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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리지 않는 책만 팔았던 책방 주인의 정체

[2024, 지금 김남주] 존속 가능한 사회를 향해

등록|2024.08.29 11:08 수정|2024.08.29 11:08
김남주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딱 30년이 되었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라고 노래한 시인의 바람대로, 우리는 손을 잡고 함께 걸어온 것일까.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김남주 정신이 필요하다면 어떤 이유에서일까. 지금 여기에서 김남주가 다시 살아 서 있는 모습을 그려본다. 24인의 문학인들과 활동가들이 2024년의 한국 사회를 짚어보며,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보고자 한다.[편집자말]
얼마 전 뱃속에 아이가 생겼다. 처음으로 육안으로 아기집을 확인한 날, 아직 눈에 보이지도 않을 세포에 불과한데 벌써 집을 지어놨다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아이가 생기고 나니 세상의 것들이 달리 보인다. 세상의 무엇도 허투루 태어나는 법이 없다. 악어와 악어새처럼, 꽃과 벌처럼, 혹은 더 복잡한 방식으로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생명체는 연결되어 살아간다.

내 뱃속이지만 아기가 나름대로 자기만의 방을 갖고 있는 것이, 나와는 또 다른 생을 굴려 갈 준비를 하는 것이 신비하게 느껴진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태어나고 또 살아가느라 애를 쓰고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생명을 품고 나니 저마다의 생을 꾸려가는 타인의 구체적인 삶이 더 잘 보인다.

무더운 날씨 탓인지 무거운 뉴스가 연일 들려오는 요즘이다. 폭염이 내린 날씨에 에어컨을 설치하던 20대 기사가 열사병으로 쓰러져 사망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얼마 전 지하철 1호선 구로역에서는 선로 보수 작업을 하던 코레일 직원 2명이 다른 점검 차량과 부딪혀 사망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인접 선로의 운행을 막았다면 일어나지 않을 사고였다.

대중교통 없이는 출퇴근을 할 수 없고 에어컨 없이는 살 수 없게 된 여름인데, 모두의 안전하고 매끄러운 일상을 위해 일하던 누군가는 죽음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고 안타깝다.

막을 수 있었던 사고, 살릴 수 있었던 이들의 죽음이 반복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폭염이 갈수록 심화되어 올해가 우리가 경험하는 가장 시원한 여름이라는 말도 들려온다. 물놀이를 즐기던 해안가에는 이제 해파리가 들끓는다. 화재가 빈번해지고 폭염에 코로나가 겹쳐 재난이 점차 일상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런 여름을 김남주 시인의 일대기를 담은 평전을 끼고 드문드문 펼쳐 읽으며 지났다.

좀처럼 희망을 가지기 힘든 시대

▲ 김남주 시인 ⓒ 해남군


기다려라 기다려라 기다려라. 오! 세월이여. 지금 시의 흐름, 인생의 흐름이 막혀 있지만 언젠가 제방이 터져 격렬하게 흘러내릴 때가 있을 것이오. - 김남주, 옥중연서

김남주 시인은 독재 정권에 저항하여 투옥된 와중에도 우유 갑 안쪽에 몰래 시를 쓰거나 편지를 남겼다. 그는 옥중에서도 희망을 품었던 것이 분명하다. 더 좋은 시대가 오리라고,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으리라고. 가장 어두울 때 가장 큰 빛을 올려다볼 수 있는 용기가 저 짧은 문장 안에 집약되어 있다.

나는 묻고 싶다 그들에게 / 굴욕처럼 흐르는 침묵의 거리에서 / 앉지도 일어서지도 못하고 / 엉거주춤 똥 누는 폼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 (…) / 어느 시대 어느 역사에서 투쟁 없이 / 자유가 쟁취된 적이 있었던가 - 김남주, 시 '나 자신을 노래한다' 부분

자유와 투쟁을 외치는 그의 시는 뜨겁다. 시대의 절망을 들여다보는 게 시인의 과제라면, 그는 정말이지 열렬하고 뜨거운 시인이었다. 그의 시를 읽으며 현대미술관 과천에 사진전을 보러 갔다. 'MMCA 사진 소장품전: 당신의 세상은 지금 몇 시?'라는 제목의 전시에는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도심을 원경으로, 때로는 근경으로 찍은 사진이 즐비했다. 포장마차에서 퇴근 후 뜨끈한 어묵에 맥주를 즐기는, 입을 벌리고 지하철에서 잠든 시민의 모습이 친근했다.

