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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담한 대한민국 지도... 이게 끝이 아니다

[박정훈이 박정훈에게] 한국 사회가 남자아이들을 길러내는 방식, 이대로 괜찮나

등록|2024.08.29 07:13 수정|2024.08.29 14:18
흔한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 '오마이뉴스 기자 박정훈'과 '공공운수노조 부위원장 박정훈',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연대를 모색해 나갑니다. [편집자말]

▲ 딥페이크 범죄의 심각성은 어제오늘 이야기 된 것이 아니었다. ⓒ pickpik


"이미 너무 늦었지만 국가가 나서야 합니다. 지금 딥페이크 피해 공포에 떨고 있는 여성들 입장에선 국가가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딥페이크(불법합성물) 성범죄가 확산되는 상황에 대한 해결 방안을 묻고자 서지현 전 검사님에게 27일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법무부 디지털성범죄대응TF팀장으로 있으면서 만든 텔레그램 범죄 관련 대응책들을, 왜 정부가 참고하지 않는지 답답해 했습니다.

나아가 텔레그램을 통해 이뤄진다는 이유로 딥페이크 성범죄 처벌과 수사가 지지부진한 현 상황에 대해, 외국의 사례를 언급하며 "수사할 수 있고" "막을 수도 있다"라고 단언했습니다. 동시에 현재 오프라인 범죄 중심으로 짜인 성범죄 관련 법 체계를 온라인 범죄를 반영해서 다시 세워야 한다고 지적했고요.

서 검사님은 27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에 법무부 디지털성범죄 대응 TF에서 제안했던 내용 중 딥페이스 수사 관련 내용을 공유했습니다. ▲텔레그램의 협조를 구할 수 없다는 변명을 멈추고, 수사 협조 및 게시물 차단 강력 요구 ▲텔레그램에서 수사 비 협조시 앱 스토어에서 앱 삭제 ▲신속한 증거보전을 위한 '피해 영상물 보전명령' 신설 등입니다. 그러면서 "여성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국회는, 범죄를 예방, 수사하고 피해자를 보호할 의무가 있는 국가는 그동안 무엇을 하였는지 알기 어렵다"라는 말도 남겼습니다. (관련 기사: 윤석열 취임 닷새만에 잘린 TF팀장 "딥페이크 고통, 국가 뭐했나" https://omn.kr/29ydi)

정훈님, 이번 편지는 매우 참담한 심정으로 씁니다. 서 검사님 말처럼 딥페이크 범죄의 심각성은 어제오늘 이야기된 게 아니었습니다. 전국의 중·고교, 대학생, 군대에 있는 수많은 여성들이 '딥페이크 공포'에 떨어야 하는 이런 상황이 올 때까지 대체 국가와 정치는 어디 있던 걸까요?

스스로 '피해 명단' 작성까지... 국가는 어디 있나

▲ 진보당 당원들이 지난 27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텔레그램 딥페이크 성범죄 경찰 수사 촉구 및 진보당 TF 강력대응 선포 긴급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진보당원들은 기자회견에서 불법합성물이 텔레그램을 통해 광범위하게 유통되고 있는 것에 대해 "경찰이 해외서버 핑계를 대는 것은 범죄를 키워주는 행위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딥페이크 범죄에 가담했다면 제작, 유포, 소지한 사람 모두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며 경찰의 철저한 수사와 처벌을 촉구했다. ⓒ 이정민


딥페이크 불법합성물은 너무나 손쉽게 만들 수 있어 문제입니다. 사진을 보내면, 봇(Bot)이 5초만에 곧바로 딥페이크 합성사진을 만들어주는 텔레그램 채널도 존재합니다. 이 채널에는 무려 22만 명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한겨레>에 따르면 "①'겹지인방'이라고 불리는 텔레그램 채널을 통해 지역이나 대학교를 중심으로 모이고 ②특정 여성을 동시에 아는지 확인하고, 함께 아는 여성이 있으면 ③그가 소셜미디어에 올린 평범한 사진을 공유한 뒤 이를 악용해 불법합성물을 제작"하는 방식으로 딥페이크 범죄가 이뤄진다고 합니다.

