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일본 연구소에서 찾은 특종... 4년여 추적 끝에 나온 '1923 간토대학살'

광복절 개봉하는 <1923 간토대학살>... 자료와 증언으로 진실 드러낸 김태영 감독

등록|2024.08.15 11:08 수정|2024.08.15 11:08
광복회와 '독립운동단체연합'은 오늘, 정부 주최 제79주년 광복절 경축식에 참가하지 않고 효창공원 내 백범기념관에서 기념식을 자체 거행하기로 했다. 민주당과 진보당 등 야당 또한 정부 광복절 행사에 불참을 결정했다.

이 모두가 간도특설대에서 독립군 탄압에 앞장선 백선엽을 추어올리고 1948년 건국설을 지지하며 민족해방투쟁의 의미를 깎아 내린 김형석이 독립기념관관장이 된 데서 비롯된 일이다. 윤석열 정부 들어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는 시도가 이것만이 아니지만, 다른 곳도 아닌 독립기념관장에 극우, 친일인사를 임명한 것에 지금 민심은 펄펄 끓고 있다.

한평생, 간토대학살의 진실을 파헤친 재일사학자 강덕상은 1987년 독립기념관이 세워질 때 자료를 제공하며 개관을 도운 바가 있다. 당시 일본의 한국문화원 원장 윤탁과 이진희 등이 강덕상 선생을 찾아가 이렇게 도움을 청했다.

"독립기념관을 만드는데 자료가 없다. 오픈했을 때 가장 관심을 갖고 볼 사람들은 일본 외무성과 일본 기자일 것이다. 독재자가 만들지만 관람하는 사람은 한국의 일반 민중이고 어린이다. 이들에게 진실을 보여주는 게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곳에 자료를 제공하는 것은 민족적 행위가 되지 않는가."

당시 국내 연구자들은 전두환이 추진하는 일을 거들 수 없다며 대부분 협조를 거부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거대한 전시실과 수장고를 채울 수 없는 실정이었다. 강덕상은 윤탁과 이진희의 말에 공감하여 자료제공에 한해 협조를 했었다. 독립기념관은 비록 전두환이 앞장섰지만, 일본이 1982년 고교 검인정교과서에서 '3·1운동'을 '폭동'으로 조선과 중국에 대한 '침략'을 '진출'로 왜곡한 것에 대해 항의하는 뜻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건립기금에서도 국민성금이 큰 몫을 차지한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이런 독립기념관의 관장에 반민족적인 역사관을 가진 사람을 임명함은 치열했던 대일항쟁을 욕보이고 일본의 끔찍한 죄과를 그대로 덮어버리는 행동이다. 지금 이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 1923 간토대학살 > 개봉의 의미
 

김태영 감독의 작업실에서그는 뇌출혈을 앓아 오른쪽 몸이 불편하다. ⓒ 민병래

 
이러한 때 김태영 감독이 만든 < 1923 간토대학살 >이 8월 15일에 개봉하게 되어 반가운 마음이다. 원래는 간토대학살 100주년인 2023년에 발표할 계획으로 작업했으나 101주년이 되는 올해 선을 보이게 되었다. 그동안 간토대학살을 다룬 좋은 영상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재일교포 오충공 감독이 1980년대에 만든 <감춰진 손톱자국>과 <불하된 조선인>도 역사적 작품이나, 한국땅에서 만들어진 것은 이번이 최초이기에 이 작품의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다.

김태영은 그동안 5·18을 최초로 다룬 영화 <황무지>(상영금지)를 1988년에 발표하고 미수교상태이던 베트남과 쿠바를 취재하는가 하면 다큐멘터리 제작사 '인디컴'을 설립하는 등, 우리나라 다큐멘터리계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이런 이력을 가진 김태영은 간토대학살을 제대로 다룬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늘 품고 있었다. 그를 움직이게 한 계기는 계명대 역사·고고학과 정성길 객원교수를 만나고서다. 정교수는 요코하마항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한 장을 건넸다. 철사에 묶여 몸통에 막대기까지 꽂혀있는, 간토대학살 때 살해된 조선인으로 여겨지는 사체가 찍혀있었다. 김태영 감독은 이날 작품을 만들겠다고 결심한다.

