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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가 가는 아들의 혼서를 직접 썼습니다

아내가 내민 나의 혼서... 아버지가 정성을 다해 쓴 글씨를 보며 울컥

등록|2024.08.20 16:35 수정|2024.08.20 16:35
"당신이 직접 쓰지?"

"내가?"

"그래요."

"그걸 내가 어떻게, 그리고 그런 거 한 번 써 보지도 않았는데......"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일이다. 아내가 함 갈 때 함께 보내는 혼서지를 써 보라고 했다. 아들이 장가를 간다.

결혼식 한 달 보름을 앞두고 아내가 한복을 맞춘다며 한복집에 다녀왔다. 옷 치수를 위해 예전의 한복을 가져갔는데 가져간 그 한복이 아직도 최상이라며 한복을 다시 맞출 필요가 없다고 했단다. 한복집 사장이 너무 양심적이어서 고마운 마음에 함을 예약하고 왔단다. 아내가 입이 마르게 칭찬한다.

"뭐, 함 때문이겠지."

"그런게 아니라니까, 오히려 함은 내가 보자고 했다니까요."

"그렇다면 거기서 써 주지 않나?"

"그래도 아버지인 당신이 써야 의미가 있지."

나의 혼서지

혼수 함아들이 장가를 간다 ⓒ 정수권


그래서 이때부터 고민이 시작 되었다. 그러나 아직 시간이 있으니 천천히 붓글씨 연습도 하면 어찌 되겠지 하면서 차일피일 시기를 미뤘다. 급기야 팔월 중순에 예비 사돈댁에 함을 보내기로 했다며 아내가 채근을 했다.

급한 마음에 인터넷으로 혼서지 쓰는 법을 찾아보다가 얼마 전 질녀를 결혼시킨 대구에 사는 동생에게 받은 혼서지 사진을 보자고도 했다. 며칠을 두고 이리 저리 알아보니 내용은 비슷하나 지역마다 가문마다 조금씩 다르고 현대식으로 고쳐 쓰기도 했다. 내가 자란 안동 지방의 혼서지를 주로 찾아 봤지만 역시 어려웠다. 고민이 깊어지자 아내가 상자 하나를 안방에서 들고 나왔다.

"이걸로 참고 하세요."

"아니, 이건....."

뭔가 하고 열어 보니 그 속에는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혼서지보가 있었다. 아내가 시집 올 때 가져 와서 장롱 깊숙이 간직해둔 모양이다. 띠 고름이 달린 매듭에 싸인 보자기의 청색과 홍색이 아직도 선명했다. 잠시 망설여졌다. '이걸 보면 안 되는데, 어쩌지?' 그러나 그새 성질 급한 아내가 보자기를 풀었다. "어, 어, 아니~" 하다가 나도 모르게 그만 보게 되었다.

▲ 아버지께서 쓰신 나의 혼서 ⓒ 정수권


여기서 잠깐, 혼서란 혼인 때 신랑 집에서 예단(禮緞)과 함께 신부 댁으로 보내는 편지를 말하는데, 예서(禮書), 예장(禮狀)이라고도 한다. 전통혼례에서 납폐(納幣) 절차의 2번째 순서이며 혼서와 채단을 함께 보내는 의식으로 한지를 간지(簡紙) 모양으로 접어서 쓰고 겹보자기에 싸서 띠(謹封)를 두른 다음 함속 맨 위에 올려놓는다. 혼서는 시대, 지역에 따라 서식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靑南 권영한 書 참조).

내용을 보면 대략 이렇다.

때는 가을입니다.

안녕하세요. 혼례의 명에 따라 귀한 따님을 며느리로 삼게 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아들이 장성하였으나 그동안 배필이 없었는데 이렇게 허락해 주시니 이에 조상님께 예를 드리고 삼가 절하며 납폐 의식을 행하니 살펴 주십시오.

伏 惟 孟 秋

嘉 命 許 以 令 愛 貺 室 僕 之

子 0 0 年 旣 長 成 未 有 伉

麗 加 之 卜 筮 己 叶 吉 兆 玆

有 先 人 之 禮 敬 遣 使 者 行

納 徵 義 伏 惟

尊 慈 特 賜

鑒 念 謹 宣 再 拜 上 狀

아, 순간 생전의 아버지를 대하는 듯 마음이 울컥했다. 한지에 반듯하게 쓴 처음 보는 글씨가 아버님 성품과 꼭 닮아 있었다. 둘째 아들 혼사를 위해 정성을 다해 쓰셨을 걸 생각하니 절로 옷깃이 여며졌다.

글씨를 잘 쓰다

40여 년 전 건강하게 군에서 제대했지만 갑자기 몸이 아파 대구에서 그림 그리기를 소일 삼아 쉬고 있을 때 아내를 만났다. 첫눈에 반해 사귀었고 이듬해 청혼을 하고 혼사 얘기가 오갔다. 몸이 다 낫지 않아 성치 못하니 결혼 준비는 시골의 형님과 대구에 사는 누님이 상의하여 준비를 했다.

함을 보낼 때가 되자 어느 날 아버지께서 집에 다녀가라 하시기에 고향집에 들렀더니 이 보자기를 내어 주셨다. 혼서였다. 펼쳐 보지도 못하고 품에 안고 와 지금까지 아내가 잘 보관하고 있었다.

속설에 의하면 이 혼서는 펼쳐보아서는 안 되며 죽는 날까지 꼭 간직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망설여졌던 것이다. 마치 땅속에 묻혀 있던 보물이 밖으로 나와 햇볕을 보자마자 기가 확 빠져나가 사그라 들 것 같았는데... 다행히 이번 기회에 잘 봤다고 생각하며 덕분에 혼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 아버지께서 쓰신 나의 혼서 ⓒ 정수권


온 집안을 뒤져 붓을 찾고 꽁꽁 싸매둔 벼루를 찾아서 책상 위에 차려 두고 화방에 들렀다.

"제일 좋은 한지 두 장 주세요."

"글씨 쓰실 거면 이게 최상입니다"

"얼마입니끼?"

"두 장에 십일만 사천 원입니다."

"네에?"

물가가 올랐다지만 그래도 너무 비싸다. 종이 찾는 사람이 적어 한지 만드는 곳이 드물다고 했다.

집안 내력으로 아버지는 물론 할아버지께서도 글씨를 잘 쓰셨다. 집안 대소사와 마을의 큰일은 막내 삼촌에게 쓰게 하시고 아버지는 제문도 지어 쓰셨다지만 보지는 못했다. 가끔 제사 때 지방 쓰시는 걸 본 일은 있지만 이런 글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 옛날 군대에 있을 때였다. 하루는 중대장이 "부친께서 글씨를 잘 쓰시네, 자네가 아버님을 닮았군"이라고 했다. 나 또한 글씨를 잘(?) 써서 그 덕택에 행정병과 보직으로 서무계를 맡고 있었다.

중대장이 나에게 시켜 중대장 이름으로 모든 부대원이 건강하게 잘 지낸다며 등사기로 인쇄된 편지를 일일이 집으로 가정통신문을 보냈는데, 아버지께서 중대장 앞으로 답장을 보내 신 걸 보고 내게 말했다. 그때부터 아버지가 글씨를 잘 쓰시는 줄 알았다.

함을 보내다

아들의 혼서지장가 드는 아들의 혼서를 직접 썼다. ⓒ 정수권


그 후 며칠을 끙끙대며 썼으나 아버지의 발끝도 못 따라갔다. 글씨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었지만 어찌 어찌하여 마무리 했더니 아들이 보고 그래도 잘 썼다며 '멋있어요~' 라고 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함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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