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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만의 재개봉, 거장이 그린 종말 전야

[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희생>

등록|2024.08.21 09:31 수정|2024.08.21 09:31
한 편의 고전 명작이 재개봉을 맞이한다. 최근에는 개봉 1주년 기념 재개봉도 있기에 재개봉이 대수냐 싶지만, 이 영화는 30여 년 만의 재개봉이다. 이를 기념해 한 영화 주간지는 특집을 내기도 했다. 대체 어떤 작품이길래.

그 주인공은 1995년 개봉한 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유작 <희생>이다. 복합상영관 체제가 들어서기 전 단관 개봉해 예술영화로선 전대미문의 관객을 기록했던 작품이다. <희생>의 흥행 성공 덕분에 할리우드 상업영화 외 다양한 작가주의 예술영화들이 국내에 소개될 수 있었다. 마침 영화제 탄생하던 20세기 말 한국은 '시네필의 나라'로 불릴 정도였다. <희생>의 재개봉을 주목하는 건 이런 기념비적 상징 때문이다. 예술영화 중에도 지루하고 난해하기로 첫손에 꼽히던 이 작품이 11만 명 관객을 모았던 '영광의 시대여 다시 오라'는 염원이 실린 셈이다.

▲ 영화 스틸 이미지 ⓒ ㈜엣나인필름


세상의 종말 전야에 일어난 어떤 '우화(寓話)'

'알렉산더'는 극작가로 큰 성공을 거둔 인물이다. 그는 시골의 근사한 집에서 노후를 보내는 중이다. 저택과 자가용, 시중드는 하인들까지 남부러운 것 없다. 하지만 큰 근심이 하나 있다. 막내아들 '고센'이 실어증으로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 아들에게 더 마음이 쓰인다. 자신의 생일 아침, '알렉산더'는 '고센'과 함께 산책을 떠난다. 그는 옛 수도승의 전승을 아들에게 들려준다. '죽은 나무에 정성껏 빠지지 않고 물을 주며 돌보면 언젠가 꽃이 피고 잎이 날 것'이라는 전설이다. 부자는 함께 죽은 나무를 해변에 심는다.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가족과 친구들이 차례로 모여든다. 축하 전보와 귀한 선물도 제법 들어오는 참이다. 그의 아내로 배우인 '아델라이데'와 딸 '마르타'는 물론, 오랜 친구인 의사 '빅터'와 마을 우체부 '오토'도 함께다. 집안일을 봐주는 하녀 '마리아'와 '율리아'는 접대하느라 바쁘다. 이제 생일 만찬 차례다. 하지만 갑자기 전기가 나가고 전화가 불통이다. 바깥에선 요란한 굉음이 거듭 터진다. 바로 3차 세계대전 발발 소식이다. 알렉산더의 가족과 친구들은 공포에 휩싸인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절규하거나 넋이 나가 소란을 피운다. 아무것도 알 수 없고 피할 곳도 없는 세기말 분위기가 엄습한다. 절망한 사람들은 한곳에 웅크려 술이나 진정제에 의지한다.

'알렉산더'는 어떻게 하면 세상을 구하고 아무 죄 없는 어린 아들을 어떻게 살릴 수 있을지 신에게 간절히 기도한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답을 얻지 못한다. 가족들과 동떨어져 주인공은 괴로움을 토해낸다. 그때 친구 '오토'가 수수께끼 같은 해법을 내놓는다. 평소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일축할 내용이지만,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다. 그는 고장이 난 자전거를 타고 자신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해주는 하녀 '마리아'가 거처하는 교회 건물로 향한다. 유일한 해결책은 바로 '마리아'와 동침하는 것이다.

간절한 소망은 응답을 받는다. 거짓말처럼 세상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꿈인지 생시인지 어리둥절하던 주인공은 신이 자신의 소원을 들어줬음을 확인한다. 그는 신을 향한 기도가 이뤄진다면 소중한 무언가를 바치기로 했다. 이제 약속을 지켜야 한다.

