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합니다" 이 한마디에 손님들이 달라졌다
이성적인 계산원보다 감정적인 계산원이 되고 싶은 이유
▲ 슈퍼마켓 계산원의 모습(자료 사진) ⓒ sql on Unsplash
계산원으로 일하면서 입에 붙은 말이 있으니 바로 "감사합니다"이다. 행복해지려면 감사 일기를 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일기 쓰는 게 귀찮다면 계산원으로 일하는 걸 추천한다.
시쳇말로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하다고 하는데 감사하다는 말도 똑같다. 솔직히 손님이라고 모르지 않을 것이다. 직원이 으레 하는 말이라는 걸. 그래도 형식적으로라도 하는 게 안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계산하는 시간이 아무리 짧다 해도 감사하다는 말이 있을 때와 없을 때 그 순간 분위기는 아예 달라진다.
처음엔 죄송하다는 말을 내뱉는 게 쉽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내 책임이 아닌 상황에서도 죄송하다는 말을 꺼내는 게 익숙지 않았고 특히 계산원을 존중하지 않는 손님에게는 더욱 입이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몇 번 그 말의 힘을 실감하고 나서는 사과가 쉬워졌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의 힘
두어 달 전, 어떤 손님의 계산을 마치고 잠시 사무실에 들어가서 행주를 빨고 왔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내 계산대에서 다른 계산원이 살짝 언성을 높인 채 그 손님을 상대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내 실수였다. 손님이 오기 전 시험 삼아 고구마 바코드를 찍어보고 그걸 지우지 않은 채 손님의 상품을 스캔해서 손님이 사지 않은 것까지 계산해버린 것이다.
다행히 손님이 영수증을 받아서 그걸 확인했고 곧바로 돌아오신 상황이었다. 그런데 마침 내가 자리를 비운 상황이라 다른 계산대의 계산원이 응대를 했고 그 계산원은 본인이 안 해서 잘 모르겠다는 식으로 말한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나몰라라 손 놓고 있던 건 아니고 영수증 조회로 결제 내역을 확인하고 있었다. 나는 얼른 죄송하다고 사과드리고 계산을 바로잡았다. 영수증에서 구매하지 않은 품목을 확인했을 때 손님의 당혹스러움과 다시 마트로 발길을 돌려야 하는 번거로움을 생각하면 손님이 큰소리를 내지 않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손님은 다행히 화난 기색 없이 너그러운 웃음까지 보이며 돌아가셨다.
반전은 그 이후에 있었다.
"너 없을 때 저 손님이 나한테 뭐라 했는지 알아?"
계산원은 손님의 말투까지 흉내 내며 손님이 말꼬리를 잡고 트집을 잡았다고 열변을 토했다. 시쳇말로 진상이었다고 했다. 동료로서 맞장구를 치긴 했지만 솔직히 그렇게 와닿지 않았다. 내가 본 바로는 유순하고 푸근한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 계산원 또한 너 오니까 태도가 싹 바뀌었다며 이상한 손님이라고 투덜거렸다. 왜 그 손님은 나와 그 계산원에게 다른 인상을 남겼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차이점은 "죄송합니다"라는 말로 시작했는가 그뿐이었다.
정말 그 말 한마디가 손님의 태도를 바꿨을까 확인하고자 계산 상황에 그 말을 껴 넣어보았다. 바로 포인트 적립 번호를 물어볼 때이다. 손님들이 휴대전화 끝 네 자리를 말할 때 어떤 분들은 발음을 흐리거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유독 말소리를 알아듣기 힘들다. 내가 되물어보면 다시 알려줄 때 대부분 목소리에 짜증이 실렸다.
하지만 "0000 맞나요?" 혹은 "00 다음에 뭐라고 하셨죠?" 대신에 "죄송하지만 0000 맞나요?" 혹은 "죄송한데 다시 말씀해 주시겠어요?"라고 물었더니 돌아오는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별 거 아닌 것 같아도 나에겐 정말 큰 깨달음이었다.
