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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대 국문과의 기적... 항간에 떠돌던 말, 이상할 게 없다

[윤찬영의 익산 블루스] 익산의 특산품은 '문학'이다

등록|2024.09.04 06:50 수정|2024.09.04 06:50

▲ 지난 6월 26일, 익산 기찻길옆골목책방에서 진행한 <박범신 작가와의 대화> ⓒ 윤찬영


"나의 문학적 자궁은 여기서 멀지 않은 강경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나를 작가로 키운 곳은 익산이다. 익산은 나의 문학적 고향이라는 마음을 늘 갖고 있다."

올해로 등단 50년을 넘긴 박범신 작가의 말이다. 그는 옛 익산군 황화면 봉동리(1963년 충남으로 편입)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외아들을 멀리 강경중학교로 유학 보냈고, 교과서 말고 다른 책이라곤 본 적 없던 그는 학교에 도서관이 생기면서 처음으로 책다운 책을 펼칠 수 있었다. 매일 왕복 18km에 달하는 등굣길을 하루 4시간씩 오가야 했던 시절, 졸음을 참아가며 처음 빌려온 책을 몇 장 넘기던 그는 "너무나 강력하게" 그 책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잠이 싹 달아나고, 책을 끝까지 그대로 앉은 자세로 읽었다. 책의 마지막을 다 넘길 때는 책장이 눈물로 다 젖어 있었다. 책 한 권으로 인생이 완전히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런 경험은 다시 할 수가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어쩌면 작가로서의 그의 삶은 그날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그는 익산 남성고등학교로 진학한다. 멀리서도 기차를 타고 수재들이 모여들던 학교였다. 그도 날마다 기차를 타고 강경과 이리를 오갔다. 그래서인지 작가 자신의 성장기로 읽히는 소설 <더러운 책상>엔 기차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강경에서 이리까지는 통학기차로 오십여 분 거리이다.
그는 새벽 여섯시 사십오분 기차를 타고서 고등학교가 있는 이리로 떠나고, 이리에서 오후 다섯시 반에 출발하는 통학기차로 돌아온다. 통학하는 학생들에게 이용할 권리가 보장된 기차는 이 두 편뿐이다. 그것은 일반 객차와 다르다. 통학기차는 화물칸을 개조해 만든 것으로 일반 객차보다 작고 새카맣다... (중략) 기차는 그러므로 마치 철제 감옥 같다."
- 박범신 <더러운 책상> 중

그 무렵 해마다 12월이면 이 도시의 모든 학교 문학반 학생들이 다 같이 예식장을 빌려 '문학의 밤' 행사를 열곤 했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많은 시인과 소설가들이 익산에 머물던 그 시절, 신동엽, 김수영, 고은 등 내로라하는 시인들도 그 자리에 함께했다고 한다. 그는 "그만큼 익산은 문학의 전통이 굉장히 강했고, 익산하면 그냥 문학의 도시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전국적으로 문인들이 그렇게 많이 살던 데가 없었다. 문학은 익산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매우 자연스러웠다. 기라성 같은 시인들이 1년에 한 번씩 앞자리에 쭉 앉아서 지켜봤다. 매우 문학적인 도시에서 성장했다고 말하고 싶다."

그는 가난했던 집안 형편 탓에 교육대학에 진학할 수밖에 없었지만 끝내 문학에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남들보다 조금 늦게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편입했다. 그리고 졸업 이듬해인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여름의 잔해>란 작품으로 당선됐다. "쓸쓸했다"던 그의 짧았던 대학 시절은 그렇게 저물었다.

"학교 뒤에 초가집 몇 채, 막걸리집이 전부였다. 이른바 대학가였다. 막걸리 마시고 토하고 울고... 지금 생각하면 전설 같은 이야기지만 아마 많은 학생들이 거기에서 인생의 깊은 맛을 제대로 배우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지금 환경이 부럽지는 않다. 매우 문학적인 기억들이다."

안도현 "내 시를 완전히 바꾸는 계기..."

