 포로 대학살' 사건으로 최소 2만 명 이상의 폴란드인들이 사망했고, 이는 스탈린과 엔카베데가 저지른 최악의 악행으로 꼽힌다. 스탈린의 이러한 잔혹한 조치에는 이웃나라인 폴란드가 혹시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미연에 제거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스탈린은 훗날 독일의 기습적인 소련침공으로 '독소전쟁'이 발발하며 카틴숲 학살이 수면 위로 드러나자, 이번엔 나치의 소행으로 떠넘기며 히틀러와 낯 뜨거운 상호 비방전을 벌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은폐되어 온 진실은 반세기가 흐른 1990년에 이르러서야 소련 정부가 당시 서기장이던 고르바초프에 의하여 '카틴숲 대학살은 스탈린의 소행'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다.

한편 소련은 2차대전 기간 동안 '군정보총국'을 별도로 설립해 국외 첩보를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조직을 구축했다. 이들은 전 세계에 스파이들을 파견해 나치 독일을 비롯한 연합국들의 군사관련정보까지 수집했다. 엔카베데와 군정보총국은 소련 첩보기관을 대표하는 양대 산맥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 당시 소련의 군정보총국 스파이로 유명세를 떨친 대표적인 인물이 리하르트 조르게였다. 첩보물의 명작 <007>시리즈의 원작자이자 실제로 군 정보기관에서 근무했던 이언 플레밍은 조르게를 두고 '역사상 가장 위험한 스파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소련의 대일본 정보라인 총책이었던 조르게는,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결정적인 극비 정보를 획득하며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데 기여했다. 당시 소련은 독일이 침공해 오자 독일의 동맹인 일본까지 양쪽에서 협공해 올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통답게 조르게는 "일본은 당장은 소련을 침략할 의사가 없다"는 확신에 찬 첩보를 모스크바로 전송했다. 주저하던 스탈린은 조르게의 첩보를 신뢰해 시베리아에 배치했던 주력 기갑사단을 독일과의 전선으로 이동시키는 승부수를 던졌고, 결과적으로 이 판단은 적중했다. 한 스파이의 냉철한 판단이 전쟁의 운명까지 갈라놓은 것이다.

소련은 결국 독소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연합국의 일원으로 2차대전의 승전국으로 인정받았다. 전후에는 미국과 함께 명실상부하게 세계질서를 좌우하는 강대국의 반열에 오른다.

사회주의 전파 위한 첩보활동

냉전 시대에 접어들면서 소련은 자본주의 국가들에 대항하여 사회주의를 전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다시 첩보활동에 열을 올리게 된다. 영국을 발칵 뒤집어 놓은 '케임브리지 5인조' 사건은 서방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소련 비밀공작 기관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킴 필비 등 5인방은 영국인 출신의 고학력 엘리트이자 영국의 주요 정보기관에서 근무하면서 소련의 '이중스파이'로 활약한 인물들이다.

당시 유럽에는 이들처럼 젊은 시절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한 지식인들이 적지 않았다. 영국의 정보기관 M16 소속이었던 필비는 자국의 주요 기밀 정보들을 대거 엔카베데에 전달했다.

그 결과 동유럽에서 활동했던 많은 영국 첩보원과 영국 망명을 노리던 소련인들의 신상정보가 노출됐다. 알바니아의 사회주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하여 무장요원들을 침투시킨 미영합동작전이 실패로 돌아가며 수많은 CIA-M16 요원들이 사망한 것도 모두 필비의 소행이었다. 이후 행적이 탄로 난 필비는 1963년 소련으로 망명해 여생을 보냈고, 지금까지도 그와 케임브리지 5인방은 영국에서 가장 악명높은 '반역 스파이'로 불린다.

악명높은 엔카베데는 스탈린이 사망하고 소련의 새로운 최고지도자로 집권한 니키타 흐루쇼프가 집권하면서 1954년 해체된다. 이어 흐루쇼프가 자신만의 새로운 첩보기관으로 창설한 것이 훗날 '크렘린의 검은 손'으로 불리는 KGB(소련 국가보안위원회)다.