손님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 편의점 풍경(자료 사진) ⓒ tahsin_labib on Unsplash
이걸 반대로 경험한 적도 있다. 여기서 반대라는 건 내가 손님일 때라는 뜻이다. 편의점에서 상품을 여러 개 고르고 계산했는데 계산원이 친환경 봉지를 내밀었다. 하지만 내가 요청한 건 10리터 종량제 봉지였다.
"저 종량제로 달라고 했는데…"라고 말했을 땐 이미 포스기에서 결제가 끝난 뒤였다. 두 봉지의 가격이 달랐기에 이걸 바로잡으려면 전체 반품 처리를 하고 다시 결제해야 했다. 나는 괜찮다고 덧붙이며 그냥 그대로 달라고 했다.
그런데 다 담고 보니 계산을 안 한 상품이 하나 있었다. 계산원은 아차, 하더니 "오늘 왜 이렇게 정신이 없지" 혼잣말을 하며 하나만 따로 계산을 했다. 그런데 카드로 결제해야 할 것을 실수로 현금 결제로 처리를 해서 다시 한 번 결제를 해야 했다. 포인트 적립 때문에 번번이 앱을 보여 줘야 하는 상황이라 계산원이 무척 미안해했다. 계산 중 흔히 일어나는 실수이기에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나는 웃으면서 괜찮다고 했다.
그렇게 여자저차 계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현관을 들어가기 직전 아무래도 계산 과정이 개운치 않았다. 혹시나 해서 편의점 앱에서 구매 내역을 보니 역시 문제가 있었다. 마지막 상품을 반품 처리할 때 계산원은 어차피 다시 계산할 거 앞에 계산한 물건과 다 같이 종량제 봉지로 변경해서 계산을 해주겠다고 했다. 그러려면 맨 처음 계산한 걸 반품해야 하는데 그걸 빠뜨려서 이중으로 결제가 되어 있었다.
나는 편의점으로 돌아가 확인을 부탁했고 포스기에서 잘못을 확인한 계산원은 죄송하다는 말을 연신 내뱉으며 한 번만 다시 앱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런데 이번엔 반품이 문제였다. 아무리 QR코드를 찍어도 포스기에서 반품이 처리되지 않았다. 결국 계산원은 본사 쪽에 문의를 했고 연결된 상담원의 안내로 무사히 반품이 끝났다.
솔직히 계산 과정이 길어지자 살짝 화가 나긴 했다. 처음부터 제대로 했다면 5분 안에 끝날 일을 거의 30분 넘게 처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죄송하다는 계산원의 말에 번번이 웃으며 괜찮다고 대답했는데 중간에 한 번은 표정이 굳고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계산원이 어쩔 줄 모르고 자꾸 죄송하다고 하는 걸 듣고 있으니 화가 나려다가도 스르르 가라앉았다.
'이게 뭐라고 이 사람이 이렇게 사과를 해야 하나. 그걸 나는 왜 당연하게 듣고 있나. 살면서 유독 정신없는 날은 누구나 다 겪는 건데. '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오히려 내가 미안해졌다. 내가 남보다 아량이 넓어서 이런 생각이 든 건 절대 아니다. 그분의 진심 어린 사과가 내 안의 피새를 누그러뜨린 것이다.
계산이 끝난 뒤에도 그분은 죄송하다는 말을 아끼지 않으며 얼음컵과 음료수를 건넸다. 집에 와서 시원한 음료수를 들이키고 보니 내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늘 무표정으로만 마주하던 동네 계산원의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한 것 같아서 미소가 지어졌다. 아무리 자주 가는 편의점이라도 전에는 무표정으로 인사를 주고받았는데 그 일 덕분에 요즘은 그 계산원과 서로 웃으며 인사하는 사이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동안 계산을 잘하는 계산원이 되려고만 했지, 손님을 보는 관점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간과했다. 손님이 계산원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사람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잊는다고 불평해놓고 정작 내가 손님을 사람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일감으로만 여긴 것이다. 이제는 안다. 아무리 손님이 어려울지라도 그들도 결국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말 한마디에 마음이 움직인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무리 계산이 돈을 다루는 냉정한 이성의 영역이라도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 이루어지는 소통 중 하나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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