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호 만났던 그날,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어"
이가령 아트교담 대표에게 듣는 '김대중·이희호 부부 이야기'
필자는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마을(다음카페)'을 운영해 오고 있다. 카페 개설이후 '김대중(DJ) 정신' 계승·구현을 위해 관련 단체에서 제공받은 사진과 직접 찍은 사진을 모아 'DJ 생애 사진전'을 네 차례(2015, 2018, 2023, 2024) 열었다. 2023년 2월 뜻을 함께하는 분들과 '김대중대통령 군산기념사업회(DJ 군산기념사업회)'를 구성하였다. 이후 ‘DJ 스터디’를 13회 진행했으며, 지난 6월에는 '이희호 여사 생애 사진전'을 개최하였다.[기자말]
▲ DJ 자택 접견실에서 카페 성격에 대해 설명하는 필자(2005년 어버이날) ⓒ 조종안
이희호(1922~2019) 여사는 DJ 서거(2009년 8월 18일) 후 김대중평화센터 제2대 이사장으로 선임된다. 이 여사는 취임 인사말에서 "고인이 된 남편의 유지를 받들게 돼 감사하다"며 "센터 설립 목적인 한반도와 동아시아를 비롯한 세계평화, 남북의 화해 협력을 위해 힘쓰겠다"고 밝혔다. 이어 "빈곤한 이웃을 돕는데도 힘을 보태겠다"고 부연했다.
2009년 8월 DJ가 유명을 달리하고 3개월 남짓 지난 11월 26일 아침에 반가운 전화 받았다. 김대중·이희호 부부를 15년째 보좌해오고 있는 윤철구 비서관(당시 김대중평화센터 사무총장)이었다. 윤 총장은 이희호 여사가 군산에 가시는데, 모 가든(꽃게장 전문식당)에서 점심이나 하자며 아내와의 동행을 희망했다. 고마웠으나 아내는 근무와 겹쳐 동행할 수 없었다.
이희호 여사는 동교동자택 초청 방문 및 신년하례식(2005~2008), 동대구역 환영 행사(2006년 3월), 부산역 환영 행사(2006년 9월), 김대중도서관 후원의 밤(2006년 11월), 전북 익산역 환영 행사(2007년 4월), 노벨평화상 수상 기념행사(2007년 12월), 마지막 고향방문 동행 취재(2009년 4월) 등 DJ와 함께 몇 차례 뵌 적은 있지만, 식사 자리 초대는 처음이었다.
최영(2011년 작고) 시인에게 전화해서 전후 사정 설명하고,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다. 최 시인은 자신의 수상록(<은파에서 째보선창까지>)에 김대중·김영삼의 민주화 운동 과정을 비롯해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등 역대 대통령 군산 방문 당시 상황을 꼼꼼히 기록한 향토 시인이었다. 필자는 DJ 관련 책자와 관련 정보를 그에게 보내줬고 그때마다 원고 작성에 도움 된다며 기뻐했었다.
▲ 군산 꽃게장 전문 식당에 도착한 이희호 여사(2009년 11월 26일) ⓒ 조종안
이 여사 도착 예상 시각보다 한참 일찍 식당 주차장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한 최 시인이 상기된 표정으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10분쯤 지났을까, 이희호 여사 일행이 도착했다. 이 여사를 보는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그해 4월 하의도 방문 때는 부부 동반이었는데 몇 달 사이 혼자된 모습을 보니 마음 한편이 아려왔다.
이날 군산을 방문한 이 여사는 지인(익산 거주)과 식사만 하고 돌아갔다. 윤철구 비서관에 따르면 이 여사는 평소 군산 꽃게장을 무척 좋아했단다. 광주 망월동에 갈 때마다 군산에 들러 꽃게장 전문 식당을 찾았다는 것. 군산을 지나치는 날은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 들러 권양숙 여사를 만나고 상경했다고 한다.
