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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기만 하면 벽째 훔쳐간다는 이 작가의 그림

'리얼 뱅크시' 전시, 인사동서 10월 말까지... 서적과 외신 통해 본 작가 뱅크시

등록|2024.08.20 17:30 수정|2024.08.20 17:30

▲ 서울 종로구 인사동 그라운드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뱅크시 전시회. 왼쪽 작품이 뱅크시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꽃을 던지는 사람’이다. ⓒ 이재우


때론 은유와 위트로 가득 찬, 때론 도발적이며 정치적인, 그러면서도 매력적인 사람. 영국 출신의, 벽에 그림을 그리는 그래피티 아티스트. '얼굴 없는 예술가'로도 유명한 뱅크시(Banksy)의 작품은 메시지가 강하다. 그런 그의 작품들을 한국에서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건 분명 행운이다.

리얼 뱅크시(REAL BANKSY) 전시회에 다녀왔다. 나는 지난 8월 17일 서울 종로구 그라운드서울(옛 아라아트센터)에서 '꽃을 던지는 사람', '풍선과 소녀' 등 뱅크시의 주요 작품들을 '영접'할 수 있었다. 뱅크시가 설립한 인증 기관인 '페스트 컨트롤'의 공식 인증을 받은 보석 같은 작품들로, 보도에 따르면 현재까지 국내에서 열린 뱅크시 전시 중 최대 규모라 한다(전시는 10월 20일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이제 뱅크시의 작품이 경매에서 얼마에 팔리는지는 더 이상 뉴스가 되지 못한다. 필자는 뱅크시와 관련된 서적들, 외국 언론 기사들을 종합해 뱅크시에 대한 몇 가지를 분석해 봤다.

뱅크시가 얼굴 숨기는 이유... 차별화 전략

세계적으로 유명한 현대 예술가 중 한 명인 뱅크시. 그는 과거 자기 고향인 영국 브리스톨에서부터 런던, 파리, 뉴욕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예술(그래피티)로 전 세계 도시들을 '파괴'했다(좋은 의미로). 거리뿐 아니었다. 이상한 가발을 쓰고, 가짜 수염을 붙이는 등 우스꽝스러운 차림으로 유명 박물관과 갤러리에 무단으로 습격해(?) 자신의 작품을 걸고 유유히 사라졌다.

이런 '악동'은 1974년생으로 추정되며, 영국 남부의 작은 도시 브리스톨에서 태어났다. 다른 신상은 공식적으로 베일에 가려져 있다. 그는 왜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까?

사실 팬들 상당수조차 이런 신상이 밝혀지기를 원하지 않는단다. '익명성'은 뱅크시의 강력한 무기인 셈이다. 런던의 한 미술상은 AP통신을 통해 "익명성은 뱅크시 매력의 핵심 요소"라고도 말했다.

<뱅크시, 벽 뒤의 남자>(2021, 미술문화)라는 책을 쓴 영국 언론인 윌 엘즈워스-존스에 따르면, 초창기 뱅크시는 작품에 '은행털이(robbing banks)'를 연상시키는 로빈 뱅크스(Robin Banx)라고 서명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더 기억하기 쉬운 뱅크시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름 자체가 팬들을 위한 '작명'이었다는 얘기다.

▲ 뱅크시의 화제작 ‘풍선과 소녀’. ‘풍선과 소녀’는 소더비 경매장에서 파쇄돼 유명해졌는데,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은 파쇄되지 않은 버전이다. ⓒ 이재우


그는 여전히 얼굴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 2010년으로 거슬러 가보자. 그해 미국 타임지가 버락 오바마, 스티브 잡스 등과 함께 그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으로 선정했다. 그런데 뱅크시는 얼굴 대신 종이 봉투를 머리에 뒤집어쓴 자신의 사진을 내보냈다. 배짱 좋은 작가(?)가 아닐 수 없다.

뱅크시가 별나게 익명성을 추구하는 구체적인 이유를 2010년 미국 기자와의 인터뷰(역시 익명)를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찰리 채플린은 이런 말을 했죠. '만약 내가 소리 내어 말하기 시작하면 많고 많은 배우 중 한 사람일 뿐이다.' 나도 찰리 채플린과 같은 처지입니다."

채플린이 그러했듯 뱅크시는 다른 예술가들과 자신을 뚜렷하게 구분 짓고 싶은 의도가 강했던 것 같다. 당시 그는 얼굴이 완전히 가려진 검은색 후드 티를 입고 인터뷰했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도 대면이 아닌 이메일로 진행한다.

2013년 미국 스미소니언 매거진, 또 2021년 출간된 <뱅크시, 벽 뒤의 남자>라는 책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뱅크시의 마지막 대면 인터뷰는 20년도 더 전인 2003년이 마지막이었다.

▲ 사람들은 왜 뱅크시에게 열광할까? 뱅크시는 세상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날리며 전쟁, 자본주의, 소비주의, 사회 전반을 풍자한다. ⓒ 이재우


뱅크시 만든 환경, 고향 영국 브리스톨의 거리 예술

미술대학을 다니지도,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뱅크시는 어떻게 벽화를 그리는 그래피티 아티스트가 됐을까? 고향인 브리스톨의 환경이 그를 그렇게 키운 것으로 보인다. 브리스톨의 예술 현장을 다룬 책 <Massive Attack>을 쓴 저널리스트 멜리사 체맘(Melissa Chemam)은 "브리스톨은 ​​가장 역동적인 거리 예술의 수도 중 하나로 손꼽힌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1983년 여름 브리스톨의 강 근처에서 첫 거리 벽화가 등장했는데, DDD(3D)라는 가명이 적혀 있었다. 3D는 18세 거리 예술가 로버트 델 나자(Robert del Naja, 1965년생)의 가명이었다. 브리스톨 거리 예술의 선구자인 3D의 영향으로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책에 나오는, 뱅크시가 미국 예술잡지 '스윈들(Swindle)'에 했던 말을 들어보자.