군부독재 시절을 지나 자유화, 민주화 이후 시민들의 일상을 찍은 사진을 찬찬히 보았다. 무수한 건물이 지어졌다 허물어지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대도시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시인이 살았던 시대와 전혀 다른 시대를 살고 있음에도 그의 시를 읽고 있으니, 그리고 그가 살았던 시대의 사진을 보고 있으니 그 시대의 희망과 절망이 지금 시대의 희망과 절망과 중첩되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위해 투쟁하며, 무엇을 위해 시를 쓸 것인가? 그의 시의 뜨거움이 그런 질문을 하게 만든다.

희망을 가지라 한다 / 시인은 서재에서 시를 쓰면서 / 이를테면 이렇게 쓰면서 / 시는 분노가 아니나니 신의 입김이나니 / 희망을 가지라 한다 / 선생은 학교에서 군자를 가르치면서 / 이를테면 이렇게 가르치면서 / 수신제가하야 치국평천하하고 / 희망을 가지라 한다 - 김남주, 시 '희망에 대하여 1' 부분

희망을 가지라고 쉽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말과 달리, 그가 살던 시대나 지금이나 좀처럼 희망을 가지기 힘든 시대이다. 올여름엔 자주 다니던 동네 책방이 문을 닫았다. 자본의 논리에 밀려 골목의 조그만 책방이, 식당이, 가게가 사라지고 있다. 지난해 폐업 신고를 한 사업자는 약 98만 명으로, 2006년 이래 역대 최대라는 기사를 보았다.

높은 임대료와 물가, 불경기 속에서 영세한 자영업자들이 하나둘 사라지거나 힘겹게 버티고 있는 것이다. 책방이 마지막으로 문을 열던 날, 공간을 메우고 있던 커피머신과 책상, 의자, 책, 무엇보다 모여들어 책을 읽고 이야기 나누던 사람들이 전부 빠지고 난 텅 빈 공간에 서자 기분이 묘했다.

김남주 시인의 정신 이어받아

김남주 시인은 1975년 광주에 '카프카'라는 이름의 서점을 열었다고 알려져 있다. 최초의 사회과학 전문서점이자 사회문화 운동의 거점이었던 곳. 하지만 이 서점은 2년을 채우고 금방 문을 닫는다. 그가 잘 팔리지 않을 만한 책들을 팔고, 책을 팔기보단 투쟁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텅 빈 책방에 서서, 김남주 시인은 책방을 열고 닫으며, 또 감옥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생각했다.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빠르게 변하는 세상의 논리에 나름의 저항을 하던 공간이 사라지는 것이 씁쓸했다.

어떤 비는 살며시 왔다가 / 채전을 촉촉이 적시어주지만 / 가을비는 김장하는 아낙네의 벌어진 / 손바닥을 아물게 하지 않는다 // 어떤 비는 당돌하게 왔다가 / 젊은 날의 언덕을 망가뜨려 놓지만 / 비의 계절에 미쳐버린 나의 / 영혼을 어루만져주지 않는다 - 김남주, 시 '비' 부분

한편으로는 시인의 이처럼 모던한 시는 비 그 자체, 내리는 비의 물성을 실감하게 한다. 시인이 살던 시대와 지금 시대를 관통하여 내리는 비를 느낀다. 조금 선선한 저녁이면 산책을 나간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천천히 걸으면서, 허리를 펴고 호흡하면서 자연과 사회의 일부, 거대한 자연의 순환 원리 속 일부임을 깊숙이 느낀다. 우리는 세상을 이루는 아주 작은 일부이자, 세상의 전부이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살아간다. 가족으로, 이웃으로, 친구로, 동료로 가까이 만나고 연결된다. 김남주 시인이 살던 시대로부터 멀리 지나온 지금, 그가 품었던 희망은 얼마나 실현되었을까?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는 또 어떤 희망을 품어야 할까? 생명이 귀한 시대인 만큼, 이례적으로 낮은 출생률과 높은 자살률의 나라라는 오명을 벗고 살아볼 만한 사회가 된다면 좋겠다.

살기 위해 일하면서 죽음을 경험하는 사회가 아닌, 최소한의 안전망이 보장된 나라, 각자도생하는 사회가 아닌 서로 연결되어 돕고 사는 사회를 향해 나아간다면 좋겠다. 약한 이들을 돕고 무너진 곳을 함께 일으켜 세우며 우리의 삶이 더 나은 쪽으로 변화해 가기를 소망한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뿐 아니라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존속 가능한 사회, 희망을 꿈꿀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김남주 시인의 정신을 이어받아 그런 희망을 꿈꾸어 본다.
덧붙이는 글 공동주최 : 김남주기념사업회·한국작가회의·익천문화재단 길동무
후원 : 더숲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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