"민주주의와 여성 인권 신장 위해 사셨던 분"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여성운동 단체 리더로, 탄압받는 야당 정치인 아내로, 퍼스트레이디로 살아온 이희호 여사. 그는 대한여자청년단, 여성문제연구회, YWCA연합회, 한국여성단체협의회 등의 총무, 이사, 회장 등을 역임하며 가족법 개정, 축첩 정치인 반대 등 여성의 권익 신장에 앞장서 왔다. 특히 소외계층의 빈곤과 인권 문제는 그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 'DJ 스터디' 진행하는 필자와 회원들(앞에서 두 번째, 이가령 대표) ⓒ 이종예
친정어머니가 김대중 대통령에게 노리개 선물 받는 꿈(태몽)을 꾸고 지금의 아들(고등학생)을 낳았다는 이가령(50대) 아트교담 대표. 그는 "그날(2009년 11월 26일) 식당에서 지인과 점심 먹고 나오다가 차에서 내리는 이희호 여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예상치 못한 만남이어서 최정상급 연예인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며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TV 뉴스에서만 봐왔던 분(이희호 여사)을 실제 만났을 때 최정상급 연예인을 본 것 같기도 했다. 든든한 보디가드 같은 수행비서들이 계셔서 그런지 위엄과 강한 포스(force)가 느껴졌으며, 단아한 정장 차림에서 기품 있는 멋이 엿보였다. 먼발치에서 잠깐 뵙긴 했지만, 특유의 아우라와 조신한 몸짓, 표정 등에서 '공적인 언행이 몸에 밴 분이구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여사는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분으로 겉보기엔 부드럽게 느껴지지만, 실제는 꿋꿋하고 강한 '외유내강'형 여성인권 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이 여사 자서전 <동행>을 보면, '한 지인은 김대중 정부 업적의 40퍼센트는 이 여사 몫'이라는 대목이 있는데, 그에 공감한다. 평생을 한국 민주주의와 여성 인권 신장을 위해 사셨던 분으로 평가받았으면 좋겠다."
"이 여사 뵈었던 그날,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어"
▲ 청년시절 DJ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이가령 위원 (2023년 6월) ⓒ 조종안
이가령 대표는 DJ 군산기념사업회 운영위원이기도 하다. 그는 'DJ 스터디'에 참석하면서 알게 된 정보(김대중·이희호의 인연과 부부애,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 화이부동 정신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며 초등학생 시절 경험담도 들려줬다.
"나는 1970년대 유신 통치와 부마사태, 10·26사태, 재5공화국 등을 거치면서 얼마나 많은 정치인과 젊은이가 희생되었고 옥살이 했는지, 또 그들이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 잘 모르고 성장했다. 초등학교 때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고 해서 급우들과 단체로 빈소를 찾아 묵념하고 눈물 흘렸던 일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아무 영문도 모르는 채...
스터디 때 'DJ 리더십', '옥중서신', '남다른 부부애', '화이부동' 정신 등을 배웠는데 옥중 편지가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두 분(김대중-이희호)은 편지 주고받을 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당신'으로 시작했다. 이는 그 자체만으로 두 분이 얼마나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였는지, 또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며 살았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이희호 여사는 자서전 <동행>(2008)에서 "남편(DJ)은 불가항력적인 상황에 처하면 수용하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며 "그는 도합 6년여의 긴 감옥생활을 가족과의 면회, 독서, 화단 가꾸기, 편지 쓰기 등 네 가지 낙으로 견뎌냈다. 지금까지 살면서 그만큼 진지하고 꾸준히 노력하는 남자를 본 일이 없다"고 회고했다.
이에 대해 이가령 대표는 "이희호 여사는 남편(DJ)이 감옥에 있을 때 양말까지 다리미로 다려서 넣어줬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한결같은 분이었다. 그의 신앙적 믿음과 헌신적인 지지, 그리고 세밀한 분야까지 놓치지 않는 조언 등이 남편을 성공한 대통령, 나아가 세계적인 인물로 거듭나게 했다고 본다"라며 한마디 덧붙였다.
"납치와 억울한 옥살이, 가택연금, 사형선고 등 좌절과 어두움이 엄습하던 시대에도 결코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남편(DJ)의 버팀목이 되어줬던 이희호 여사 의지가 존경스럽다. 그분의 생전 모습을 먼발치에서나마 뵐 수 있었던 그날을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다."
▲ 이희호 여사 자서전(<동행>)에 대해 설명하는 이가령 위원 ⓒ 조종안
덧붙이는 글
덧붙임: 위 기사는 2009년 11월 26일 필자의 메모장과 최근 이가령 아트교담 대표 인터뷰 내용을 취합해 작성했으며, 9월쯤 펴낼 책(<조종안 기자의 DJ 취재기>)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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