▲ 지난 5월 23일, 익산 기찻길옆골목책방에서 열린 <안도현 작가와의 대화> ⓒ 윤찬영


"아무것도 가진 거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해, 시를 쓰는 비밀을 간직해 살기 시작하던 나의 스무 살에게 이 책을 건넨다."

안도현 작가가 등단 40주년을 기념해 출간한 책 <고백>(2021) 앞머리에 적힌 글이다. 그의 고향은 저 멀리 경북 예천이다. 스무 살이던 1980년 어느 밤, 이불 보따리를 짊어지고 대전을 거쳐 한참을 돌아 옛 이리역에 내렸다던 그에게 이 도시에서 보낸 시간들은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그는 "익산에 온 것 자체가 내 시를 완전히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이른바 '김춘수적'인 시 쓰기를 배웠다. 언어를 갈고 닦는 것, 절제... 이런 것들이 중요하다고 배웠다. 그런데 익산에 오니 알게 모르게 판소리 가락 같은 분위기들이 스며있는 게 딱 보이더라. 그래서 그걸 배우려고 노력하고 많이 훔쳤다. 경상도식 방식과 전라도식 방식을 섞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습작을 했다."

그가 다룬 소재들만 봐도 변화는 뚜렷하다. 그는 대학교 1학년 때 <낙동강>이라는 시로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된 데 이어 4학년 때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라는 시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연거푸 당선됐는데, '낙동강'은 그의 고향 경북 예천을 지나는 강이고 '전봉준'은 전북에서 봉기한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였다. 그는 "80학번으로서 간접적이지만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겪었던 경험이 영향을 미쳤다"고도 했다.

"1980년대에 서울로 가지 않고 이 전라도라는 땅의 이리라는 곳에 살았던 게 너무너무 잘된 일이었단 생각을 많이 했다. 내가 쓰는 시가 그냥 골방에 처박혀서 내 이야기만 쓰는 데 그쳐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라는 시도 그렇게 나올 수 있었다."

그는 1994년 무렵까지 14년을 익산에서 살았다. 대학 졸업 뒤엔 이리중학교 국어교사로 부임했다가 얼마 못 가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을 당했다. 다행히 5년 뒤 복직할 수 있었고, 2년 뒤인 1996년 어른들을 위한 동화 <연어>를 출간했다. 이 책은 지금까지 백만 부가 넘게 팔렸다. 결혼도 이곳에서 하고 두 아이도 모두 이곳에서 낳은 그는 "익산 살 때는 진짜로 익산이 고향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 시절 시내버스를 타고 익산 터미널 옆 고가도로를 타고 넘어가다 창밖을 내다보면 경상도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이 보였다. 들판에 있는 불빛들이 일렬로 보이는 게 아니고 둥글게 보였는데, 그때 그 경험이 무지하게 신비로웠다. 마치 지구 전체가 다 보이는 것 같았다."

훗날 그는 그때 본 풍경을 동학농민군이 돌렸던 사발통문의 동그란 형상에 빗대어 시에 담아내기도 했다. 그가 신춘문예에 당선된 뒤 1985년에 내놓은 첫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부터 1994년 내놓은 네 번째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까지엔 익산을 다룬 글들이 많다. 이 도시의 옛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시들도 있다. 지금은 번듯한 지하차도로 탈바꿈했지만 그 시절엔 기차역 옆으로 굴다리가 지났다.

"하늘에 팽팽히 걸린 거대한 다리가 아니라 / 이리역 지하도는 굴다리, 땅속을 흐른다 / 이곳을 통과하려면 딱정벌레처럼 어깨를 접어야 하리 / 누군가 보면 물이 되어 스며드는 것처럼, / 빈부격차가 없는 흐린 불빛 속으로 가면 / 지아비가 끌고 지아비가 미는 과일 손수레도 / 밝은 세상 가자고 부지런히 삐그덕거린다 / 징징거리며 앞지르는 오토바이, 막노동꾼과 공무원도 / 단발머리 여학생 몇몇과 노인도 모두 섞이어 / 간다, 이렇게들 수십년 지나갔으므로 / 역사는 기록될 수 있었다 그러나 / 어제만 해도 얼마나 많은 눈뜬 시체들이 / 우리 머리 위 호남선을 오르내렸는지 모른다" - 안도현의 <이리역 굴다리> 중

윤흥길, 양귀자 그리고 채만식, 이병기...