▲ 영화 스틸 이미지 ⓒ ㈜엣나인필름


7편의 걸작 남긴 감독

이 영화를 여러 번 봤으니 이미 다 안다고 믿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다시 만난 영화는 큰 줄기는 그대로이되, 사뭇 달랐다. 예전에 봤을 때는 포착하지 못한 조각들이 속속 튀어나왔다. <희생>이 이런 영화였던가. 놀랍기만 했다. 대체 예전에 봤던 영화와 다시 본 영화는 어떤 차이가 있어서일까. 하지만 <희생>은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유작이다. 감독은 세상을 떠난 지 오래고, 누구도 감히 영화에 함부로 손을 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번 재개봉 버전은 그저 원래의 영화를 '4K 리마스터링' 홍보 카피에 걸맞게 좀 더 선명하게 기술적으로 손본 것에 불과하다. 그게 전부다. 그럼 대체 과거엔 발견하지 못한 게 무엇이 남아 있단 말인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작품 수가 적은 '과작' 감독이다. 완벽주의이기도 하지만 검열과의 투쟁 때문에 그는 창작에 집중할 수 없었다. 영화를 만들고 싶은 욕망이 넘쳐흐르는데도 불구하고 소련에서 활동하던 감독은 정부 허가가 떨어지기 전엔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감독은 평생 단 7편 장편만 완성할 수 있었다. (물론 7편 모두 걸작이긴 하지만) 그는 정부 검열에 맞섰지만, 반대편의 상업주의에도 동의할 수 없었다. 타르코프스키는 영화를 '예술'로 규정했고, 이를 통해 정신의 '구원'을 소망했다. 그런 감독의 입장이 모든 작품에 공통 적용된다. 마치 시대와 배경만 달리한 한 편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모두 참혹한 현실에 시달리고 절망에 몸부림친다. 그들을 둘러싼 제약은 극복하기 불가능한 차원이다. 그런 상황에서 주인공들은 각자 방식대로 발악하거나 침잠하거나 선택하며 구원을 갈구하고 운명에 맞선다. 절대자의 존재를 마지막 버팀목으로 삼아 순수하게 의지하려 한다.

전쟁으로 가족을 모두 잃은 소년은 위험한 전장에 뛰어들어 승리의 견인차가 되고자 한다('이반의 어린 시절'). '타타르의 멍에' 몽골의 압제에 시달리던 중세 화가는 신성한 '이콘'을 그린다('안드레이 루블료프'). 인간 손길을 거부하는 외계 행성에서 과거의 회한과 대면한다('솔라리스'). 되돌릴 수 없는 어린 시절과 어머니에 대한 환상에 몸부림친다('거울'). 초현실적 공간을 방황하며 불가능한 것을 찾는다('잠입자') . 세상을 구하고자 촛불을 든 채 온천을 왕복한다('향수'). 아들과 세상을 구하고자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희생'). 이들 영화는 시대도 나이도 배경도 다르지만, 영화 속 인물들이 갈망과 대가로 희생적 태도를 보인다는 점이 같다.

▲ 영화 스틸 이미지 ⓒ ㈜엣나인필름


'세상 종말 전쟁'의 불안에 저항하는 영화

감독의 일관성은 그가 쓴 책에서도 확인된다. 책 <봉인된 시간>은 그의 영화를 이해하는데 필독서로 자리매김했다. (현재는 개정판 <시간의 각인>으로 재출간) 글에서 느껴지는 순교자의 태도는 곧 감독의 영화를 이해하는 기본 입장으로 널리 수용되었다. 과거 사회주의권 영화로 분류되던 그의 작품들은 제작 시기에 맞춰 국내에 소개될 수 없었다. 그래서 국내 관객은 영화보다 책으로 먼저 타르코프스키를 접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전후 사정 탓에 그의 종교적 관점과 영화 예술에 대한 헌신적 태도는 거대한 '이콘'처럼 늘 영화에 후광처럼 따라붙기에 이른다.