"내가 열 살쯤 되었을 때, 3D라는 사람이 거리에서 열심히 그리고 있었어요. 그는 브리스톨에 스프레이 페인트를 처음 가져온 사람이었어요. 나는 거리에서 스프레이 페인트를 보며 자랐습니다."

▲ 폭탄을 껴안은 소녀의 모습을 담은 작품 ‘폭탄 사랑’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게 만든다. ⓒ 이재우


그런 3D는 뱅크시에게 많은 영감을 준 인물이었다. 하지만 당시는(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무단으로 작업하는 거리 예술은 범죄 행위였다. 경찰이 놔둘 리 없었다. 1980년대 후반 브리스톨을 포함한 몇몇 도시에서 '앤더슨 작전(Operation Anderson)'이라는 경찰의 대대적인 단속이 시작됐다.

작품과 도구를 압수당하고 처벌을 받으면서 그래피티 붐은 잠시 멈췄지만, 거리 예술은 이후 시각 예술의 새로운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됐다.

"'벽'만 있으면 누구나 볼 수 있는 그래피티, 가장 정직한 예술"

▲ 뱅크시는 윈스턴 처칠을 모히칸 헤어스타일(오른쪽)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침팬지로 ‘희화화’하는 악동이기도 했다. ⓒ 이재우


뱅크시는 왜 그래피티와 벽에 집착했을까? 그는 2015년 자신이 펴낸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래피티는 가장 정직한 예술 중의 하나다. 그래피티는 누굴 선동하거나 선전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이걸 전시하기 위해선 그저 동네에 가장 좋은 '벽'만 있으면 충분하다. 작품을 보기 위해 어느 누구도 입장료를 낼 필요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Banksy, Wall and Piece>에서 발췌, 펴낸 곳 세리프)

뱅크시는 이제 미켈란젤로처럼 여겨진다. (2019년 영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예술가 1위로 선정되었는데, 당시 미켈란젤로는 10위에 랭크됐다) 더 이상 당국은 그의 작업을 방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키려 한다. 관광객들을 불러들이기 때문이다.

벽 소유주들도 영리해졌다. <뱅크시, 벽 뒤의 남자>의 저자는 "뱅크시가 그리는 데 사용한 담벼락의 주인들은 당장 작품을 보호하지만, 곧 떼어내서 시장에 내놓는다"며 그 뒤의 숨은 상업성을 꼬집었다.

아울러 뱅크시의 그림을 벽과 함께 통째 뜯어가는 절도 행위도 종종 발생했다. 지난 8일에도 '도난' 기사가 보도됐다. 뱅크시 작품을 뜯어간(?) 이들은 어딘가에서 이렇게 외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뱅크시 벽 사실 분 계신가요?"

한편, 뱅크시가 작업을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뭘까? 그는 20대 초반 그래피티에서 스텐실(Stencil) 작업으로 이동했는데, 스텐실은 빳빳한 카드에서 원하는 모양을 오려내 벽에 붙이고 에어로졸 캔으로 스프레이 한 뒤 카드를 떼내면 그 모양만 남는 방식을 말한다.

뱅크시는 BBC 인터뷰에서 "나는 그래피티보다 캔버스 작품을 더 잘 그리려고 한다"며 "문제는 그래피티를 그릴 때 느끼는 흥분을 캔버스에 옮길 수 있느냐인데, 그게 내가 안고 있는 문제"라고 했다. 벽에 직접 그릴 때의 짜릿한 흥분감을 캔버스가 따라오지 못한다는 말이다.

한편, 뱅크시는 유독 '쥐'에 대한 그림을 많이 그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에게 '쥐'는 어떤 상징물일까? 미술 비평가들의 말을 빌리면, 쥐는 뱅크시 작업의 가장 큰 영감의 원천이며, 가장 생산적인 주제 중 하나다.

그런 쥐는 뱅크시의 페르소나와도 같다. 초창기 거리 예술가들이 밤에 몰래 낙서를 하다 경찰에 쫓겨 다녔듯이, 쥐 역시 환영받지 못하는 귀찮은 존재로 여겨진다.

▲ 뱅크시의 ‘KEEP OU’라는 작품. 쥐가 T를 떼어내 망치로 삼아 셔터 자물쇠를 부수려 하고 있다. (이 사진은 책 <뱅크시, 벽 뒤의 남자>라는 책에서 촬영, 발췌했다. 현재 그라운드서울이 전시를 담당하고 있기에 저작권은 ‘그라운드서울’로 표기했다.) ⓒ 그라운드서울


뱅크시 작품을 설명하는 한 사이트(banksyexplained.com)는 "뱅크시는 쥐의 모습에 목소리를 부여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억압받고 패배한 사람들을 대변하고 있다"고 했다. 뱅크시는 더 나아가 "당신이 무시당하며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면, 당신의 궁극적인 롤모델은 바로 쥐"라고도 했단다(책 < Banksy, Wall and Piece >에서 발췌).

이번 전시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뱅크시의 쥐 그림 중에 출입 금지를 뜻하는 'KEEP OU'라는 인상적인 작품(사진 위)이 있다. 관람객들은 "끝에 붙어 있어야 할 T가 왜 없지?"라며 궁금해한다. T는 쥐가 가져갔다. 그림 아래를 보면 쥐가 T를 떼어내 망치로 삼아 셔터 자물쇠를 부수려 하고 있다. 쥐는 아마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을까?

"출입 금지라고? 금지는 뭔, 개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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