▲ 윤흥길 작가의 <소라단 가는 길>, <문신> 등의 작품들 ⓒ 윤찬영


한국 문단의 거목이자, 교과서에 가장 많은 작품이 실린 작가로 꼽히는 윤흥길 작가도 이 도시와 인연이 깊다. 익산에서 멀지 않은 정읍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을 익산에서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강경상업학교를 나온 엘리트였지만 강직한 성품 탓에 어디서건 오래 붙어있지 못했다고 한다. 집안 형편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고, 한 번은 어렵게 마련한 무허가 판잣집이 헐려 가족 모두가 창고에서 살기도 했다고.

그는 아홉 살 어린 나이에 전쟁을 겪어야 했는데, 그가 지나온 험난했던 유년기의 삶은 <소라단 가는 길>과 <에미>를 비롯한 그의 작품 곳곳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가 전주사범학교를 나와 처음 발령받은 곳도 익산의 춘포국민학교였다. 숙직실에서 어느 작가의 신춘문예 당선 기사를 보고는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는 그는 정말로 2년 뒤에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이름을 올렸다. 그가 원광대학교 국어국문과에 들어간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의 작품에는 소라단을 비롯해 신광교회, 이리시청, 익산군청, 만세주조장 등 그 시절 이 도시의 풍경을 보여주는 이름들이 곳곳에 나온다. 역사에서 잊힌 1950년 7월 미군의 '이리역 오폭 사고', 한때 고무신 시장을 주름잡았다는 '천일고무' 이야기도 나오고, 이곳이 피란민을 따뜻하게 품어준 도시였다는 사실도 일깨워주고 있다.

▲ 양귀자 작가를 비롯해 익산 출신 작가들의 작품들 ⓒ 윤찬영


전주에서 태어난 양귀자 작가도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나왔다. 한때 한국 문단에 '원광대 문학사단'이란 말이 떠돌았던 건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 그에게 이상문학상을 안겨 준 소설 <숨은꽃>은 기차역의 기억으로 시작한다.

"기차가 이리에 멈추었을 때 나는 가벼운 두통을 느끼며 눈을 떴다."

채만식 작가도 생의 마지막을 이 도시에서 보냈다. 익산에 접한 옛 전북 옥구군(군산시 임피면)에서 태어난 그는 말년에 이 도시로 와 마지막 작품인 <심봉사>와 <소년은 자란다>를 썼다. 일제강점기에 만주로 떠났던 가족이 해방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오다 부모는 죽고 남겨진 어린 남매들이 익산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다.

"강경을 지나면 함열버틈 전라도니라. 함열, 황등, 이리 그런데, 전라도루 들어서 이리가 젤 크니라. 클 뿐 아니라 전라남도루 가는 것이 아니구, 전라북도루 가서 농사할 고장을 찾는다면 누가 됐던, 이리서 내리는 게 순설 거다." - 채민식의 <소년은 자란다> 중

현대시조를 개척한 시조시인이자 한글학자인 가람 이병기 선생도 빼놓을 수 없다. 익산 여산면에서 태어난 그는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1년 가까이 감옥생활을 하기도 했다. 여산면 그의 생가 옆에 가람문학관이 있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 서산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 산뜻한 초사흘달이 별 함께 나아오더라 // 달은 넘어 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 어느게요 / 잠자코 홀로 서서 별을 헤어 보노라 – 이병기의 <별>

누가 뭐라 해도 익산은 '문학의 도시'다. 누군가 내게 익산의 특산품을 묻는다면, 주저 없이 익산이 낳은 작가들과 익산을 다룬 작품들을 꼽겠다.
덧붙이는 글 - 지난 5월 23일과 6월 26일, 익산 '기찻길옆책방'에서 열린 <안도현 작가와의 대화>와 <박범신 작가와의 대화>에서 나눈 이야기들이다.
- 박태건, "익산의 문화와 예술가들", <(익산학 시민교재) 익산, 도시와 사람>(2019)을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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