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 사는데요, 바다 속으로 장보러 갑니다
스코틀랜드 세인트 모넌스 해안가 마을에서 톳·파래·다시다를 채취하다
스코틀랜드로 온 지는 3년 되었습니다. 틸리라는 조그만 마을에 영국인 남편과 세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국적도, 자라 온 배경도, 피부색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 곳의 소식을 전하고 싶습니다.[기자말]
내가 살고 있는 작은 마을 틸리에서 한 시간만 차로 달리다 보면 스코틀랜드 동쪽에 있는 작은 어촌 마을 세인트 모넌스(St. Monans)에 도착한다. 내가 이 마을을 알게 된 이유는, 처음 스코틀랜드로 이사 왔을 때 이 마을에서 6개월 정도 머물러야 했기 때문이다. 이번 여정은 러시안 친구 올가와 함께 했다.
그러니까, 내 눈엔 잡초같아 보이는 것들이 그에겐 허브로 보이는 것이다. 함께 산책할 때면 올가는 꼭 한 줌의 허브가 된 꽃을 꺾어 집에 돌아가곤 했다. 그 올가가 이번에는 바다풀을 뜯으러 나를 따라나섰다.
8월이면 장 보러 가는 곳
▲ 스코틀랜드 동쪽의 작은 어촌 마을 '세인트 모넌스' ⓒ 제스혜영
세인트 모넌스에 도착하자마자 코 끝으로 스며드는 짭조름한 냄새가 나를 바닷가로 끌고 갔다. 바닷물은 벌써 저어만치 모습을 감추고 울퉁불퉁한 바위들이 노랗고 연둣빛의 해초머리를 풀어헤치며 해맑은 얼굴로 우리를 반겨주었다.
무릎까지 오는 장화를 신고, 가위가 들어간 방수 가방 두 개를 어깨에 둘러 멨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장보기를 시작할 것이다(참고로 한국에선 채취할 때 허가를 받아야 하지만, 이 곳은 특정인 소유의 바다가 아닌 이상 채취가 가능하다).
첫 번째 품목은 다시마.
물이 살랑이는 저 끝의 바다까지 다다르려면, 뽀글뽀글하고 미끌거리는 초록 융단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 탓에 평지라면 5분이면 거뜬히 걸을 수 있을 거리를, 우리는 몇십 분째 낮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렸다. 어쩌다 올가와 눈이 마주치면 우리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겨우겨우 파도가 찰랑이는 곳까지 도착하니 정말 집채만 한 바위가 눈앞에 나타났다. 가방이 떨어지지 않도록 겨드랑이 사이에 바짝 붙이고 큰 바위를 조심조심 짚어가며 걸었다.
바위 밑으로 짙고 탁한 바닷물이 찰랑거리는 게 꽤 깊어 보였다. 갈라진 바위틈 사이를 겨우 비집고 들어가서야 큰 바위에 뿌리를 박고 물아래로 널브러진 누르스름한 갈색 다시마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발을 잘못 디디는 순간 난 이 광활한 바다에서 영원히 다시마와 함께 널브러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살짝 섬뜩했다.
▲ 세인트 모넌스(St. Monans)바닷가에서 채취한 다시마 ⓒ 제스혜영
살짝 긴장한 나와 달리, 올가는 '이런 바다 잡초를 어떻게 먹을 수 있냐'는 의문이 담긴 얼굴로 두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어쩌면 내가 올가와 산에 올랐을 때 잡초(같았지만 실은 허브였던 것)를 바라봤던 내 눈빛과 똑같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다시마 밑부분을 잘라서 올가에게 건네주었다. '오드득, 오드득' 하는 그의 씹는 소리가 내 귀까지 들려왔다. 씹으면 씹을수록 올가의 눈과 입꼬리가 신나게 마주쳤다.
'바위야 시원하니? 내가 시크하게 잘 깎아줄게.'
우리는 비좁은 바위 위에서 미용질을 시작했다. 어느새 가져온 가방 밖으로 '다시마카락'(다시마 머리카락)이 넘쳐났다. 옆에서 구경하던 파도도 짧게 잘린 바위의 머리가 마음에 드는지 자꾸만 내 장화를 철썩 철썩 치고는 돌아갔다.
▲ 세인트 모넌스 바닷가 바위에 붙어 있던 파래 ⓒ 제스혜영
두 번째 품목은 파래.
해변가 주위를 걷다 보면 납작한 돌 주위로 '나 좀 쳐다봐 주세요'라는 듯 다정하게 초록 눈빛을 보내는 파래들을 쉽게 만난다. 거품을 몰고 온 바닷물에 일렁이는 파래를 모래가 섞이지 않도록 살살 뜯었다.
매콤 달콤한 파래를 무쳐서 먹을 생각만으로도 입가에 군침이 돌았다. 바닷물을 머금은 이 신선한 파래를 아이들도 좋아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한 줌 한 줌 가방에 잘 넣었다.
