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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친이 환승이별하자 폭주... 너무 쓰라린 10대들의 연애

[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그 여름날의 거짓말>

등록|2024.08.28 13:50 수정|2024.08.28 13:50

▲ 영화 <그 여름날의 거짓말> 스틸컷 ⓒ ㈜마노엔터테인먼트


얼핏 제목만 들어보면 <그 여름날의 거짓말>은 근래 국내 극장가에서 안정된 흥행과 화제를 이어가는 일본 '인디' 영화, 그것도 청춘물 신작 중 한 편으로 여길 법하다. 무덥긴 하지만 끝없이 펼쳐진 파란 하늘과 솜사탕 같은 구름 조각들, 귓가를 떠나지 않는 매미 울음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도로를 가로지르는 교복을 입은 청소년들의 달콤쌉싸름한 그해 여름방학의 기억, 여기에 차가운 음료수나 빙수가 더해지면 완성되는 풍경을 떠올리게 만드는 부류의 영화 말이다.

이 영화 역시 그런 요소들을 거의 빼놓지 않고 골고루 갖췄다. 아마 여기까지라면 예비 관객들은 슬슬 본 작품의 성향을 추리하기 시작할 테다. 꿈과 희망의 10대 로맨스물이건, 끝없이 맑은 하늘과 푸른 바다, 그림 같은 골목길 배경에도 다소 무거운 성장통을 겪는 학원물이건 대략 이 둘 중 하나의 변주로 귀결될 테니까. 하지만 바로 그 지점부터 <그 여름날의 거짓말>은 익숙한 통념과 작별하고 관객을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위태로운 길로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17살, 고등학교 1학년 1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순간에 모든 일이 시작된다. '다영'은 또래들이 도란도란 방학 계획을 이야기하며 헤어질 때, 사귄 지 '28일' 째 된 동급생 남자친구 '병훈'과 헤어진다. 정확하게는 남자친구가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한 것이다. 그것도 '환승이별'이다. 다영은 그저 알았다며 답한다. 여자친구를 배신한 병훈이 오히려 얼떨떨할 정도로 '구여친'의 반응은 무덤덤하다. 화를 내거나 뺨이라도 칠 줄 알았는데 담담한 다영에게 적반하장으로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병훈이다.

그렇게 둘은 순식간에 불타올랐다가 금방 식는 '요즘 10대' 식 첫사랑에 종지부 찍은 것처럼 보였다. 의외로 이별 통보가 큰 소란 없이 끝나자 병훈은 기분이 묘하긴 해도 다행이다.

그러나 그 생각은 단단히 잘못 짚은 것이다. 다영은 겉으로 티내지 않았지만, 일방적 이별 통보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의 세계가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다영은 갈팡질팡한다.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예정에 없는 일정을 잡는다. 그리고 설마 하던 관객은 다영이 무모한 선택을 한 것을 알게 된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다영은 돌발적인 '구남친'의 결별 통보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래서 잘못된 선택에 거듭 갈지 자 행보를 이어가며 문제를 키우다 10대 소녀와 소년이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남들은 입시를 대비해 학업에 매진하거나 연애와 취미에 몰두할 여름방학은 일찍이 주인공들이 상상하기 힘들었던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거짓말'의 미궁

▲ 영화 <그 여름날의 거짓말> 스틸컷 ⓒ ㈜마노엔터테인먼트


<그 여름날의 거짓말>은 관객이 익숙하게 접해왔을 10대 청소년의 '성장 드라마'와 궤를 달리한다. 배경과 소재는 전형적인 청춘 영화의 그것이지만, 그 요소들을 조합해 밀어붙이는 전개와 결말은 마치 외계의 것인 양 장르 관습과 법칙을 무시해버린다.

영화는 다영의 폭주에서 비롯돼 그 종막으로 막을 내리지만, 갈등이 정화되거나 이를 통해 난국이 해소되는 것과는 정반대 이야기를 펼친다. 침을 꿀꺽 삼키며 주인공들의 미래를 상상하던 관객의 기대를 짓뭉개며 끝난다. 설마 이렇게까지? 싶을 정도다. 그러면서도 전형적인 청춘 로맨스 영화의 얼개를 고루 갖췄기 때문에 영화를 보며 몇 번이고 속고 또 속게 된다. 그야말로 '거짓말'에 눈 뜨고 코 베이는 셈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내내 말이다.