그 후로 4년여 시간, 2003년 뇌출혈로 쓰러져 장애 3급 판정을 받은 몸을 이끌고 움직였다. 작업일지를 돌아보면 촬영횟수가 모두 77회에 이른다. 일본 출장도 여덟 차례였다. 한 회차 촬영이 하루에 끝난 때도 있고 길게는 7박 8일에 이른 적도 있다. 드론 작업은 필수이고 두 개의 촬영팀이 한꺼번에 움직이기도 했다. 학살을 증언하는 일본의 시민운동가와 진행하는 인터뷰는 2~3시간을 넘기는 게 보통이었다. 히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나 스키오 히데야 국회의원의 인터뷰 같은 경우는 그쪽 일정을 맞춰야 하니 스케줄이 틀어지기 일쑤였다.

사건 사고도 있었다. 엿장수 구학영이 사망한 사이타마현의 요리이 마을을 촬영할 때였다. 옛거리와 구옥들을 찍는데 갑자기 석 대의 경찰차가 나타나 다짜고짜 김태영을 경찰서로 끌고갔다. 알고 보니 마을 주민 하나가 허락없이 자기 집을 찍었다고 신고했고 경찰은 외국인으로서 여권을 소지하지 않았다고 끌고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하네다 공항에서 김포행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5시간이나 억류되어 있다가 밤 9시가 되어서야 겨우 풀려났다. 그날 촬영은 완전히 엉크러졌고 늦은 밤에 숙소로 돌아가 겨우 귀국준비를 할 수 있었다

중요한 특종들

이런 노력을 기울인 덕에 이 영화에는 많은 특종과 귀중한 증언이 넘쳐난다. 가장 돋보이는 것은 역시 일본 자위대 방위연구소의 촬영분에서 확보한 사실이다. 자위대 방위연구소의 문을 여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가? '간토대지진'을 취재하겠다는 요청서를 넣고 6개월 여의 교섭 끝에 겨우 촬영 허가가 떨어졌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 서가를 마음대로 돌아볼 수 없으니 열람을 희망하는 자료를 신청해야 한다. 소장자료 중 어떤 자료가 간토대학살을 담고 있을지 알 수 없기에 결국 검색 키워드를 이리저리 짜맞출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도 난관은 또 있었다. 검색어로 추출된 자료 전체를 볼 수 없으니 다시 선택을 해 주어진 시간 내에 훑어보아야 한다.

노력과 정성이 통해서인가? 김태영 감독은 여기서 대어를 낚게 된다. 간토대지진 때 발령된 계엄령 하에서 계엄군이 남긴 전투상보가 그것이다. <공문비고 재해부속 12>라는 책자에서 "15연대가 조선인 3명을 총살했다"는 기록을 발견한 것이다. 이 책자의 전부와 앞뒤 시리즈물을 전부 복사해 검토할 수 있다면 더 많은 사실을 캐낼 수 있었을 게다. 김태영 감독의 카메라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도쿄도 공문서관도 찾아갔다. 여기서도 간토계엄군사령부 상세보고서 제5권에서 '재해경비를 위해 무기를 사용한 사건조사표'를 통해 군이 조선인 학살에 가담한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김태영 감독의 이 취재가 중요한 까닭은, 일본 정부가 한결같이 '조선인 학살'을 부정하며 정부 내에서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문서가 없다고 강변하고 혼란 속에서 일부 자경단이 저지른 소행으로 '간토대학살'을 덮어버리려 했기 때문이다. 영화 < 1923 간토대학살 >의 미덕은 수많은 증거와 증언을 통해 일본정부의 해명이 거짓임을 드러낸 것이다.
 

1923 간토대학살의 포스터한국 땅에서 다큐작품은 이 작품이 처음이다. ⓒ 김태영 제공

 
1923년 9월 1일 11시 58분 44초. 가나가와현(神奈川県)에서 가까운 사가미만(相模湾)을 진원지로 하는 대지진이 일어났다. 지진은 도쿄와 요코하마를 포함 관동 6개현을 덮쳤다. 사망자가 9만 9331명, 부상자가 10만 3733명이나 되었다. 인명피해만이 아니라 재산손실도 엄청났다. 완전히 부서진 집이 12만 8266호, 불탄 집이 44만 7123호나 되어 이재민의 수가 수백만 명에 이르렀다. 이재민의 아픔과 절망감은 말할 수 없이 컸다. 히로히토 밑에서 정부를 책임지던 야마모토 곤베에 내각은 심각한 위기 의식을 느꼈다. 배고픔과 부상에 신음하는 민중이 자칫 반정부 투쟁으로 나설까 두려웠다. 천황제가 위태로워질까 겁이 났다.