▲ 세인트 모넌스 바닷가 갯바위 위에 있는 '톳'. ⓒ 제스혜영
세 번째 품목은 톳. 사슴의 꼬리와 비슷하게 생겼다는 바다의 나물, 녹미채. 갯바위 위로 잎줄기처럼 생긴 톳을 똑똑 따다가 가방 안에 넣었다. 톳은 짭짤하고 고소해서 과자처럼 씹어 먹는 재미가 있다.
작년 8월 이맘때였다. 밤새 머물렀던 바닷물이 마실을 나가고 태양빛에 온몸이 구워져 바짝 말려진 톳을, 나는 유기농 간식이니까 몸에도 좋다는 등 아는 척을 하며 남편한테 건네주었다.
예전엔 그렇게 생으로 많이도 먹었었는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톳에는 독 성분이 있어서 데쳐서 먹는 게 안전하단다.
엄마와 함께 부산 자갈치 시장에 갔던 기억
▲ 뒷마당 빨랫줄에 걸린 다시마 ⓒ 제스혜영
집으로 가져온 다시마를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고 곱게 펴서 하나씩 빨랫줄에 널었다. 창문을 열어 두니 바다 냄새가 풀풀 온 집안에 가득했다. 파래는 흐르는 물로 한 10분 정도 박박 씻었는데도 모래가 씹히는 바람에, 결국 눈물을 머금고 포기하기로 했다.
바득바득 씻은 톳에다 집에 남아 있던 쪽파를 송송 썰어 넣고 생선소스와 설탕을 조금 넣고 조물조물 버무렸다. 배를 타고 한국에서 온 귀한 고춧가루도 솔솔 뿌렸다.
▲ '세인트 모넌스' 바닷가에서 채취한 톳으로 만든 톳나물 무침 ⓒ 제스혜영
문득, 한국에 살 때 어린 시절 엄마와 함께 부산 자갈치 시장에 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목욕탕 의자에 앉아 잘 생긴 갈치 한 마리를 팔랑거리던 할머니가 우리를 보곤 말했었다.
"일로 오이소. 겁나게 싱싱합니데이~"
엄마가 두어 마리 생선을 봉지에 넣자, 할머니는 옆에 있던 다시마도 한 주먹 덤으로 넣어 주었다. 엄마가 데친 다시마를 사각으로 잘라 놓으면 흰 밥을 먼저 깔고 바삭하게 구워진 갈치와 김치를 그 위에 얹어 쌈을 싸 먹었었다. 초고추장을 듬뿍 바르면 밥 한 공기쯤은 뚝딱 해치웠었다.
▲ 다시마 쌈과 양념장 ⓒ 제스혜영
다음날 아침,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는 어제 데쳐둔 다시마와 초고추장, 톳나물무침을 가지고 올가 집으로 향했다.
올가는 생전 처음 맛보는 이 바다 잡초들로 무엇을 만들었을까 무척이나 궁금했다. 올가 집에 도착하자 올가는 어제 다시마와 톳으로 만들었다는 음식들을 식탁 위로 올렸다. 어쩜 똑같은 재료로 이렇게 다른 음식을 만들 수 있을까.
올가는 톳에 붉은 피망, 생강, 마늘을 넣고 토마토소스와 소금으로 볶았다. 그리고 흰 밥을 섞었는데 서양식 볶음밥이라고 해야 하나. 적당하게 촉촉하면서도 꼬들꼬들한 톳 때문에 고소하고 달콤했다. 데친 다시마는 벌써 분쇄기로 갈려있었다. 거기다 스위트칠리소스를 넣었는데 새콤달콤하니 부드러워서 빵에 발라먹어도 맛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 올가가 만든 '톳 '볶음밥 ⓒ 제스혜영
우리는 앉아서 먹는 것도 까먹을 만큼 서로의 요리를 시식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중에는 넓적한 다시마에 모든 음식을 조금씩 넣고서 쌈을 싸 먹었다. 어찌나 맛있던지 터질 것 같은 입을 오물거리며 서로 엄지만 계속 추켜올렸다.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아직도 입안에서 북적거린다. 내가 채취한 다시마, 톳, 파래를 누군가 봤다면, 내가 부산 자갈치 시장을 갔다 왔다고 해도 믿었을지 모른다.
한국을 나와 외지에 살고 있어서 바다가 주는 이런 선물이 더 특별했던 걸까. 나 혼자가 아니라, 러시안 친구 올가와 함께 나눌 수 있었기에 그 기쁨이 2배가 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부산의 자갈치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냄새가 나는 것 같은 이 해초들은 우리에게 세상 살 맛 나는 아침을 안겨 주었다. 그 즐거움을 나누고 싶어 이 긴 글을 썼다.
덧붙이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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