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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버스 13년, 8월 17일 아리셀로 출발합니다

[기고] '아리셀 희망버스', 작은 희망의 꽃씨 하나가 꽃밭이 될 것이다

등록|2024.08.16 10:51 수정|2024.08.16 10:51
 

▲ 2011년 7월 3일 경찰이 '3차 희망버스'의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앞 행진을 불허한 가운데, 그날 오전 부산 영도구 봉래언덕길에서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중인 김진숙 지도위원을 향해 손을 흔들자. 김 지도위원이 손을 흔들며 답례를 하고 있다. ⓒ 유성호

 
2011년, '희망버스'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 처음 등장했다. 한진중공업 노동자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85호 크레인에서 150여 일 넘게 고공농성 중인 김진숙과 조합원을 응원하기 위해 시작한 희망버스는 어느 순간부터 사회적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시민들의 자발적 연대가 지속되면서 새로운 사회운동이라는 해석이 뒤따랐다. 특히 노동문제에 거리 두기를 하던 이들의 참여가 도드라졌다. 무엇이 이들을 움직였을까? 35m 높이의 비좁은 크레인 안에서 장기간 투쟁하는 노동자와 그의 외침이 어느 노동자의 투쟁과는 다르게 다가왔다. 이명박 정권의 폭압에 숨죽이고 있을 때 끈질긴 노동자의 투쟁은 연대의 발걸음을 모아냈다.

하지만 그 발걸음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연대의 경험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85호 크레인에서 308일을 싸운 김진숙은 "어떻게 연대해야 하는지, 누구의 손을 잡아야 하는지, 어떠한 연대가 진정한 힘을 가질 수 있는지를 우리 눈으로 확인했다"며 희망버스는 '억압받는 자의 새로운 희망'이라고 외쳤다. 그러면서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이라고 끝맺음을 했다.

함께 한 연대자들은 그의 투쟁과 발언 속에서 위로하러 갔다가 위로받는 느낌을 간직할 수 있었다. 시혜적인 연대가 아닌 평등한 연대, 소비되는 연대가 아닌 공감과 치유, 환대가 있는 연대였다. 이것이 희망버스의 힘이었다.

그 후로 10년이 훌쩍 지났다. 그 사이 24번째 희망버스가 출발했다. 노동문제에만 국한하지 않지 않고 밀양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밀양희망버스'도 있었다. 지난해 0.3평 철제 구조물 안에서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라며 '비정규직 차별철폐'를 절규하던 유최안 대우조선 하청노동자를 응원하는 희망버스가 마지막이었다.

매번 희망버스를 준비하지만 처음 같은 참여와 열기가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 사회적 관심과 연대를 이끌어내기 위한 다양한 시도와 노력은 계속되었다. 희망과 연대를 잇기 위한 실천이었다. 희망버스라는 이름은 어느새 사회적 연대의 상징이 되었다. 희망버스가 출발한다는 소식만 들어도 귀를 기울이고 옛 기억을 떠올리는 이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누구의 손을 잡아야 하는가
 

▲ 6월 25일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리튬전지 공장 화재 현장에서 경찰과 소방,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국토안전연구원, 고용노동부, 산업안전관리공단 등 관계자들이 합동감식을 위해 이동하고 있다. 전날인 24일 오전 10시 31분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 소재 일차전지 업체인 아리셀 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 연합뉴스

 
이 희망버스가 8월 17일 또다시 출발한다. '아리셀 희망버스'다. 23명의 죽음이 발생한 지 55일째 되는 날이다. 중대재해 화재 참사가 발생했을 당시 온 사회가 충격이었다.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던 화마 앞에서 망연자실했다. 화재진화는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불이 저절로 꺼지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리튬배터리가 그렇게 무서운 것인지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개별적으로 보관해야 할 리튬배터리 삼만 오천 개가 쌓여 있었고 화재 발생 당시 대피로는 배터리로 막혀있었다. 일반소화기로 화재 진압을 하던 노동자가 제일 먼저 희생 당해야 했다. 화재가 발생하면 피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줬다면 이런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아리셀 공장에선 다섯 차례 폭발사고가 있었고 최근에도 화재가 발생했다는 것이 사고 이후 밝혀졌다. 이런 곳이 산업재해 예방 우수기업이라는 표창까지 받았다고 한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18명이 불법 파견 이주노동자였다. 그래서일까? 사고 현장에 대통령이 찾아오고 박순관 사장이 국민 앞에 머리를 조아렸지만, 참사 50일이 지나도록 유가족의 요구는 허공을 맴돌고 있다. 박순관은 유족의 요구는 외면한 채 자신만 살기 위해 김앤장 변호사를 선임하고 유족에 개별 합의를 종용하고 있다. 이주노동자라는 죽음의 차별에 숨어서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다.

죽음과 차별은 불법파견·이주노동자를 집중적으로 겨냥하고 있다. 제조업의 불법 파견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사용자는 이를 피해 가기 위해 이주노동자를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 이것이 아리셀 중대재해 참사의 주된 원인이다. 이 고리를 여기서 끊지 않으면, 이주노동자와 정주노동자를 가르지 않고 제2, 제3의 아리셀 참사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희망버스의 역사는 끝없이 아래로 향하는 연대였다. 정리해고자의 아픔과 함께 시작된 희망버스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투쟁으로 이어졌으며, 이젠 '위험의 외주화'와 '죽음의 이주화'를 중단하라는 시대의 요구를 안고 다시 출발한다.

김진숙은 다시 외친다. '모든 소외되고 억압받는 곳으로 향하는 연대가 진정한 연대'라고. '작은 희망의 꽃씨 하나가 어떻게 꽃밭이 되는지 기억할 것'이라고. 이것이 희망버스의 약속이다. 지금 누구의 손을 잡아야 하는가? 8월 17일 화성에서 아리셀 유가족이 기다리고 있다.
 

▲ 화성시청 1층에 마련돼 있는 화성 아리셀 화재 참사 추모분향소의 2일 오후 모습. ⓒ 소중한

 
덧붙이는 글 이 기사를 쓴 황철우씨는 아리셀희망버스 공동집행위원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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