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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제자 정인홍의 수난과 학계의 외면

[김삼웅의 인물열전 - 진짜 선비 남명 조식 평전 23] 남명이 금기 또는 배제의 인물로 취급받은 이유

등록|2024.08.29 15:22 수정|2024.08.29 15:22

▲ 정인홍의 초상과 그를 영의정에 임명하는 광해군의 교서 ⓒ 합천창의사


남명이 살아온 삶의 궤적이나 학문의 성과, 제자들의 국가사회에 끼친 기여도 등으로 보아 유학인물사에서 뒤로 밀려날 이유가 없는데도 크게 밀린 인상이다. 16세기 조선학술·사상계에 우뚝한 존재 예컨대 화담 서경덕·회재 이언적·퇴계 이황·고봉 기대승, 율곡 이이 등의 평가와 비교할 때 그러하다.

이와 관련 남명의 말이다.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고문을 배웠으나 성취하지 못했고, 퇴계의 글은 본시 금문(今文)이나 비유하면, 나는 비단을 짜다가 필(匹)을 이루지 못하여 세상에 쓰이기에 어렵고 퇴계는 포목을 짜서 필(匹)이 되었으니 쓰일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주석 1)

단재 신채호가 뤼순 감옥에서 "살아 나간다면 정인홍전을 쓰고 싶다"고 할 만큼, 당세나 후세에 왜곡 평가된 인물이 내암 정인홍(鄭仁弘, 1536~1623)이다.

조식과 정인홍의 학문과 인간 관계를 두고 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정인홍은 합천 사람으로 어려서 조식을 따라 배웠다. 조식은 정인홍의 지조가 보통 사람들과 다름을 귀하게 여겨 지경(持敬) 공부를 가르쳤다. 이로부터 그는 각고의 노력을 다해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았다. 조식은 늘 방울을 차고 있어 스스로 환성(喚醒)을 피하고, 때로 칼을 턱에 바치고서 혼미를 경각하곤 하였다.

조식은 만년에 방울을 김우봉에게 주고 칼은 정인홍에게 주면서 이르기를 '이것으로 마음을 전한다' 하였다. 정인홍은 늘 꿇어앉아 칼을 턱 밑에 대고 정신을 가다듬기를 죽을 때까지 하루같이 하였다. (주석 2)

▲ 1604년 조식의 수제자 정인홍이 간행한 <남명문집>(왼쪽)과 1911년 간행된 정인홍의 <내암선생문집> ⓒ 합천창의사


정인홍은 젊은 나이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사헌부 장령으로 재임하면서 비리가 있는 권세가들을 규탄하고, 기축옥사 때 동문인 최영령이 모함으로 처형되자 정철과 성혼을 주모자로 여겨 비판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조직, 성주에서 왜병을 격퇴하여 선무공신 1등으로 녹훈되고, 남명의 문집을 간행할 때 서문에서 이황을 논한 것이 빌미가 되어 사림의 지탄을 받았다.

1608년 정인홍은 소를 올려 영의정 유영경의 참수를 청하였다가 영변으로 귀양 갔으나, 유배 중 선조가 급사하여 풀려났다. 당시 선조가 병이 깊어 세자인 광해군에게 전위(傳位)할 뜻을 유영경에게 밝혔는데, 유영경은 이를 은폐하고 영창대군을 세자로 개봉하려 하였다.

이에 정인홍은 동궁을 동요시키고 종사를 위태롭게 한 죄로 유영경을 참수해야 한다고 소를 올린 것이다.

이 일로 정인홍은 광해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게 되었고, 산림에 있으면서도 조정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당시 정인홍은 귀양에서 풀려나 도성에 이르기 전에 자헌대부에 오르고 한성부 판윤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1610년 좌찬성에 제수되자 사직하는 차자를 올리면서 이언적과 이황을 비난하는 글을 올려 사람의 분노를 사 유적(儒籍)에서 삭제되었는데, 이 사건으로 동인이 남북으로 분당되는 계기가 되었다. 1612년 좌의정이 되었으며, 1613년 서령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리고 이해 영창대군의 처벌을 반대하는 전은설(全恩說)을 주장하였으며, 1615년 인목대비의 폐비론을 반대하고 낙향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직후 체포되어 의금부에서 국문을 당하고, 폐모살제의 누명을 입고 참형을 당하였다. 이후 정인홍을 주축으로 한 대북파는 정계에서 몰락하였고, 정인홍은 음험하고 포악한 인물로 과장되고 격하되었으며, 조선 시대 내내 대역죄인 취급을 받았다. (주석 3)

▲ 합천임란창의기념관(약칭 '합천창의사')의 유물관에 들어가면 답사자를 정면으로 맞이하는 현관 벽에 걸려 있는 '무계 전투도' 부조와 만나게 된다. 경북 고령 무계는 정인홍 의병군이 왜적을 격파했던 전투 장소이다. ⓒ 함천창의사


정인홍이 몰락하고 대역죄인으로 낙인 되면서, 그의 스승 남명 역시 금기 또는 배제의 인물로 취급받았다. 이같은 현상은 근래에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놀란 것은 한국철학사상과 한국유학사를 쓴 학자들이 거의 공통적으로 남명 선생에 대해서는 의도적이었는지 안배된 분량이 적고, 평가도 자못 부정적이었다. 심지어 어떤 이는 척자반구도 언급이 없으며, 언습이 있다손 치더라도 어떤 학자를 논할 때 몇 줄 끼어 넣어 우선하는 정도였다.

이제 그 자료의 대략을 살펴보면, 장지연이 쓴 <조선유교연원>에는 14줄, 이병도가 쓴 <한국사상논고>(유학편)에는 7줄, 박종홍이 쓴 <한국사상논고>(유학편)에는 이름이 한 번 나올 정도이고 아무런 술평이 없다. 참고로 다른 학자들에 할애한 분량을 보면 퇴계는 약 100쪽, 율곡은 약 50쪽으로 상당히 자세히 논하고 있는데, 남명 선생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어 상당히 의아했다. (주석 4)

주석
1> 윤호진, 앞의 책, 138쪽, 재인용.
2> 조여항, <정인홍과 광해군>, 31~32쪽, 동녘, 2001.
3> <남명 조식의 문인들>, <내암 정인홍의 약전>, 614~615쪽.
4> 김충열, <남명조식의 학문과 선비정신>, 14~15쪽, 예문서원, 2006.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진짜 선비 남명 조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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