그런 감독의 일관된 관점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이해하는데 필수요소라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그 때문에 종종 감독이 자신이 살던 시대에 대해 (정치적 발언을 일삼진 않았지만) 평범한 이들보다 얼마나 예민하고 치열하게 반응했는지 간과됐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희생>은 1986년에 세상에 공개됐지만, 공전의 성공을 기록한 국내 개봉은 거의 10년이 지난 1995년에야 이뤄졌다. 지각 개봉이 당시에 드문 일은 아니긴 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10년 시차가 '결정적 쐐기'로 작용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희생>은 물론 전작 <향수>에서도 엿보인 당시 세계에 대한 고민과 불안의 정서는 곧 걸작 그래픽노블(과 이에 기반한 영화 및 드라마)인 <왓치맨>이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초기 걸작 <초인지대>의 그것과 직결된다. 미국과 소련이 쟁여놓은 핵무기와 화약고 위에서 불장난하듯 툭하면 터지던 긴장 고조, 서서히 밝혀지기 시작한 환경파괴와 기후위기 등 암울한 징후가 충만하던 시대의 정서다. 국내에 지각 개봉하기까지 시차 동안 그 긴장의 밀도가 휘발됐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특히 우발적 핵전쟁에 의한 세계 종말을 알리는 시계가 11시를 가리키던 시절의 절망이 타르코프스키의 후기작들에서 두드러진다.

시대정신을 투영한 절박한 공감 덕분에 <향수>에서 자기희생과 고행을 통해 세상을 구하려던 이들의 시도는 <희생>에서 한층 더 숭고해진다. 물론 '알렉산더'의 '희생'은 가족과 지인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 그 자신도 이를 포기한 지 오래다. 타인들에겐 그저 광인의 발작에 불과할 테지만, 그는 기꺼이 희생을 감내하고 그가 누렸던 모든 것을 포기한다. 이런 주인공의 행보는 러시아 고전문학에서 종종 엿볼 수 있는 '행복한 바보'의 전형이다. 타인의 시각이 아니라 자신의 정신적 확신과 충만에 만족하는 고결한 무지의 미학인 셈이다. 그런 감정의 고양을 보고 있자면 처음에 들던 당혹감이 점점 설명할 수 없는 감동으로 치닫고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아무리 냉소적 태세를 취해도 버틸 수가 없다.

그런 만감의 교차가 영화의 막판, 타르코프스키의 전매특허인 '롱-테이크' 기법의 극한과 화학반응을 일으키듯 감정의 폭발로 기어코 이어진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동방박사들의 경배'와 바흐의 마태수난곡 중 'Erbarme Dich'(불쌍히 여기소서)'는 그저 거들 뿐이다. 영화는 오락이자 산업이라는 세상의 당연한 법칙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마지막으로 토해낸 '희생' 앞에서 무의미해진다. 그렇게 주인공이 아들에게 들려주던 전승은 간절히 바라고 희생을 치른 덕분에 진실이 된다. 보고 있자면 그야말로 순교자의 영화, 예술로서의 영화다. 과거의 전설이 아니라 지금 우리들의 시대에 더 간절해질 진심의 영화를 극장에서 목격할 드문 기회가 다가온다.

<작품정보>
희생 The Sacrifice
1986 | 스웨덴, 프랑스, 영국 | 드라마
2024.08.21. (재)개봉 | 149분 | 15세 관람가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출연 에를란드 요셉손, 수잔 플리트우드, 알란 에드발 외
수입/배급 ㈜엣나인필름

1986 39회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예술공로상/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에큐메니컬상
2024 74회 베를린국제영화제 베를린 클래식 부문(4K 리마스터링 최초 공개)

▲ 영화 포스터 이미지 ⓒ ㈜엣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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