KGB는 국내외 정보 수집, 반체제 인사 단속 등 엔카베데의 기능을 거의 그대로 물려받았다. 다만 엔카베데와의 차이는 맞춰 입은 제복을 통해 존재감을 과시하던 전신과 달리, KGB는 정체를 숨기고 일반인들 속에 섞여 들어가 비밀스러운 활동을 추구했다는 것. 누가 KGB인지 어디서 나타날지 알 수 없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엔카베데와는 또 다른 신비스러운 공포감과 불안감을 안겼다. 1980년대에 이르면 KGB의 규모는 약 48만 명에 이를 정도로 확대되어 세계적인 비밀공작 기관으로 자리매김한다.

냉전 시대 동안 두 강대국인 소련을 대표하는 KGB와 미국의 간판인 CIA 간에는 치열한 첩보 전쟁이 펼쳐졌다. 특히 1960년대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미국과 소련은 실제로 3차대전의 위기까지 치달은 사건은 유명하다.

전쟁 위기에 전환점을 마련한 것도 양국의 첩보전에서 비롯됐다. 미국 케네디 정부의 초창기 쿠바 침공과 전면전이라는 강경책이 득세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소련의 고위 정보국 장교이자 이중 첩자였던 올레크 펜콥스키를 통해 '소련의 미사일 기술이 아직 허술하다'는 결정적인 정보를 얻고 온건한 '협상'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결국 양국은 서로 미사일 기지 철수에 합의하며 한발씩 양보하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했다.

이후 펜콥스키는 1963년 KGB에 스파이 활동이 적발되어 처형 당한다. 소련 입장에서는 배신자이지만, 펜콥스키가 제공한 귀중한 정보로 인하여 세계 핵전쟁의 위기까지 막아낸 첩보전의 긍정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 방송 장면 갈무리 ⓒ tvN

 
정반대로 CIA가 KGB에 굴욕을 당한 사례도 있다. 올드리치 에임스는 본래 CIA의 베테랑 요원이었으나 불륜을 저질러 위자료가 궁해지자 자국의 주요 기밀을 KGB에 돈을 받고 판매하는 막장 행각을 벌인 인물로 유명하다. 에임스의 배신으로 소련 내에서 활동하다가 검거된 CIA의 고위직 이중스파이만 10명이 넘었다고 한다. 에임스는 소련으로부터 받은 보상으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리다가 꼬리 잡히며 1994년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현재까지 복역 중이다.

KGB는 이 밖에도 반체제 인사 암살, 첨단기술 탈취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며 서방의 정보기관들과 냉전 시대에 치열한 경쟁을 이어왔다. 하지만 냉전이 끝나고 전 세계가 해빙 무대를 맞이하며 KGB의 역할과 위상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한다.

1991년 반동 보수파가 고르바초프 정권에 맞서 일으킨 '모스크바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간 것이 결정타가 되면서, 보수파와 손잡고 쿠데타에 적극 관여했던 KGB의 주요 세력은 역풍을 맞고 크게 위축된다. 소련이 해체되고 새롭게 건국된 러시아 연방은 그해 12월 3일, 공포의 대상이었던 KGB를 60년 만에 전격 해체하기로 결정된다. 소련과 함께 세계사를 뒤흔들며 그 악명을 떨쳤던 KGB의 초라한 말로였다.

하지만 비밀공작기관은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현재 KGB의 뒤를 이은 조직으로 꼽히는 것은 FSB(러시아 연방보안국)다. 약 35만 명의 조직원을 보유한 FSB는 공식적으로 러시아의 안보와 관련한 정보수집 및 비밀공작을 담당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현재 러시아의 독재자인 블라디미르 푸틴도 한때 KGB 출신으로 유명하다.

최근 파리올림픽 방해 음모 혐의로 FSB와 관계된 러시아인이 프랑스에서 체포되는가 하면,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서는 FSB가 정부기관 컴퓨터를 해킹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시대와 이름만 바뀌었을 뿐, '제2, 제3의 엔카베데와 KGB' 등이 여전히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역사가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반복하는 것이다'라는 프랑스의 작가이자 사상가 볼테르가 남긴 어록이다. 격동적인 소련의 역사 속에서 비밀공작 기관은 '양날의 검'처럼 때로는 권력자의 편에 서서 잔혹한 학살을 벌이기도 하고, 때로는 기발한 스파이 활동으로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러시아만이 아니라 수많은 국가가 자국의 안위를 위해 다양한 정보 기구와 특수기관들을 운영하는 가운데,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건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무거운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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