일본내각은 이재민 구호 대책이 아닌 체제 수호 방법에 골몰한 끝에 민중의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로 했다.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기로 하고 날조된 '조선인 습격설'을 명분으로 계엄령을 발동했다. 계엄군은 조선인을 진압하라는 임무를 받고 출동했다. 경찰은 메가폰을 들고 조선인에 대한 유언비어를 직접 퍼트리고 다니며 자경단 결성을 독려했다. 군대가 중핵이 되고 경찰과 자경단이 합세한 연합 대오가 만들어져 조선인은 갑자기 재해의 원흉처럼 내몰렸고 공격 목표가 되었다. 그로부터 끔찍한 학살극이 벌어진 것이다.

이것이 사태의 진실이고 야마다쇼지와 강덕상 등 많은 역사학자들이 연구 끝에 얻은 결론이다. 그래서 1923년 9월 1일의 비극을 '간토 조선인 대학살'이고 '제노사이드'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김태영 감독은 증언과 자료의 발굴을 통해 이 진실을 영화로 번역해냈다. 그렇기에 지난 5월 13일 일본국회의원회관에서 특별시사회가 열렸을 때 자리를 꽉 메운 청중으로부터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또 참석했던 NHK, <아사히> <마이니치> 언론사 관계자들은 취재의 깊이와 자료의 방대함에 놀라움을 표시하며 이 영화가 일본에서 개봉되면 적극 홍보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특별한 사람 이진희
 

공동감독 최규석그는 김태영 감독과 손을 잡고 4년여 시간을 쏟았다. ⓒ 민병래

 
이 영화는 김태영, 최규석이 공동 감독을 맡았다. 하지만 이 영화를 만든 주체는 니시자키마사오, 히라카타 지에코, 세키하라 마사오, 야마모토 스미꼬 같은 일본의 시민운동가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수십 년에 걸쳐 각 지역에서 학살의 자료를 찾고 워크숍과 설명회를 열며 일본의 국가책임을 물어왔기에 진실을 향한 여정이 중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김태영은 이 영화를 일본의 시민운동가에게 바친다고 말을 한다.

한편 이 영화가 완성되는 데 특별히 기여한 인물이 있으니 이스턴일리노이주 주립대 이진희 교수다. 그는 간토대학살에 관한 몇 안 되는 전문연구자로서 야마다쇼지 교수가 쓴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에 대한 일본국가와 민중의 책임>(논형, 2008)을 번역하고 '추도의 정치학'이란 관련 논문을 쓴 바 있다.

김태영 감독과 이진희 교수는 일본 현지 촬영 시에 우연히 만나 영화의 완성을 위해 손을 잡았다. 이 교수는 1923년 당시 요코하마와 도쿄라는 국제도시에 머물던 이방인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 지진과 학살의 참상을 일기나 자기 나라 언론 등에 다양하게 기록을 남겼을 것이라고 보고 이를 광범위하게 조사 수집했던 터, 영화의 완성을 위해 선뜻 자료를 제공하고 학문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해서 그는 '크리에이티브 PD'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부디, 이 영화가 많은 이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면 좋겠다. 하지만 개봉을 앞두고 그리 많은 스크린을 확보하지 못 한 것이 염려된다. 이 영화는 쫄깃한 재미도 플롯의 긴장감도 어떤 기교도 없다. 끝까지 보려면 참을성이 필요하다. 관람투쟁을 해야 한다.

영화관에 들어갈 관객에게 방현석 작가가 쓴 소설 <범도>에 나오는 한 대목을 들려주고 싶다. 일본이 1907년 한일신협약을 강요해 우리나라 군대를 해산시킨 후, 급기야 총포 소지금지에 관한 법령까지 공포했다. 홍범도를 비롯 모든 포수들의 총과 칼을 앗아갈 흑심이었다. 홍범도와 함경도의 포수들은 당연히 저항하며 일본 군대와 산발적인 싸움을 벌였다. 일본군은 이 저항을 깨겠다고 원산 위에 있는 북청에 집결했고 삼수, 갑산, 북청의 포수들도 후치령에 모여 항일연합포연대를 결성하고 결전을 준비했다. 출전을 앞두고 총대장 임창근은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선 땅에 없던 아주 고약한 짐승이 나타났단 말이외다. 왜놈이라는 늑대와 그 앞잡이 노릇을 하는 삵쾡이들 말이외다. 여기 후치령으로 몰려오고 있는 이 고약한 짐승들을 한 마리도 남김없이 몰수이 다 잡아야 우리가 조선의 산포수, 조선의 포군이라 할 수가 있겠다. 이 말이외다."

그의 외침에 후치령을 가득 메운 포수들은 총을 치켜들고 외쳤다.

"포수의 것은 포수에게."
"조선의 군대는 조선의 군인에게."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