'촉법소년' 논란은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난제다. 사고를 쳐도 성인처럼 책임을 온전히 지지 않을 것 빤히 아는 영악한 청소년들은 이를 전가의 보도로 범죄를 저지른다. 정당한 응징을 피하는 행태에 분개한 여론은 엄벌주의를 외친다.

문제는 그런 청소년들이 성숙한 판단력을 갖췄는가다. 영화 속에서 다영(과 병훈)은 충동적이긴 해도 시종일관 진지하다. 그렇다고 주변의 어른들처럼 세상 일에 익숙하지도, 사려 깊은 통찰력을 갖추고 있지도 못하다. 매번 분기점마다 이것저것 고민 끝에 생각을 바꾸긴 하지만, 결과가 의도와는 달리 파국으로 롤러코스터 타듯 추락하고 만다.

악순환을 거듭해 가며 다영은 관객이 감정을 이입하기 힘든 특이한 주인공의 면모를 전면화한다. 그는 끊임없이 거짓말을 한다. 관객은 다영이 진실을 말하는지 거짓으로 순간을 모면하려는지 확신할 수 없다. 어설픈 분노와 얇은 고뇌 끝에 타인에게 피해를 주거나 상처를 입힐 위험한 짓을 주도적으로 저지르고, 정작 그다음에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확인 후 전전긍긍한다. 회피만 하지 않고 대면해서 풀어보려 하지만, 번번이 현실은 생각과 다르다. 첫사랑의 광기가 모범생 다영을 폭주하게 만든 것이다.

병훈은 '나쁜 남자'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다. 온전한 순정남도 절대 아니다. 그는 여자친구를 놔두고 바람을 피우고, 뻔뻔하게 이별을 선언한다. 그래놓고 다영이 사고를 일으키자 그 배경이 자신의 이별 통보라는 것을 깨닫고 덩달아 충격에 휩싸인다.

미안한 감정과 보호 본능 등이 복합된 심경으로 그는 자신이 다영을 책임지겠다며 오지랖을 부린다. 그 역시 문제 해결을 위한 능력이 없는 건 똑같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문제를 키운다. 능력도 없으면서 보호자 행세를 하지만, 뒤로는 '찌질남' 행보를 몰래 이어간다. 그런 그의 행태가 영화 속에서 피식 실소를 자아내는 핵심이다. 영화는 관습적으로 다음 장면을 연상하는 관객의 기대(?)를 따라가는 것처럼 진행되다 결과적으로는 그 기대를 배반하기를 거듭하며 소설 속 탐정이 독자를 농락하듯 관객을 쥐락펴락한다.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카메라

▲ 영화 <그 여름날의 거짓말> 스틸컷 ⓒ ㈜마노엔터테인먼트


사고뭉치 청소년 커플의 행보는 미스터리 구조로 관객에게 제공된다. 다영이 격동의 여름방학을 마치고 숙제로 제출한 '추억일기'를 읽은 담임교사가 당사자와 대면해 진실 여부를 확인하는 과정이 영화의 줄거리이기 때문이다. 교사는 다영이 성적에 반영도 되지 않는 방학 숙제를 혼자만 제출한 데 놀라고, 과제물에 기록된 제자의 일탈에 당황한다.

관객은 숙제 내용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있다. 상담실 내에서 벌어지는 스승과 제자의 면담은 밀실 추리극에서 진실 공방으로 전환되고, 다영이 말한 것과 숨긴 것 사이에서 교사는 물론 관객 역시 어디까지 진짜인지 흡사 미적분 공식을 풀이하는 기분이 될 테다.