1300여 명이 참여하고 있는 텔레그램 채널에는 채널 70여 개 대학별로 분류된 개별대화방이 있었고, 중고교생 채널에도 2340여 명이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일보> 보도에 따르면 여군을 '군수품'이라고 칭하며 딥페이크 불법합성물을 만드는 텔레그램 방도 존재했으며, 실제 피해 사례가 확인됐다고 합니다.

언론사가 취재로 밝혀낸 텔레그램 채널은 빙산의 일각입니다. 여성들은 직접 텔레그램을 뒤지며 정보를 모아서 '피해 학교 명단'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딥페이크 (피해) 지도'가 만들어졌고요. 명단에 오른 학교는 전국에 500여 개가 넘으며, 계속 늘고 있습니다. 여성들은 SNS를 비공개로 돌리고, 얼굴이 나온 사진을 지우는 등의 '딥페이크 피해 방지 수칙'까지 공유합니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을 여성들이 스스로 하고 있는 셈입니다.

▲ 딥페이크 피해학교 지도 ⓒ https://deepfakemap.xyz/


정훈님, 서울대 동문 딥페이크 성범죄 사건의 피해자는 무려 61명(서울대 동문은 12명)이었습니다. 수백여 개의 피해 학교에서 몇 명의 피해자가 나올지 상상도 되지 않습니다. 가해자도 그만큼 많을텐데, 그들에 대한 수사나 처벌이 지지부진하다는 점에 대해 여성들이 큰 분노를 표출하고 있습니다.

디지털 성범죄는 수사기관이 '서버가 외국에 있어서' '신원을 특정하기 어려워서' 수사가 어렵다는 입장을 표해온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서울대 딥페이크 사건의 범인을 추적한 '추적단 불꽃' 원은지 전 얼룩소 에디터의 <시사IN>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피해자들이 신고한 사건들이 모두 불송치됐다고 합니다. 텔레그램으로부터 수사 협조를 받지 못해서였습니다.

경찰청은 올해 7월까지 전국에서 딥페이크 범죄로 입건된 피의자가 178명이라고 밝혔는데, <한겨레> 취재로 드러난 겹지인방에만 3600여 명이 들어가 있다는 걸 감안하면 너무나 초라한 수치입니다.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딥페이크 성범죄는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이 적용되어 딥페이크 불법합성물을 소지·시청한 것으로도 처벌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성인의 경우에는 불법촬영 사진·영상과 달리 소지나 시청, 심지어 제작을 하더라도 처벌 받지 않습니다. "반포 등을 할 목적", 즉 공유하거나 게시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목적이 입증돼야 처벌할 수 있습니다.

"예술작품" "나 혼자 그림"... 딥페이크 법 만든 이들의 황당한 인식

▲ 텔레그램의 모습. ⓒ Lana Codes=unsplash


정훈님, 저는 이와 같은 법의 공백은 딥페이크 성범죄 관련 법을 제정한 2020년 당시 정부와 국회의원들의 그릇된 인식에서 비롯됐다고 봅니다. 당시 텔레그램 성범죄 처벌 청원이 10만 명이 동의한 것에 힘입어 '딥페이크 처벌 관련 법안'이 법안심사제1소위원회에 올라왔는데, 당시의 회의록(2020.3.3)을 아래에 인용해보겠습니다.

채이배 위원: "그런데 반포할 목적이 아니어도 충분히 이런 딥페이크를 통해 가지고 인격권과 자기결정권을 침해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을 꼭 반포 목적으로만 제한을 한다는 게 너무 협소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정점식 위원: "내가 자기만족을 위해서 이런 영상을 가지고 나 혼자 즐긴다 이것까지 갈 거냐……"

법원행정처차장 김인겸: "자기는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하고 만들 수도 있거든요."

법무부차관 김오수: "쉽게 말하면 청소년들이나 자라나는 사람들은 자기 컴퓨터에서 그런 짓 자주 하거든요."

채이배 위원: "그런데 아까 말씀드린 것은 의사에 반하는 경우, 그러니까 자기가 자기 것 만들어서 하는 경우에 자기가 의사에 반하는 경우? 그런 것은 없잖아요."

법무부차관 김오수: "유명인들 갖다 놓고 자기 혼자 자기 컴퓨터에서 그런 작업들을 할 수가 있는데 그것을 처벌하겠다라고 하는 것은 너무 과한 것 아니냐 이런 이야기지요."

당시 채이배 민생당 의원은 '소지'만으로 처벌할 수 있지 않냐고 질의했지만, 정점식 미래통합당 의원은 "나 혼자 즐긴다, 이것까지 갈(처벌할)거냐", 김인겸 법원행정처 차장은 "예술작품", 김오수 법무부차관은 "청소년들이나 자라나는 사람들은 자기 컴퓨터에서 그런 짓 자주 한다"라며 딥페이크 불법합성물에 대해서 '별 게 아니'라는 인식을 드러냅니다.

이에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자기만 소지하려고 했지만 압수수색이나 해킹 등으로 유포가 된 경우에는 아무 죄도 없는 거냐'라고 질의하니 법안심사1소위원장인 송기헌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이렇게 답합니다.

"이것은 극단적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나 혼자 스스로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하는 것까지 처벌할 수는 없잖아요. 내 일기장에 내 스스로 그림을 그린단 말이에요. 만화 같은 것 잘 그리는 사람은 만화 얼굴 같이 해 가지고 그림을 그릴 수가 있잖아요. 그것까지 처벌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심지어 이날 김도읍 미래통합당 의원은 "청원한다고 법 다 만듭니까?"라며 딥페이크 성범죄 처벌법의 필요성 자체에 의문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당시 정부와 여야 대다수가 딥페이크 성범죄의 심각성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겁니다. '텔레그램 성범죄 처벌 청원'이 없었다면 애초에 이런 법이 만들어지지도 못했겠지만요.

윤석열 정부의 '딥페이크 성범죄 근절' 진정성 의심

▲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내 여성가족부 ⓒ 연합뉴스


정훈님, 저는 이번 사건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남자아이들이 올바르게 자라도록 만드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디지털 기술이 발전한 사회에서, 아이들이 과거보다 성범죄 가해 행위에 가담할 가능성이 더욱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에 맞는 성인지 교육이 이뤄져야 하는데, 정부나 국회는 사실상 방관하고 있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27일 딥페이크 성범죄에 대해 "관계 당국에서는 철저한 실태 파악과 수사를 통해 이러한 디지털 성범죄를 뿌리 뽑아 달라"라고 당부했지만, 이 말이 진정성 없게 느껴지는 건 윤 대통령이 6개월째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를 지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가부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보호 주무부처이고, 여성 인권 보호 업무 전반을 담당합니다.

윤석열 정부 들어서 여가부가 사실상의 파행 상태가 되고, 남성 청소년들을 위한 성교육 기회도 점차 줄고 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성교육 활동가 이한님(전 디지털성범죄대응TF 위원)에게도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는 "체감될 정도로 학교에서 성교육, 성평등 교육이 줄어들고 있다"라고 하더군요. 실제로 여성가족부의 ''성 인권 교육' 예산이 올해 전면 삭감되기도 했습니다.

현장에서 느끼는 남자아이들의 성인지 감수성은 심각하게 우려되는 수준이라고 합니다.

"디지털과 관련된 성 문제가 학교에서 비일비재해요. 남자 청소년들끼리 단톡방 등에서 (포르노) 영상을 돌려보는 경우가 있는데, 여자 청소년들이 불쾌하다고 문제제기를 하면 '너한테 보여준 것도 아닌데 유난이야'라는 식으로 대응합니다."

이한님은 "직접 찍거나, (문제적인 영상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면 괜찮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라면서 "AI합성 역시 놀이문화에서도 많이 쓰이다 보니, 오히려 성범죄라는 경각심이 사그라든 것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더군요.

"관계 맺음이나 안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포괄적 성교육', 성인지 감수성을 기를 수 있는 '성평등 교육', '남자 청소년 특화교육' 등이 필요합니다. 남성문화에 대해 아이들과 심도 깊게 이야기하지 않으면 현 상황이 개선되기 어려워요."

강력한 수사와 처벌은 당연히 필요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해결법은 결국 남성을 가해자로 길러내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이건 교육과 사회 분위기의 변화 말고는 해결책이 없습니다.

박지현 전 민주당 비대위원장은 현 상황을 "국가재난상황"이라고 지칭했습니다. 여성들의 분노한 목소리를, 이번만큼은 국가가 외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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