17살 다영과 병훈이 그들 나름대로 고군분투하는 과정이 안쓰럽게, 하지만 정감과는 거리가 멀게 펼쳐지는 가운데 사건에 말려드는 주위 어른들 역시 수난을 치른다. 홀로 딸을 남부럽지 않게 키워온 다영의 엄마는 모범생 착한 자식으로 믿던 다영의 대책 없는 처신에 배신감을 느낀 나머지 평소와는 달리 격하게 반응한다. 어쩌면 주인공의 모든 문제의 원흉이 된 첫 선택을 자극한 셈이라 볼 수 있는 성인 커플 역시 합리적 판단을 내리거나 주인공을 돕는 역할보다는, 닳고 닳은 어른의 교활한 지혜로 자신들의 피해를 줄이는 데 집중하는 편이다.

그리고 이 모든 사태의 본말을 확인하는 위치에 놓인 담임교사 역시 합리적 중재자로 보기엔 확신이 서지 않는 존재다. 주위 어른들에겐 10대 청소년들은 이해가 불가능한 '괴물'이 돼 버렸다. 그들 또한 주인공(들)과 별반 차이 없는 10대 시절을 보냈을 텐데도 말이다.

물정 모르는 어설픈 괴물은 어른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다. 그들은 자신들이 딱히 어른들과 별 차이 없으리라 믿었을 법하다. 정작 일이 터지자 삶에서 온전한 책임을 진 적 없는 그들은 패닉 상태로 치닫는다. 그 행보가 영악이나 교활과 거리가 멀기에 관객은 10대 주인공들의 어처구니없는 사고뭉치 짓을 보면서 공감이나 이해는 딱히 되지 않아도 애처로움과 연민에 도달하게 된다. 자꾸 책임 못질 일을 저지르는 게 그런 밉상이 없지만, 화가 좀 진정되면 (다영 엄마나 그들과 재수 없게 엉키는 성인 커플처럼) 안쓰러울 수밖에 없다. 어른의 도의는 그런 것이다.

영화는 굳이 애써 결말에서 '그래도 주인공들은 성장했습니다' 식의 억지 마무리를 맺을 생각이 전혀 없다. 17살 청소년 커플은 그들이 (아마 평생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을) '영원한 여름방학'이라는 연옥에 갇힐지도 모른다. 적어도 결말이 암시하는 바대로 그들은 자신들이 질러댄 온갖 사건사고의 대가를 치를 것은 분명해 보인다.

미숙한 청소년들을 '사회가 이렇게 만들고 말았다' 식의 환경결정론이 들어설 여지도 희박해 보인다. 그저 자신들 역시 훗날 과거를 회고해 보면 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랬을까 할 만큼 첫사랑의 열병은 두 주인공을 (반어적 의미로) 아주 특별한 여름방학으로 휘감아버렸다.

더 당혹스러운 건 정작 그들의 사건과 대가의 과정은 세상에 알려질 일이 아니란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주변 몇몇을 제외하면 누구도 그들에게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햇살 푸르고 하늘은 맑던 그해 여름은 오직 다영과 병훈에게만 평생 잊히지 않을 깊숙한 생채기로 남을 테다.

10대의 어수룩한 연애 대가로는 상처가 너무 쓰리다. 하지만 모든 게 그들 선택의 결과이니 누굴 탓하랴. 감독의 카메라는 그저 문득 일어날 법한 '사건'을 돋보기로 관찰해 관객에게 보일 뿐이다. 바로 그런 관점과 태도가 <그 여름날의 거짓말>을 일본 청춘 영화의 중력 속으로 빨려드는 한국 독립영화 홍수 속에서 아주 특별한 변주로 완성한다.

"그 여름날의 거짓말" 포스터영화 <그 여름날의 거짓말> 포스터 ⓒ ㈜마노엔터테인먼트


[작품정보]

그 여름날의 거짓말 That Summer's Lie
2023 한국 화상주의 열일곱 로맨스
2024.08.28. 개봉 138분 15세 관람가
감독/각본 손현록
출연 박서윤, 최민재, 유의태, 윤재인, 김채원, 국 형
제작 왓어원더필름
제작지원 울산문화재단, 울산국제영화제
개봉지원 영화진흥위원회
배급 ㈜마노엔터테인먼트

2023 28회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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